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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예YEEYEE May 07. 2024

에헴 할아버지와 고구마씨 3. 최종화 : 바람이 되어


며칠이 지났습니다. 고구마씨가 이번엔 할아버지를 장독대로 이끌었습니다. 담장 밑에 묻혀 있는 독으로 다가간 고구마씨가 외쳤어요.

“거기, 거기. 그래요. 장독을 열어보세요.”

에헴 할아버지는 정말 이상한 고구마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말하고 걷는 것부터 이상했지만요.

텅텅 빈 독을 들여다보며 고구마씨가 큰일 난 것처럼 외쳤어요.

“아니. 여기에 아무것도 없다니! 어쩌자는 말입니까? 가을에 김장도 안 하고 뭐 하셨습니까?”

에헴 할아버지를 광으로 밀고 들어간 고구마씨가 손을 뻗었어요. 그 끝에는 쌓아둔 배추가 보였습니다.

“저기 있는 배추를 꺼내서 절여보십시오.”

“그런 건 할멈이 있어야 같이 하지. 혼자는 못하네.”

“무슨 소립니까! 혼자서는 못한다니요. 못한다고 안 하면 평생 못하는 거 아닙니까?”

버럭 하는 고구마씨의 외침에 할아버지는 함께 김장하던 할머니가 떠올랐어요.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무를 얇고 먹기 좋게 채 썰어서 김장 준비를 마쳤어요.

“양념은 늘 임자가 해서. 잘 모르네.”

“고춧가루 대충 넣고, 멸치액젓도 넣고, 새우젓이랑 설탕을 넣으세요.”

할아버지는 고구마씨가 이끄는 대로 양념을 만들었어요.

“좀 싱거운데?”

“그러면 소금을 넣어서 간을 하면 되잖아요!”

겨우 김치에 넣을 속을 만든 할아버지는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낮잠을 잤어요. 할아버지는 자고 일어났을 때 김치가 모두 되어 있는 상황을 상상 했답니다. 하지만 꿈일 뿐이었어요. 배추는 그대로 있었어요.

“허리가 아파서 그런데 고구마씨 자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나?”

고구마씨가 깜짝 놀라며 말했어요.

“내 몸에 소금이 닿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큰일 납니다.”

에헴 할아버지는 처음이라 어설펐지만 결국 혼자 힘으로 김치를 해냈어요.

옆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던 고구마씨는 독에 배추를 넣을 때가 되어서 일어났습니다.

“김치를 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뒷정리해야지요.”

“거참 자네는 잔소리가 꼭 우리 할멈 같구먼.”

할아버지의 말에 고구마씨가 헛기침했어요.

김장하느라 고단했던 할아버지는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잠에 빠졌어요. 그런 할아버지의 곁에서 고구마씨도 그르렁 그르렁 리듬을 맞추며 함께 코를 골았어요.

겨우내 고구마씨의 잔소리는 에헴 할아버지를 따라다녔습니다. 잔소리만큼이나 많은 싹이 고구마씨의 머리에 피어났어요.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초록색 털모자 대신해 고구마씨의 머리를 채웠죠. 

시간이 흘러 봄이 왔습니다.

녹아내린 눈이 시냇물이 되어 흐르던 날이었습니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던 고구마씨가 에헴 할아버지에게 말했어요.

“때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제 고구마씨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땅이 녹았으니 나는 흙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벌써 봄이 되었군. 그동안 참 즐거웠네.”

빨간 바구니에 고구마를 가득 채운 할아버지가 밭으로 향했어요. 고구마씨는 천천히 그 뒤를 따랐습니다.

고르게 갈려있는 밭에 들어선 에헴 할아버지가 호미질을 시작했어요. 바구니에 담긴 작은 고구마들이 하나, 둘 흙으로 들어갔지요.

고랑에 앉은 고구마씨는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봤어요.

고구마를 모두 심고 할아버지는 그제야 고구마씨를 바라보았습니다.

어이쿠! 고구마씨는 코를 골며 졸고 있네요.

“참 별난 고구마야.”

할아버지는 혼잣말하며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흙을 팠어요.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파도, 호미로는 고구마씨가 폭 묻힐 정도로 깊이 팔 수가 없었어요.

“이보게 고구마씨. 아무래도 삽이 있어야겠네.”

“그냥. 호미로 하세요. 농부가 그것도 못하면 되겠어요?”

“자네도 참. 농기구가 왜 다양하게 있다고 생각하나? 저마다 쓰임이 달라서 그래.”

“치. 알았어요. 그러면 다녀오세요.”

할아버지가 집으로 향하려고 할 때였어요.

“저, 영감님. 그동안 참 즐거웠습니다.”

멈춰선 에헴 할아버지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나도. 자네 덕분에 겨울을 버텼네.”

부끄러운 듯 할아버지는 집으로 달려갔어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구마씨가 소리쳤어요.

“나는 고구마의 정령이니까. 땅으로 들어가면 바람이 되어서 이곳을 지킬 겁니다!”

고구마씨의 목소리를 가슴에 담고 할아버지는 조금 더 속도를 냈어요.

삽을 챙겨서 에헴 할아버지가 밭으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고구마씨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광에서 처음 모자를 쓰던 날처럼 평범한 고구마가 되어 있었죠. 눈, 코, 입은 사라지고, 팔다리는 고구마 줄기로 변해있었습니다.

에헴 할아버지는 묵묵히 고구마씨를 땅에 묻었어요.

“봄이 되었는데, 왜 이리 쓸쓸한지 모르겠구먼.”

혼잣말하며 할아버지가 밭을 벗어났어요.

고구마씨가 떠난 숲과 집은 너무도 적막하고 쓸쓸했어요.

에헴 할아버지는 멍하니 앉아 있는 날이 늘었답니다. 그래도 아침은 꼭꼭 챙겨 먹었어요. 고구마씨가 바람이 되어 할아버지를 지켜본다고 했거든요.

할아버지는 그 말을 믿어요. 왜냐하면 할머니를 닮은 고구마였으니까요. 잔소리가 어찌나 할머니와 닮았던지. 에헴 할아버지는 고구마씨를 떠올릴 때마다 할머니가 함께 떠올랐어요.

때때로 고구마씨가 바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어요. 에헴 할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일할 때, 꼭 시원한 바람이 머리 위로 불었거든요.

고구마씨를 심었던 자리에서 자라난 싹은 순이 되어서 푸른색으로 밭을 가득 메웠습니다.

에헴 할아버지는 여전히 부지런하고, 더 열심히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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