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지 뭘
잡채, 케이크, 과자까지 할머니랑 살 때는 생일마다 먹던 음식. 부모님하고 살면서는 거의 먹어 본 적이 없다. 아빠는 분명히 케이크를 사서 오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주현이가 먹지 못하니까. 주현이는 밀가루를 먹으면 탈이 난다. 그래서 가족들이 함께 식사할 때는 밀가루를 먹지 않는다.
나는 부모님하고 함께 산 뒤로 생일에 케이크를 먹지 못했다. 엄마는 심지어 종종 내 생일을 잊었다. 매일 챙겨주는 주현이 한약은 깜박한 적 없으면서, 내 생일에 두 번이나 저녁 때가 되어서 미역국을 끓여줬다. 분명히 잊었다가 할머니 연락을 받고 놀라서 저녁때 생일 챙겨준 게 분명하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거랑 매일 있는 건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 생일에는 선물을 꼭 준다고 했으면서. 엄마는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가끔 나는 태어날 때부터 뭐든 혼자서 했던 기분이다. 아니다. 주현이가 나보다 한 살 어리니까 아마 한 살부터 뭐든 혼자서 했을 거다. 예를 들어서 나는 준비물 정도는 혼자 챙긴다. 입을 옷도 당연히 옷장에서 알아서 꺼낸다. 늦잠은 안 자고 반찬 투정도 안 한다.
친척 어른들은 나를 보고 듬직하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돌아서는 애가 너무 어른 같다고 한다. 뭐 어쩌라는 건지.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건 대단한 일 아닌가?
그동안 착하게 살았으니까 불도그쯤은 생일 선물로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할머니가 보고 싶다. 그냥 할머니랑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할머니가 너무 바쁘다. 올해는 방학 때도 할머니댁에 못간다고 했다. 이대로 집에 박혀있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도록 나는 말 잘 듣는 큰아들이었다. 사실 그렇게 말 잘 듣는 척을 했던 건, 방학이 되면 할머니 댁에 가서 뭐든 해서였다. 그런데 올해는 할머니 댁에 못 간다니! 전처럼 착하게는 못 있겠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엄마는 꿈쩍도 안 한다.
저녁을 먹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매미 소리에 섞여서 들렸다. 방에서 나가도 싫고, 엄마랑 같은 식탁에서 마주 보고 밥 먹을 기분도 아니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미역국이 있었다. 하지만 잡채와 내 생일 선물인 불도그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졌다.
“형아, 생일 축하해. 잘 먹겠습니다.”
미역국을 한 숟가락 입에 넣은 주현이가 갑자기 기침했다. 저러다 말 거라고 했는데 멈춰야 할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주현이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 당황한 부모님이 주현이를 데리고 욕실로 갔다.
내 생일인데 나는 덩그러니 혼자서 식탁에 남겨졌다. 마음 한구석에서 주현이를 보러 가라고 외쳤지만 일어나기 싫어서 꾸역꾸역 밥을 입속에 넣었다. 주현이의 기침은 멈췄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욕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식사를 마친 나는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자고 일어났더니 아침이 되었다. 아빠와 주현이가 없었다. 아빠는 주현이와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간 모양이었다. 주현이가 병원에 가는 날은 아빠가 학교까지 태워주지 않는다. 아빠도 의사면서 왜 동생을 다른 병원에 데리고 가는지 모르겠다.
가방을 메고 현관을 빠져나왔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 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학교까지 걸어가려면 부지런히 가야 한다. 차로는 8분 거리지만 걸어가면 정확하게 30분을 가야 한다. 매일 아빠가 태워주니까 자전거는 필요 없을 거라며 안 사주더니. 더워 죽겠는데 걸어서 학교에 가야 한다. 이러니까 내가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는데, 탈 일 없을 거라더니. 엄마랑 아빠는 뭐든 마음대로 하면서 내가 원하는 자전거 하나를 안 사준다. 사실은 날 주워 온 게 아닐까.
“그거 알아? 오늘 전학생 온다던데.”
등굣길에 만난 민기가 신난 듯 말을 걸었다.
“그 애 축구 잘해?”
우리 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다. 거기다 학생도 적다. 축구하려면 다른 학년 애들하고 해야 한다. 어릴 때야 형들하고 하니까 재밌었는데. 내가 형이 되니까 만날 어린 애들하고 축구하는 거, 살짝 재미없다.
“오늘 전학 온 친구의 이름은 김민준입니다.”
선생님의 소개에 모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뭐지? 길을 걷고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똥 맞은 기분이다. 나랑 이름이 똑같은 애인데 키가 크고 잘생긴 전학생이다.
“우리 반에 민준이가 두 명이 되었네. 둘을 어떻게 부르면 될까?”
선생님 말씀에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전학생은 키가 크니까 큰 민준이, 우리 반 민준이는 키가 작으니까 작은 민준이.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내가 그렇지 뭘. 전학생에게 밀려서 작은 민준이라니. 하긴 뭐 내 이름이 불리는 적이 얼마나 있다고. 작은 민준이가 되든지 말든지.
“반가워. 나랑 이름이 같네.”
하필 내 옆자리가 비어서 전학생이 옆으로 왔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