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늦은 저녁,
나는 오랜만에 호수공원에서 가볍게 러닝을 했다. 호수공원에는 작은 북카페가 근처에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그곳에서, 윤홍균 교수님의 [사랑 수업]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웃음 나오게도 ‘머리말’이다. 머리말은 대부분 책 보기 전에 넘어가기 마련인데 왜 인상깊었나면, 저자의 이 말 때문이었다.
“저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요.”
사실, 사랑을 모르는 저자가 사랑 수업이라는 책을 쓴다면 조금 신뢰성이 없어 보일 순 있겠지만, 알고 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어느 누가 사랑을 제대로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 근데, 성경에서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사랑이라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다알 수 없기에 사랑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을 배워갈 뿐, 다 배우진 못하고, 사랑이란 것이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불완전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더욱더 진실한 사실은, 인간에게 얻는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 수업은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확실하게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윤홍균 교수님의 도서로는 현실적인 사랑의 문제를 다루는데 적합한 책이기에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그치만, 그 사랑이라는 본질의 터를 쌓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쌓아야만 할 것이다.
책을 읽은 다음, 호수공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웃음 짓는 깨달음이 많이 들어서 나눠보려고 한다. 먼저, 인간의 결핍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 분명 말하는 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이다. 근데, 현실적으로는 봤을 때 눈으로 보이는 것이 없고 결핍이 확실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마음의 자세는 나의 모든 마음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자세이다.
사실, 내가 가진 결핍을 더욱 부각하는 태도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그 결핍을 채우려고 안달복달하는 태도이거나, 그것을 주님이 할 수 없고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나 같은 경우, 앞으로의 나의 배우자가 어딘가에 있을 텐데 내가 알아보지 못하거나, 혹은 연인이 없는 것에 대해 결핍이 느낀다면, 나는 그 상대를 찾기 위해 행동할 것이다. 그 과정에는 배우자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과, 결핍이 마음속에 만연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관점을 바꿔서 생각하면, 조금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나는 주님의 신부이고, 주님은 나의 신랑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벌이신 잔치에 참여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사람으로부터 완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결핍을 주님께서 모두 채우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눈앞에 주님이 주신 것을 옆으로 치워놓고 가짜를 위해 전념할 때도 많았을 것이다.
성경에 나온 예시로는 사마리아 여인의 스토리가 나온다. 이 여인은 남편이 5명이 있었는데, 지금 있는 남편도 사실은 그 여인의 남편이 아니었다. 이 사실만 봤을 때, 이 여인은 음란했을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 당시에 이혼을 다섯 번이나 한 셈이니 말이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의 생수를 마시라고 권유한다. 그 생수를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말이다.
여기서, 결론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살아있는 물, 살아있는 말씀을 믿고 마신다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람에게 물 몇 방울 얻는 행위는 또 물을 기르는 수고를 부담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는 편히 물을 얻고 쉼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코 인간에게서 의존을 바라지 않게 된다.
나의 모든 만족되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시로는 ‘외적인 부분’이다. 생각해 보자. 주님은 들에 핀 백합화를 디자인하신 분이고,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꽃들과 자연의 모든 경이로운 풍경들을 디자인하신 최고의 ‘디자이너’다. 이 사실을 알면, 우리들이 자신의 생각으로 감히 성형수술하고, 과한 패션으로 자신을 꾸밀필요가 있을까? 주님은 이미 우리 모두를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그 사실을 모른 채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만을 쫓아 세상적인 기준으로 나를 가리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있는 존재모습 그대로.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옷을 입을 때도 길쌈도 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 공중의 새들처럼, 우리도 옷에 대해 집착할 필요 전혀 없다. 그저, 남을 위해서 단정히 입는 정도면 된다. 옷이든 무엇이든 어떤 것을 가지고 과도하게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선택의 분별력을 잘 기르는 신앙의 훈련을 각자가 성실히 수행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우리 각자의 삶의 본래의 목적을 깨닫고, 자신이 최고로 만족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