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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Jul 31. 2022

제주, 안녕!

아내와 단둘이 제주여행 마지막 날,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일상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늦잠다운 늦잠을 잘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이미 블라인드를 뚫고 방을 환하게 비춘 햇살에도 쉽사리 눈을 뜨지 못했다. 어쩌면 눈을 뜨고 싶지 않아 억지로 다시 잠을 청하고자 애를 썼는지도 모른다. 춘천 육아 시차에 익숙해져 있는 아내도 새벽 6시 30분에 눈을 떴다가 다시 잠을 청했다고 한다. 8시 30분, 게스트하우스 카페에서 사장님이 정성껏 준비하신 조식과 모닝커피로 허기를 달랠 때에도, 조식을 먹고 난 후 마당에서 노니는 고양이들을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도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는 는 사실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방에 들어와 씻고, 방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짐들과 방 가운데 펼쳐 둔 빨래 건조대에서 미처 마르지 못해 눅눅한 옷들을 개는 둥 마는 둥 하여 배낭에 잔뜩 쑤셔 넣고 나니 비로소 현실 감각이 되살아났다. 제주를 떠나는 날이다.

사장님의 정성기 가득 담겨 있던 푸짐한 조식과 모닝커피


  게스트 하우스에서 선뜻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아내의 제안에 따라 동네에 있는 한 책방으로 향했다. 북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면서 본 제주의 예쁜 책방, 북카페들 꼭 한 번 들러보고 싶었는데 모슬포에서도 책방 구경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어나더페이지라는 작은 책방, 책방 주인님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서가,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구경하며 나도 언젠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내 취향을 담은 작은 책방을 하나 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책방을 둘러보며 우리 부부의 이번 제주 여행을 기념할 책을 한 권씩 골랐다. 요즘 한창 세계시민교육과 환경교육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데 몰두하는 아내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레시피'라는 책을, 농촌에서 자랐고, 평생 농촌을 위해 힘쓰고 계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농업 유전자를 속에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나는 '농본주의를 말한다'라는 책을 골랐다. 아내와 나는 성격부터 취향까지 다른 점이 참 많지만, 공통적으로 책을 좋아한다는 점은 축복받을 점이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책방 '어나더페이지'


이번 여행의 유일한 기념품 책 두 권


  제주 국제공항으로 가는 151번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모슬포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로 한 커피 맛집을 찾았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플랫화이트… 어떤 카페에 가던 내가 주문하는 메뉴는 늘 셋 중 한 가지지만, 맛집을 찾았으면 시그니처 메뉴를 꼭 맛봐야 한다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 '와토알프스'라는 메뉴를 새롭게 시도해 보았다. 달달하면서도 깊은 커피의 맛, 창 밖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과 한적한 밭의 풍경도 좋았다. 늘 익숙해져 있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를 찾고,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자리를 떠나기 아쉬웠던 커피 타임


  섬 관광객에서 다시 육지 주민이 되는 시간 두 시간 반, 모슬포에서 제주 국제공항까지 한 시간을 달리고, 제주 국제공항에서 양양 국제공항까지 약 한 시간 반을 날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양양 읍내에서 닭강정을 사 뒷좌석에 고이 모시고 춘천으로 가는 길, 차도 막히고 오랜만에 잡는 운전대가 어색했지만 집에서 4박 5일 동안 돌아오지 않는 아빠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딸내미를 생각하며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 최대한 침착하고 안전하게 운전했다. 그리고 그리웠던 해솔이를 품에 꼭 안으며 제주 여행 일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여행의 여운을 길게 끌고 갈 틈도 없이 다시 육아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을 시간이면 일어나 '아빠 다 잤어요.'라며 손가락으로 아빠의 감긴 눈꺼풀을 열어젖히는 아이. 창 밖을 보면 펼쳐지던 바다와 정겨운 돌담은 온데간데없고 집안 곳곳에 널브러진 장난감들과 그림책들, 그리고 시종일관 맛있는 것을 달라며, 그림책을 읽어 달라며 쉴 틈을 주지 않는 해솔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지나간 제주에서의 4박 5일의 시간들이 문득 떠오르며 아쉬운 생각이 들다가도, 여행 기간 동안 올레길을 걸을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른거리던 딸내미의 얼굴을 직접 만져보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꼭 안아 줄 수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가 태어난 후 가장 오래 떨어져 아내와 단둘이 보냈던 시간, 평소 일에 치이고 육아에 치여 잊고 있었던 자유로운 여행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이에 대한 소중함과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 2022년의 여름 제주 여행은 오래도록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 4박 5일 동안 해솔이를 잘 돌봐주신 장모님과 처제, 씩씩하게 엄마 아빠를 기다려 준 해솔이, 그리고 4박 5일 동안 소중한 추억을 함께 만들어 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빠 얼른 현실로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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