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랑 Jun 12. 2024

장기 수감자

대사관 사건사고 일지

한국에서 전화한 남자는 자기 아버지가 필리핀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 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그는 엄마에게 아버지가 예전에 외국에서 돌아가셨다고만 들었는데 최근에 결혼을 앞둔 그가 아버지가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 지를 묻자 필리핀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 이름을 듣는 즉시 누군지 알았다. 

내가 관리하는 한국인 수감자 명단 제일 위에 있는 이름 중 하나였고 그 얘기는 장기 복역 중이라는 말이다.


이 나라 남쪽 큰 섬의 감옥에서 이미 20년 가까이 수감 중인 남자였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수감 중이며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젊은 남자는 수 초간의 정적을 통하여 무척 놀랐다는 걸 알게 했고 어떤 이유로 수감 중인지를 물었지만 

바로 알려줄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성년자를 강간한 혐의로 이미 모든 재판을 마치고 수감 중이었다.


대사관에서는 연 2회 한국인 수감자 정기면회를 가는데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인 경우라면 사건이나 재판 관련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미 재판이 끝난, 게다가 장기수의 경우 별로 나눌 얘기도 없고 건강상태 확인 등 몇 가지 안부만 묻다가 생필품이 포함된 라면 박스를 전해 주는 것이 고작이다.


불과 얼마 전의 영사면회에서 그의 아버지를 만났고 예전에는 면회조차 거부하던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결심을 했는지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담담하게 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농장 사업을 하고 있었고 꽤 잘 되었다고 한다. 

현지인 가정부가 있었는데 딸을 데려오고 싶다고 해서 중학생 정도 되는 그 딸도 집에서 같이 살도록 해 주었는데 미혼모였던 가정부의 남자친구가 가정부를 꼬드겨서 '외국인에게 딸의 강간 혐의를 뒤집어 씌우면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라며 허위로 경찰에 신고하고 메이드와 함께 거짓 진술을 한 후에 

경찰에 체포된 그에게 합의금으로 우리 돈 200만 원 정도를 요구했다. 


떳떳했던 그는 합의를 거부하자 본 재판이 진행되었고 판사는 그에게 1심에서 징역 25년을 선고하였다. 

변호사도 없이 국선 변호인만 써서 사실상 본인이 직접 변호를 하였다. 

재판은 길어져 갔고 항소심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에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한참 후에 가정부와 딸이 찾아와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직접 했다고 한다. 


판사는 사람을 보내서 석방을 대가로 뇌물을 요구하였는데 이미 몇 년 간 수감으로 이미 남아있는 재산마저 거의 없는 상태임에도 대사관의 도움이나 한국의 가족에겐 연락 시도 조차 하지 않았다. 

고생을 할지언정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있는 곳과 면회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끝내 어머니의 반대로 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가석방 심사를 몇 달 남겨두고 건강이 악화되어 옥 중에서 사망하였다. 



이전 03화 유가족의 부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