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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 어느 부녀의 낮술

삼겹살 한 상과 청계천 산책, 어느 여름날의 기록

by KOSAKA

7월 5일 새벽 4시 18분. 일본 열도에서는 ‘예언된 대지진’이 온다는 말이 돌았다. 이름하여 난카이 대지진. 아직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확률이 높다고 경고되어 온 거대한 지각의 틈이었다. 이번에는 날짜까지 특정된 예측이 온라인을 떠돌았고, 큐슈 남쪽의 지진과 화산 활동이 심상치 않았기에 나는 잠시 한국으로 피난 아닌 피난을 오게 되었다.


다행히 정해진 시간은 조용히 지나갔다. 큰 피해도 없었다. 그러나 큐슈 남부에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지진 소식과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산재 뉴스는 마음 한편을 여전히 불안하게 한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딸아이가 신촌의 한 삼겹살집 리뷰 캠페인에 선정되어 한턱 쏘는 날이었다. 말하자면 맛집 체험단 같은 것이었는데, 음식도 무료로 제공된다고 했다. 모처럼 부녀가 함께 나설 수 있는 자리. 낮술 한 잔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먹음직

신촌은 여전히 젊은 동네였다. 그 활기 속에서 우리는 삼겹살과 목살 각 1인분, 차돌된장찌개, 물냉면, 볶음밥까지 알차게 한 상을 받았다. 차림도 푸짐했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이 모든 게 무료였다는 사실이다. 나는 딸에게 물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글로소득인가?” 리뷰 한 편으로 누리는 만찬.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식사와 술이 오가며 대화도 자연스레 깊어졌다. 나는 최근 중동 정세, 새 정부에 대한 기대, 투자 방향 같은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졸업을 앞둔 딸은 회사생활과 워라밸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아빠는 워라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AI 기술이 더 발전하고, 주 4일 근무 시대가 본격화되면 그때는 워라밸보다 기본소득이 다시 뜨거운 논점이 될 거야. 일하는 시간보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고민해야 할지도 몰라.” 잠시 딸이 생각에 잠겼다. 짧지만 의미 있는 대화였다. 평소라면 이런 대화를 나눌 기회가 드물었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우리 가족이 도심에 나올 때면 늘 들르던 공간.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이후 처음 방문한 교보였고, 자연스럽게 발길은 에세이 코너로 향했다. 낯익은 작가님들의 이름과 표지들이 진열대에서 반겨주었다. 나는 그 한켠에 언젠가 내 이름도 함께 놓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다짐을 되뇌었다.


그 뒤로는 익숙한 루틴. 역사 코너에 들러 책 몇 권을 집어 들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활자가 흐릿하고 겹쳐 보이더니, 아예 문장을 읽을 수가 없었다. 노안일까. 아니면 브런치스토리 원고를 밤낮없이 써대다 생긴 일종의 산재일까. 결국 책은 내려놓고 전자책으로 독서를 이어가야겠다는, 약간은 씁쓸한 자각만 얻었다.


딸은 그런 나를 위해 스타벅스에 가서 자리를 잡아보려 애썼지만, 만석이었다. 결국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귀가길에 나섰다. 교보문고를 나와 청계천 변을 따라 잠시 걸었다. 유튜브 클립에서 자주 보이던 왜가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은 넘쳐났다. 청계천과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조합은 여전히 내겐 익숙지 않다. 이질적이면서도 시대가 달라졌음을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청계천은 역시 아아다.

청계천을 따라 롯데백화점 건너편까지 걷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부자지간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곧 수험생이 될 여동생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아빠는 “공부를 억지로라도 시켜야 한다”고 했고, 아들은 “그런 강제는 아무 의미 없다”고 말했다. 아이가 책상에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성적은 오르지 않고, 관심이 없으니 억지로 해봐야 효과도 없다는 것.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딸의 수험생 시절, 저런 고민을 했던 적이 없었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해서, 성적이 안 나와서 걱정스러웠던 대화는 우리 부녀 사이에 거의 없었다. 그 시절이 벌써 훌쩍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자식 교육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오늘은 생략하기로 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수면내시경 중인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덧 집 근처였다. 짧지만 꽤 밀도 있었던 하루. 딸과 단둘이 오랜만에 보낸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리고 내일은, 아침부터 온가족이 합세해 미술관 오픈런에 나설 예정이다. 나의 지진으로부터의 도피이자 여름 휴가는 이렇게 소확행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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