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근간으로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과의 관계를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난
여기저기에 소개된 책의 설명, 그리고 발췌된 문장들을 보면서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가 김경주의 《밀어密語 : 몸에 관한 詩적 몽상》와 비슷한 산문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였다. 하지만 《몸의 일기》는 소설이다. 페이크 다큐와 유사한 일종의 페이크 자전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맨 앞에 <출간에 부쳐>라는 제목을 단 머리말이 있는데, 그 내용인즉슨 어떻게 D.P의 (그러니까 다니엘 페나크이겠지...) 수중에 이 책의 초고가 될 원고가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다니엘 페나크가 우연히 입수한 어떤 원고에서 기인하였고, 그것이 전부라고 점잖은 너스레를 보여준다.
“... 그때 이후 평생 써온 이 일기의 목표는 이랬다. 몸과 정신을 구별하고, 내 상상력의 공격으로부터 내 몸을 보호하고, 또 내 몸이 보내는 부적절한 신호에 대항해 내 상상력을 보호하는 것...” (pp.22~23) 64세 2개월 18일, 1987년 12월 28일 월요일
1923년 10월 10일에 태어난 ‘나’는 (책에는 나의 이름이나 하는 일 등은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열두 살이 되던 어느 날 캠핑장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시달리며 겪게 된 정신의 공포 상황 이후, 다시는 이러한 허상의 두려움을 겪지 않기 위하여 몸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결정을 곤고히 하기 위하여 앞으로 몸에 대한 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그 다짐을 실현한다.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p.27) 12세 11개월 18일, 1936년 9월 28일 월요일
“그래, 나의 도도, 이젠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겁먹지 마, 너도 데려가줄게.” (p.483) 87세 19일, 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그렇게 해서 ‘나’는 평생에 걸쳐, 나의 나이 12세 11개월 18일이던 1936년 9월 28일부터 나의 나이 87세 19일이 되는 2010년 10월 29일까지 ‘몸의 일기’를 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이 일기를 자신의 딸 리종에게 몇 장의 편지와 함께 남긴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 페나크는 리종의 친구인데, 자신이 몇 번 본 적도 있는 리종의 아버지가 남긴 이 원고를 읽은 후 결국 출간을 결정한 것이다. 이름이 알려져 있는 소설 속 ‘나’를 익명으로 처리한 채로...)
“.. 난 내 몸을 관찰해보고 싶다. 아직도 내겐 내 몸이 속속들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대놓고 이렇게 대답하진 않았다). 의학 연구가 아무리 진척되었다 해도, 이 낯선 느낌을 없애주진 못할 것이다. 루소가 산책길에 식물채집을 했던 것처럼 나도 내 몸을 채집하고 싶다. 죽는 날까지, 그리고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그것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것이 되어도 좋겠지만 말이다. 어떤 직업을 갖느냐,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어쨌든 이 일기에는 직업에 관해선 쓰지 않을 것이다.” (p.112) 17세 2개월 17일, 1940년 12월 27일 금요일
책은 그렇게 일기를 작성하는 ‘나’의 성장 과정을 포함하여, 사랑과 출산, 그리고 노년의 삶에로 이어진다. (간혹 몇 년씩,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 중이라거나 손자를 잃어 실의에 빠진 탓에 일기를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러한 빈틈은 딸인 리종에게 남기는 편지를 통해 채운다.) 그렇게 이 일기는 철저하게, ‘내면 일기’가 아닌 ‘몸의 일기’로 국한되어 있다, 라고 ‘나’는 몇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마네스 아저씨의 장례식 때 팡슈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지뢰, 네가 아파치 인디언이건, 피그미족이건, 중국인이건, 화성인이건, 그 무엇으로 변장을 한다 해도 난 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네 미소를 보고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우리 몸에서 풍겨 나오는 것들, 즉 실루엣, 걸음걸이, 목소리, 미소, 필체, 몸짓, 표정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 곁에 있다 사라진 사람들을 떠올려볼 때,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흔적들인 것이다. 전투기 안에서 가루가 되어버린 자기 오빠에 대해 팡슈는 이렇게 말했다. 입술이고, 그래, 다 산산조각 날 수 있어. 하지만 미소는 아냐.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 (p.210) 35세 1개월 24일, 1958년 12월 4일 목요일
하지만 실제 ‘몸의 일기’의 많은 부분은 ‘나’의 극구부인에도 불구하고 ‘내면 일기’이기도하다. 몸과 정신의 분리에 대해 ‘나’는 끊임없이 집착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은 것만 같다. 특히나 그것이 자신의 몸뚱어리가 아니라 자식들 혹은 손자들의 몸뚱어리인 경우 그것은 그저 몸으로만 기능하지는 않는다. 나의 몸은 그저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대상이 나로부터 기인한 또 다른 몸일 때 그것은 몸 이상의 무엇이 되지 않을 수 없다.
“... 너희들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 그건 충격이었다. 우리 애들은 태초부터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아이들이 없는 우리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이 없던 시절, 아이들 없이 우리 둘만 살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는데도, 아이의 몸뚱어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불쑥 던져졌기 때문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런 감정은 우리 아이들한테만 해당되는 거란다. 다른 존재들에 관해선, 그들이 아무리 가깝고 또 그들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들의 부재를 상상하는 게 가능하거든. 그러나 우리 아이들의 부재는 상상이 안 된다...” (p.209) 리종에게 남기는 말 중
그러니 자식들의 탄생의 순간에 부쳐 ‘나’는 이렇게 편지를 남김으로써 부연한다. 그저 ‘나’의 ‘몸’이 아니라 몸의 재생 혹은 몸의 순환이라는 또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순간, 아무래도 ‘나’의 내면은 그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의 손자인 그레구아루의 죽음 이후의 기록은 구구절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몸의 쇠락은 정통으로 바라보며 기록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몸의 누락에 대해선 그것이 쉽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 부러진 왼팔이 팔꿈치와 따로 놀면서 허공을 휘저을 때조차 놀람도 공포도 통증도 없었다. 그냥 확인을 하는 정도였다고 할까. 아, 이런 일이 일어났군, 됐어, 됐어. 이렇듯 슬픔에 빠진 내 뇌는 삶으로부터 아무런 의미도 못 느끼고 있었다. 이 여러 사건의 원인인 그레구아르의 부재가 모든 사건을 압도하고, 또 그것들로부터 모든 의미를 앗아간 것 같았다. 그레구아르가 모든 것의 원칙이었기 때문에, 그가 떠나고 나선 문자 그대로 삶이 의미를 잃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 몸도 내 판단력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홀로 방향을 벗어나 있었다...” (p.440) 79세 5개월 6일, 2003년 3월 16일 일요일
어찌되었든 소설은 1923년 10월 10일 출생하여 2010년 10월 29일 사망한 ‘나’가 기록한, 내면 일기의 피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몸의 일기’이다. 그리고 내가 열 살이던 무렵 돌아가신 아빠 그리고 히스테리 가득한 엄마를 대신하여 나를 키운 비올레트 아줌마, 상상 속에서 언제까지고 내 곁에 머문 도도를 비롯하여 열 살 터울 동생인 티조와 여러 사촌들 그리고 레지스탕스 동료였던 팡슈, 훌륭한 성적 파트너였으며 내 모든 후손들의 엄마이기도 한 아내 모나, ‘나’와 아내에게 기원을 둔 아들 브뤼노와 딸 리종 그리고 손자와 손녀들... 그렇게 소설은 ‘나’의 ‘몸의 일기’이면서 동시에 ‘나’의 몸을 근간으로, 이 모든 인물들과의 관계를 자양분 삼아, 여러 갈래의 가지로 평생에 걸쳐 뻗어 나간 ‘생장의 일기’이다.
다니엘 페나크 (Daniel Pennac) / 조현실 역 / 몸의 일기 (Journal d'un corps) / 문학과지성사 / 488쪽 / 2015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