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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Oct 11. 2024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는 삶, 산문의 진솔한 거리감...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씨가 <한국인>이던가, <리더스 다이제스트>류의 작은 잡지에 썼던 소설을 무척 어린 시절 읽은 기억이 난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여 꽤 원초적인 인간 묘사가 드문드문 떠오르기는 하는데 더 이상은 떠올리기 어렵다. 여하튼 나는 대를 이은 한씨 집안의 글을 읽고 있는 셈. 꽤 무게감 있는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한강 또한 젊은 작가들과는 적절한 선을 그은 듯, 중량감 있는 글을 쓴다. 그런 이유로 후배 한 녀석은 이 한강이라는 작가에게 푸욱 빠져 있었는데 지금도 여전한지는 녀석을 만난지 오래라 정확히 알 길이 없다.


  그건 그렇고 제목 이외에도 책에는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1998년 여름 한강이 미국에 있는 이오와 대학 주최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겪은 사람들, 그리고 발생한 일들을 소재로 하여 포착된 순간들을 크로크치럼 짧게 정리한 산문집이다. 그러니까 과거 최승자가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라는 책에서 다룬 바로 그 프로그램에 참가한 작가 한강의 생각 모음집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만날 일이 없는 젊은 작가가 프로그램의 일환이나마 전세계의 작가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며 느낀 것들, 그리고 그들의 문학 세계, 삶의 방식, 문화의 양식들이 날 것의 느낌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 즐거운 읽기 작업이 된다.


  특히 작가 자신과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른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꽤 흥미롭기까지 하다. 마치 담배 연기 가득한 카페에 들렀다가 멋스럽기 그지없는 옆자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듯도 하고, 판자 하나로 겨우 칸막이 한 여인숙 건넌방 연인들의 대화를 엿듣는 듯도 하다. 예를 들어 한강이 아르헨티나 시인 파비앙과 하는 이런 대화.


“아내는 2년 전부터 프랑스에 있어. 파리에 있는 대학에서 불문학 교수로.”

“프랑스라구? 지구 반대쪽 아냐. 그럼 1년에 몇 번 만날 수 있는 거지?”

“한 번은 아내가 아르헨티나로 오고 한 번은 내가 프랑스로 가니까, 1년에 두 번은 만날 수 있지. 그렇잖아도 이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에 파리로 가서 보름쯤 시간을 보낸 뒤 귀국할 생각이야.”

“떨어져 있는 게 고통스럽지 않아?”

“우리는 같은 도시에 있을 때부터 다른 집에 살았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각자 살고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함께 지냈지. 물론 그전에는 보통의 부부들처럼 늘 함께 있는 생활을 4년간 했어. 하지만 견디기 어려웠어.”


   언젠가 친한 친구 한 명이 일년여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제자리를 찾기가 어렵다면서 남편과 일년은 부부로, 다음 일년은 그냥 친구로, 또 다음 일년은 부부로, 이렇게 살 수 없을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퍼뜩 떠올랐다. 어쩐지 새로운 결혼 패러다임의 일환으로 한 번쯤 도입해봄직한(물론 아이들이 있는 경우라면 그 형식이 좀더 복잡해지겠지만) 형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팔레스타인 소설가 마흐무드와 나눈 이런 대화.


“사랑 없이는 고통뿐이라구.”

“하지만 때로는... 사랑 그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나요?”

“아니지. 그렇지 않아...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롭지.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 사랑 그 자체는 그렇지 않아.”


  이스라엘군에 의해 네 살 때 고향을 잃고, 청년 시절에는 4년간의 옥살이를 해야 했고, 10년간 망명생활을 한 소설가가(떠돌아 다니느라 그랬는지 이 작가의 소설은 단편소설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매우 짧은 것들이라고 한다) 이처럼 관대하고도 깔끔한 사랑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게도 된다.


  산문과 소설은 연극과 영화처럼 닮아 있으면서도 매우 다른 장르이리라. 영화에 비해 연극이 지근거리에서 진솔한 거리감으로 대상이 되는 작품이나 배우들을 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문은 소설에 비해 작가의 생각에 대한 겸허한 참견의 여지가 많은(작가의 ‘삶’에 대한 겸허한 참견이 산문으로 만들어지듯) 그런 것, 아닐까...



한강 /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열림원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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