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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1. 2024

손보미 《우연의 신》

화이트 라벨 위스키의 회수라는 미션을 에두르는 우연들...

  2017년에 작가는 《디어 랄프 로렌》이라는 장편 소설을 발표했다. 패션 브랜드인 랄프 로렌의 다양한 아이템 라인에 어째서 시계가 없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랄프 로렌, 이라는 브랜드로 꽤 비산 시계가 검색되어 당황했다) 《우연의 신》은 그로부터 2년 뒤인 2019년에 발표된 작가의 장편 소설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니 워커라는 술 브랜드가 전면에 등장한다. 우연일까... 


  “... 그나마 있던 재산을 탕진한 건 큰아들인 찰리 워커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화이트 라벨을 너무나 증오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세계 곳곳에 탐정을 보내서 화이트 라벨을 수거하는 데 써버립니다. 그는 화이트 라벨이 열 병 모일 때마다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해가 지는 시간에 화장실로 가지고 가서 술을 다 쏟아버렸습니다... 그걸 지켜본 딸이 리즈 도로시 워커였습니다. 바로 저를 이곳에 보낸 분이시죠...” (pp.34~35) 


  우연은 아니겠지, 어쩌면 현대 소비 사회를 가로지르는 인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유명한 상품 브랜드만 한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소설은 물론 영화로도 만들어져 크게 히트하였고, 백영옥은 소설 《스타일》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도 스타벅스의 카페라떼처럼 테이크 아웃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시대’라고 지금의 소비 사회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 그녀와 친한 사람들은 그녀를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그녀는 자신이 긍정적이라기보다는 운명론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었지만 다른 식으로는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열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을 두고 이혼했을 때, 그녀는 그 사실에 절망했고 두려워했지만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외국으로 사라져버렸다(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저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말을 한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양육비를 빼먹은 적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열여섯 살 때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외삼촌이 그녀를 아버지가 있는 프랑스 마론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시절 파리에서 함께 살던 애인이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도, 그녀는 두렵고 싫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걸 받아들였다...” (pp.54~55)


  여하튼 소설은 조니 워커의 마지막 남은 화이트 라벨 위스키를 가운데 두고 진행된다. 화이트 라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블루 라벨이나 블랙 라벨 등의 등장 이전에 조니 워커에서 내놓은 위스키의 라벨인데, 현재는 조니 워커 사의 연혁 안에서 지금은 사라진 상태이다. 소설은 민간 조사원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는 그에게 마지막 남은 화이트 라벨 위스키의 회수라는 미션을 던진다. 


  “... 그는 그걸 모두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진 않았고 그의 귀로 기차의 규칙적인 진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번 인식하자, 그는 그 소음 속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졌다. 마치 모두가 잠든 밤, 시계의 초침 소리를 한번 듣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p.140)


  마지막 남은 화이트 라벨의 소유주는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인 알리샤이다. 하지만 알리샤는 얼마전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알리샤는 화이트 라벨 위스키를 학교 때의 동창인 그녀에게 유품으로 남긴다. 맨해튼에서 살고 있는 그녀는 연락을 받고 프랑스로 위스키를 받기 위하여 떠나고, 위스키를 찾아 한국에서 파리로 온 그는 그녀를 멀찍이서 뒤쫓는다. 과연 그는 위스키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들이 돌아가야 하는 곳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이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점점 짧아지는 걸 보면서 그는 ‘기술적으로’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을 떠올려보았다. 리옹 신시가지의 부티크 호텔 객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술병을...” (p.162)


  소설은 흡족하지 않다.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의 회수와 관련된 조니 워커 사의 연혁은 헷갈리는 만큼 흥미롭지 못하다. 한국과 미국과 프랑스라는 공간은 충분히 이국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민간 조사원인 그와 알리샤의 동창인 그녀의 캐릭터 또한 어둡게 침잠해 있을 뿐 구미를 당기는 것은 아니다. 우연이라는 말로 얼버무려진 태만, 이라고 하면 몹쓸 독자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손보미 / 우연의 신 / 현대문학 / 178쪽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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