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시시각각 18화

수습되지 않는 소외 안에서 나는 어지간히 철부지...

박시하 《무언가 주고받은 느낌입니다》

by 우주에부는바람

밤이 깊어지기 전에 나는 대피해야 한다. 가능의 영역에서 불가능의 영역으로 혹은 불가해의 영역으로 떠나야 한다.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저기요, 라고 말하고 시작하는 소심한 복수나 어이, 라고 말하며 시작되는 느닷없는 응징이다. 이제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 제정신의 맛,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문밖, 서둘러 들어가 버리면 다시 돌아 나올 수 없는 수습되지 않는 소외 안에서 나는 어지간히 철부지이다.


가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서늘한 첫 바람

옆에서 걷는 사람의 온도

달이 둥글어진다는 사실

구름이 그 달을 가끔 안아준다는 것

별들의 생명도 꺼진다

그래서 알게 되었지

결국 쇠락하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라나는 손톱을 깎아내며

시간에게 기도를 한다


사라진 목소리가

나뭇잎이 색을 바꾸는 것처럼

더 아름다워진다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던

너의 얼굴이

더 아름다워진다


어둠도 빛이다

변하지 않는 합창


달의 멜로디를 듣는다

한 번도 같은 적 없던

너의 눈빛


앞에서 계절이 걸어간다


불이 켜져야 드디어 시작될 수 있는 점멸, 습관이 되어버린 점멸, 너를 향하여 깜박거린다. 뒤죽박죽인 윤곽 혹은 경계,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너머는 자꾸 형해화 되어 버리는 미래로 가득하다. 잠이 들지 못하면 드디어 차오르기 시작하는 불안, 뒤척일수록 거대해지는 거짓의 꿈, 통과하려고 하면 할수록 갈라지는 길, 정답을 알 수 없어 자꾸만 뒷걸음질 치는 잠꼬대를 제외하면 어둠뿐이다.


“등에 번진 검푸른 무늬는 / 너의 발자국이겠지 / 별이 으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 그것이 사랑이었을지 / 어떤 형벌이었을지는 알지 못했다 / 노래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 롤로는 스스로에게 입을 맞추었다 // 사라지는 입술로” - <사라지는 입술> 중


희생자는 문을 열어야 한다. 어떤 문? 열거다 닫거나 취하거나, 그러니까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면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둘 중의 하나에서 길을 틀어버리는 셋 중의 하나를 골라야 한다. 땀이 흐른다. 창조하거나 재창조하거나 사라지거나, 순서를 지키거나 거스르거나 떠나야한다. 이유와 사유와 짓밟아왔던 그림자들이 차곡차곡, 쌓일 만큼 쌓여버린 우울감으로 한바탕 겨울이다.


“병든 눈이 내린다 / 병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 편지를 쓰면 / 검은 꽃이 핀다 // 다리는 시간을 젓고 / 팔은 그림자를 짓는다 / 들판에 핏방울 하나 흘리지 못하고” - <2월> 중


불복의 섬에서는 부끄러움이 고개를 숙이거나 꼿꼿하게 든다. 바람의 만료 이전까지는 그렇다. 새벽 그러니까 불꽃이 시작되기 전에 산책한다. 빛과 연대하기 이전, 어둠이 와해되기 이전에 산책은 시작된다. 드디어 시작되는 파란만장의 작별, 내게는 그저 하루하루가 무기였다, 우리가 살아가도록 만드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이틀이틀이었다면, 추진력 제로를 업데이트하고 나서, 나는 그저 계속 머물고 싶다.


“맨몸으로 서 있다 / 벌거벗으니 좋아 / 슬픔의 알갱이를 밟으니 좋아 / 젖은 무릎을 꿇고 / 하늘을 바라본다 // 세상이 무수하게 떨어진다 / 방울방울 / 눈빛이 있다” - <여름의 게임> 중


다름을 미끼로 사용한다. 허락되지 않는 의문으로 민감해진다. 모포를 사용하여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야 한다. 옆구리를 찔러대는 계시, 누군가를 대신하여 들여다보는 지나가버린 시절, 게임장의 문이 열리면 그때 파릇파릇을 준비한다. 파격의 호기심에 걸려든 벌레는 몇 번째 줄에? 끓이거나 끊거나 줄을 잡아야 한다. 서서히 흔들리거나 흐느적거리는 대신 엉겁결에 숨어버리고 싶다, 신에게로 신으로부터.



박시하 / 무언가 주고받은 느낌입니다 / 문학동네 / 156쪽 / 20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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