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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7. 2024

김규림 《아무튼, 문구》

오래 전 자와 샤프 펜슬을 받아 기쁘고 어렸던 나는...

  아무튼 시리즈의 이번 아이템은 ‘문구’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문구인’이라는 낱말을 발견하고 기뻐할만큼 각종 ‘문구’에 깊이 천착하는 이가 책의 저자이다. 위의 문장은 작가가 생각하는 ‘완벽한 하루’의 묘사 부분인데, 각종 ‘문구’를 사랑하는 ‘문구인’이 희망하는 하루의 실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저자는 포근한 침대로 들어가기 전 책상에 앉아 노트와 필기구를 사용하는 시간에 더욱 주목한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려 마시고,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책을 읽는다. 햇살을 받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점심 무렵에는 서점과 문구점을 어슬렁거린다. 한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좋아하는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림을 그린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간단하게 장을 봐와서 요리를 한다. 친구와 맛있는 곳을 찾아가 함께 먹는 저녁도 좋겠다. 집에 돌아와 전날 보던 넷플릭스 드라마를 두어 편 이어서 본다. 목욕을 하고 잠옷으로 갈아 입고 포근한 침대로 들어간다.” (p.17)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당시 함께 살던 사촌 누이와 결혼을 약속한 예비 매형이 집에 들렀다. 매형에게서 50cm 플라스틱 자를 선물로 받았다. 캠브리지라는 브랜드에서 사은품으로 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전까지 30cm 플라스틱 자만 가지고 있었다. 50cm 플라스틱 자는 30cm 자에 비해 두꺼웠고 높이도 높았다. 나는 매형으로부터 샤프 펜슬도 받았는데, 플라스틱 자를 받던 그날이었는지 그 다음 방문 때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연필이 아닌 샤프 펜슬은 처음이었다.


  “가만 보면 내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것 같다. 클래식하고 심플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아기자기한 총천연색의 귀여운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 귀엽고 가벼운 것들이 즉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명랑한 친구들이라면, 클래식한 오브제들은 말 수는 별로 없지만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속 깊은 친구 같다. 이 친구들을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일에 나는 시간을 과감하게 쓰고 있다. 집에서 대체 뭘 그렇게 하느냐는 말에 나는 퍽 억울하다. 책상 위에도 나름대로의 분주한 시간들이 있단 말이다.” (p.42)


  매형으로부터 자와 샤프 펜슬을 선물 받는 장면은 책을 읽으며 가정 먼저 떠올린 장면이다.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자와 샤프 펜슬이, 그러니까 그것을 받았을 때의 기쁜 마음이 선명할 만큼 당시 문구라는 것은 다양성에서 희소했다. 샤프 펜슬이 등장하고도 한동안 샤프 펜슬은 연필과 병용되었다. 이제 곧 각도기와 컴퍼스 등의 또 다른 문구를 가지게 될 터였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문구를 꼽아보라고 할 때면 언제나 난감하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미도리 노트를 고르겠다...” (p.53)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펜촉에 잉크를 묻혀가며 알파벳을 적기 시작했다. 잉크를 빨아들이는 스포일러가 들어 있는 저렴한 가격의 만년필은 그 다음에 사용할 수 있었다. 영단어를 익히기 위해 A4용지 가득히 같은 단어를 적는 데에는 볼펜이 사용되었는데, 우리 모두의 볼펜은 모나미 딱 한 종류였다. 검색을 하면 등장하는, ‘모나미 153 0.7mm’ 라는 명칭의 볼펜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 볼펜을 두 개 묶어서 (좀더 노련한 이는 세 개를 묶어서) 되도록 효율적으로 종이를 채우고자 했다.


  “아이패드와 관련된 재미있는 제품들도 몇 있다. 첫째는 종이 질감의 전면 필름, 표면이 까끌까끌해서 애플펜슬로 쓸 때 연필로 종이에 쓰는 것과 흡사한 느낌이 난다. 둘째는 연필 모양 애플펜슬용 스티커, 한 바퀴 돌려 붙이면 연필처럼 보인다. 셋째는 컴포지션 노트 모양의 아이패드 커버. 이 커버를 씌우면 아이패드가 감쪽같이 공책으로 보인다. 이 세 제품의 공통점은 기계인 아이패드를 아날로그처럼 느껴지거나 보여지도록 만드는 제품이라는 사실인데, 이런 상품들이 인기를 끈다는 건 아무래도 디지털이 완전히 아날로그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p.116)


  이제 나는 갤럭시 노트라는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노트라는 명칭에 걸맞게 펜이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천지인을 사용해 문장을 입력한다. 몽블랑 볼펜이 있고 이름이 각인된 파버카스텔 연필이 있고 몰스킨 노트가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아날로그 노트와 펜을 사용하기에 내 글씨는 아름답지 않다. 보기에 좋은 글씨체를 가진 두 명의 선배가 떠오르는데, 그들이 지금 노트와 펜을 사용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김규림 / 아무튼, 문구 / 위고 / 154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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