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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차가운 피부》

뫼비우스의 띠, 그 위에서 영원히 순환하는 가해자와 피해자...

  소설은 등대와 등대지기가 있을 뿐인 남극 근처의 섬에 기상관인 내가 발을 딛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아일랜드에서 고아로 자라났고 공화국군에 투신하여 영국군과의 싸움에 임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철수 이후 아일랜드의 지도자들이 보인 모습은 나를 모순에 부딪치도록 만들었다. 나는 ‘폭력의 악순환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그렇게 외로워 보이는 이 섬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과 결코 멀리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진정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배에 오르는 순간 나는 이 냉엄한 진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관심을 둘만한 진리도 있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나은 것도 있다.” (p.5)


  하지만 섬의 유일한 주민인 등대지기 바티스 카포는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와 스코틀랜드 선장이 등대를 찾아갔을 때 바티스 카포는 한동안 이름조차 대답하지 않았다. 전임 기상관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다고 대답할 뿐이다. 그리고 나를 섬에 남겨놓고 스코틀랜드 선장이 떠난 바로 그날 밤 내가 머물던 사택은 괴물의 습격으로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바티스를 여러 가지로 비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참기 힘든 것은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말투였다. 그는 그 불행한 포르투갈 선원들의 운명을 소름끼치도록 냉정하게 들려주었다. 생각을 덧붙이지 않은 채,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p.84)


  그리고 이제 소설은 한동안 등대지기와 내가 한편이 되어 밤마다 계속되는 양서류를 닮은 괴물들의 습격에 대응하는 것으로 채워지고 있다. 소설은 인간 대 괴물의 싸움으로 비춰지지만 진행되면서 묘하게 뒤틀린다. 다이너마이트의 어마어마한 살상력으로 엄청난 숫자의 인간 아닌 것들을 죽인다거나 바티스 카포가 소유물로 삼았던 암컷과의 사통, 인간 아닌 그 것들 중 어린 것들의 평화로운 모습들이 등장하면서 괴물은 그저 인간 아닌 무엇으로 비춰지기 시작한다.


  “... 무질서는 없다.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무질서는 다만 새로운 질서와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존재할 따름이다. 우주는 무질서에 민감하지 않으나 우리는 민감하다.” (p.97)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 나오는 이런 문장,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동물이기를 바랐지만,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신들은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양편이 모두 마찬가지로 무지하였으나, 그래도 원주민들 생각이 보다 인간적인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이 떠오르면서 이제 피해자인 양 하였던 인간이 오히려 보다 분명한 가해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철학과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서로 투쟁한다. 하지만 전쟁과 육욕은 순전히 몸의 문제다. 나는 합의하에 강간을 하듯 마스코트와 사통을 했다. 내 사지는 그의 몸을, 그 차가운 피부를 온전히 품을 수 없었다. 나는 쓸모없는 짐승을 짓밟아 죽이듯 마스코트를 거칠게 다뤘다. 그리고 교접이 끝날 때마다 마스코트에 대해, 악의 전령과도 같은 그에 대해 증오를 느꼈다...” (p.146)


  장르 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차가운 피부》는 다양한 문제 의식으로 접근이 가능한 소설이다. 소설 속 인간과 괴물의 싸움은 오히려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고찰이 되어 버린다. 동시에 (실재하는 혹은 문화적인) 식민 지배 아래에서 벌어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투쟁을 은유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소설 초반 폭력의 악순환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나는 결국 또다른 폭력의 악순환의 주체가 되어버린다.


  “생각을 좀 해봐요, 바티스. 저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백번 잘못한 겁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고요. 우리가 침입자잖아요. 여긴 저들의 유일한 땅이고요. 우리는 요새와 무기를 가지고 이 땅을 점령한 겁니다. 그 정도면 저들이 우리를 공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나요? ... 난 자신들의 섬에서 침입자들을 몰아내려고 싸우는 저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어요!” (p.179)


  그런가하면 《차가운 피부》는 소설의 구조라는 측면에서도 흥미롭기 그지 없다. 주인공 ‘나’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이름이 없다. 등장하는 괴물류 전체가 시타우카로, 사육되는 암컷 괴물이 아네리스로 이름을 얻는 동안에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내가 등대지기 ‘바티스 카포’로 오해받는 순간 소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열린 원형이 되고, ‘나’는 ‘바티스 카포’가 되어 멈추지 않는 순환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게 된다.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Albert Sánchez Piñol / 유혜경 역 / 차가운 피부 (La pell freda) / 들녘 / 247쪽 / 2007, 201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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