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 포 선셋' 리뷰
“6개월 후에 비엔나 역 9번 승강장 앞에서 저녁 6시에 만나!”
제시와 셀린느는 이 약속을 믿고 작별의 키스를 했다. 다시 만날 것을 확신했기에 그들은 전화번호도 주소도 나누어 갖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6개월은 온통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지는 시간이라는 것을……. 밥을 먹는 것도, 책을 보는 것도,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것도 그 한 사람 때문에 의미가 있다.
영화 ‘비포 선셋’은 사랑에 빠져 헤매는 두 사람의 감정은 과감히 생략한 채 노트르담 사원과 파리의 거리를 보여주면서 시작이 된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제시와 셀린느의 약속이 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경이 비엔나가 아니라 파리이기 때문이다.
비록 14시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았고 사랑으로 불 타 올랐다. 그런데 제시와 셀린느는 왜 만나지 못했을까?
속된 말로 운명의 장난 때문이다.
12월 16일 비엔나역 저녁 6시 9번 승강장에 제시는 도착했지만 셀린느는 보이지 않았다.
9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두 사람의 사랑을 소설로 쓴 제시는 유명 작가가 되어 한 서점이 주최한 ‘작가와 독자와의 만남’에 초대되어 파리에 오게 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던 제시는 셀린느의 모습을 발견한다. 독자들에게 말을 하면서도 힐끔힐끔 셀린느를 쳐다보는 제시의 모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안녕’ 이란 담백한 말로 인사를 나눈다. 그들은 이제 격정적인 키스를 할 수도 없고 “보고 싶다”는 원초적인 감정도 고백할 수 없다. 세월은 이렇게 두 사람의 사랑을 바꾸어 놓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맞을까?
이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시렸다. 두 사람의 사랑도 레테의 강을 건너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독자와의 만남을 끝 낸 제시는 셀린느와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시간밖에 없다.
저녁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길을 걸으며 셀린느는 “6개월 전 약속 장소에 나갔어?”라고 묻는다! 제시는 “안 나갔다”라고 거짓말을 하다가 할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약속장소에 나갈 수 없었다는 셀린느의 말을 듣고 자신은 “갔다!”라고 한다. 싫어서 안 나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이라는 것을 안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랐던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전편에서 생략된 두 사람의 사랑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궁금한 관객들에게 속편은 확실히 그 답을 말해준다.
사랑은 마음으로 시작해 육체로 완성되는 모양이다.
제시는 그날 밤 공원에서 일어난 셀린느와의 사랑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셀린느에게는 가물가물한 기억일 뿐이다.
“그날 밤 함께 잔 기억이 없어. 난 콘돔 없이 안 하거든”
“난 그날 밤 어떤 상표의 콘돔을 썼는지도 기억하고 있어”
“지금 날 바보로 만들고 있어!, 생각해 보니까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남자에게는 첫 경험이 소중했고 여자에게는 확실치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셀린느는 “내가 기억력이 없고, 할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잊어버렸다.”라고 변명했지만 실상은 제시와의 사랑 때문에 아팠던 상처를 보이기 싫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대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어느덧 우리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는 진행이 된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9년 전에는 삶과 죽음, 철학, 가족, 음악과 같은 형이상적이고 삶의 근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솔직한 성에 대한 이야기, 얼마나 너를 그리며 살았는지, 그 그리움 때문에 내 삶이 얼마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는지가 대화의 주된 내용이다. 20대가 꿈꾸는 삶이라면 30대는 현실 속에서 점점 더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갈등할 때다. 이 영화가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별한 여인들의 아픔과 상처가 왠지 내 사랑처럼 다가오는 동병상련의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제시와 셀린느는 서로가 나 없이도 잘 살기를 바랐지만 속으로 나 없이 살아온 가슴은 아직도 비어있고 그 가슴을 채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서로가 그 빈 가슴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바람대로 9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셀린느는 9년 동안 남자들을 만났지만 그들이 자신을 떠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날 밤 내 모든 걸 쏟아부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밤을 보냈는데, 다른 로맨스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아직도 그날 밤을 잊지 못하고 9년을 살아온 셀린느의 고백이다. “너 없이도 잘 살았다!” 고 말하고 싶은 셀린느의 표정 속에서 짙은 사랑의 아픔이 배어 나온다.
“내 인생은 27살 때부터 무너졌어. 머릿속에는 오직 네 생각뿐이었어, 내가 소설을 쓴 이유도 너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어”
제시의 감정표현이다.
그들의 사랑은 세월을 넘어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뛰어넘기 힘든 현실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로맨스 영화는 아픔이 있다.
셀린느의 집으로 가는 자가용 안에서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확인하지만 애정표현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 제시는 결혼을 했고 4살 된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편에서 보여주었던 격정적인 키스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상대방을 위로하기 위하여 어깨 위로 손을 얹는 행위도 망설여야 하고 손을 잡을 수도 없다. 이런 안타까운 장면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아픈 사랑이 가슴으로 스며든다.
특히 셀린느의 집 앞에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가벼운 포옹을 한다.
“네가 손을 대기만 해도 내가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지 보고 싶었어!”
마치 ‘솔베지의 노래’처럼 그리움이 얼마나 깊었으면 셀린느는 자신이 녹아내리기를 바랐을까?
‘선라이즈’에서의 이별은 다시 만날 수 있는 기대감이 있지만 ‘선셋’에서는 다시 만나서는 안 되기에 더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별이다. 제시와 셀린느는 사랑하지만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마셔야 하는 독배와 같은 것이다.
“꿈을 꾸면 그 꿈속에 늘 네가 내 옆에 있어. 그래서 울다 일어나면 내 옆에는 네가 사라지고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는 제시의 고백에,
“네가 그날 밤 나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버린 것 같아. 그날, 내 모든 것을 태워 버려서 내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 셀린느의 대답이다.
비록 14시간의 짧은 사랑이었지만 9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도 그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비록 아내가 있고, 또 다른 남자가 있었기에 이들의 사랑을 매도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법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
헤어지지 못한 두 사람은 결국 셀린느의 집까지 오게 되고 제시는 셀린느에게 노래 한곡을 불러 달라고 한다. 셀린느의 노래를 들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제시.
셀린느가 “비행기 놓칠지도 몰라”라고 말하자,
제시는 “I know…….”라고 한다.
이번에도 궁금증만 남기고 영화는 끝이 난다.
제시는 비행기를 탔을까? 안 탔을까?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고 평생을 그리움으로 살아야 한다 할지라도 가슴속에 묻어둔 한 사람이 있다면 사랑은 영원한 것이 아닐까?
‘다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여전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당연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또 너를
하나
다시 누군가와 이별해야 한다면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두 번 죽어도 너와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원태연의 시 '다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을 떠 올렸다.
배경음악은
비포선셋 ost중 'Waltz for a night' 입니다.
https://youtu.be/6jfoYwxnW9M?si=6upQcNHvj4oGPb1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