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에세이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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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준은 불특정 사건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기준은 당위를 선언할 뿐이어서 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예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준은 개별 사건에 대한 구체적 타당성과 긴장관계다.
판결이 선고되면, 사람들은 양형기준에 안 맞네, 맞네 하면서 분개하고, 옹호한다. 그러다 법률이 약하네, 양형기준이 약하네, 판사가 불공정하네, 미국과 유럽의 입법례까지 들먹인다.
내 생각엔, 다 허망한 일이다.
분개하건, 옹호하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같은 게 있다. 사건은 지나간 과거의 일이니 변치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법령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 법령에 대한 정당한 판단은 하나다. 사실과 법령을 적용하면 위반여부는 확실히 가려지지만, 판사의 형량에 대한 재량권은 통제할 수 없으니 양형기준으로 통제한다. 이렇게 세 조건이 작동되면 피고인의 태도, 피해자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의 역량과 의지와 상관없이 동일한 판단이 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내 생각엔, 이 모든 전제가 잘못되었다.
지나간 사실은 한 가지 사실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의 사실은 한 가지 사실이겠으나, 각자 기억하는 사실이 다르고, 증거로 입증되는 사실이 다르며, 법령에 요구하는 사실이 다르다. 실제로 판결문에 쓸 수 있는 사실은 더욱 다르다.
법령은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법령은 법조문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법령에 대한 해석의 가지수는 무한대에 가깝다. 단어에 대한 해석, 문장에 대한 해석, 다른 법령과 비교를 통한 해석, 입법과정의 취지를 통한 해석, 판례를 통해 본 해석, 불확정 개념에 대한 접근 등 법령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분야는 너무도 많다. 그에 대한 판례가 있지 않겠느냐고 생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지하는 판례가 수십 개 있는 만큼, 반대하는 판례도 수십 개 찾을 수 있다. 원하는 결론에 따라 판례를 찾아 붙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양형기준이라는 게 말 그대로 기준에 불과하다. 양형기준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기존의 판례를 다수 종합해서 만들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판사는 무엇을 먼저 찾아보겠는가. 양형기준보다는 기존의 판례를 찾아보게 될 것이다. 판례를 찾아 기존에 어느정도의 형량을 선고하였는지 확인해 볼 것이다. 오랜 경험이 쌓인 판사라면 직관적으로 양형감각이 느껴질 것이다. 사례를 근거로 한 양형기준인데, 사례를 기준으로 형을 선고한 후 양형기준에 맞춰보면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다. 사건의 개별성은 말 그대로 개개 사건이 모두 다르다. 사례를 찾아보아도 자신이 찾아보고자 하는 양형인자에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고, 양형기준을 살펴보아도 불확정 개념이나, 해석이 여지가 있는 양형인자가 다수이다 보니 유리한 양형인자와 불리한 양형인자의 갯수를 어떻게 도출해 낼 것인지는 담당 판사의 전권에 가깝다. 모든 재판부는 사건의 개별성을 고려하여 양형기준에 맞게 쓸 것이다.
법령이나 기준으로 정의가 구현되던가.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이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