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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Jul 09. 2023

판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기는 민사재판의 비밀, 노인수)(1/3)

https://blog.naver.com/pyowa/223151351250


노인수 변호사의 책을 시리즈로 읽고 있다. 이번엔 민사재판이다. 이 책도 아주 쉽게,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력으로 쓰여져 있다.



30년쯤 전에 아버지와 함께 민사재판을 해 본적이 있다. 95년 제대하고 집에오자마자 조금 앉아보라고 하셨다. 이런저런 문서를 꺼내 놓으시며 말씀하셨다.



"우리 논 명의를 친척에게 빌려주었는데, 돌려주지 않는다. 조금 알아보니 등기가 넘어간 상태로 10년이 지나면 취득시효가 되서 찾아올 수도 없다고 하더라. 니가 법대생이니까 찾아와라."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너무 막막했다. 2년간 학점은 2.0을 간신히 넘기는 그야말로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고, 소송법은 전혀 배워보지도 못했던 때였다. 울고 있을 수는 없으니 물권법과 민사소송법을 공부하고, 선배를 통해 관할법원 앞에 있는 사무장을 소개받았다. 실비만 받고 소장을 써주기로 했다. 내용증명을 보내고, 기초사실을 정리해서 버스타고 읍내에 가서 사무장에게 전해주었다. '명의신탁',  '등기부 취득시효', '자주점유', '과세증명서', '이웃들의 사실확인서' 등을 공부하고 챙겼다.



드디어 기일이 잡혔다. 아버지와 나는 리허설까지 하면서 판사님이 이렇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 연습을 열심히 했다. 우리는 작은 할아버지와 세 명이서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을 달려 법정에 도착했다. 원고 아버지 이름을 불렀고 아버지가 나갔다. 피고를 불렀는데 나오지 않았다. 판사님은 아버지를 보더니 들어가라고 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들어가라고 했다. 아버지가 주춤거리자 2주 있다 선고할텐데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질문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방청석으로 돌아온 작은 할아버지, 아버지와 나는 당황했다. 이건 리허설에 전혀 없었던 내용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피고가 출석하지 않았으니 모두 인정할 걸로 본다는 '의제자백'으로 처리되었던 것이다. 승소했다. 법대생이어도 아무것도 몰랐던 때였다. 



판결이 확정된 후의 절차도 법대생인 나에게는 만만치 않았다. 명의신탁 해지를 원인으로 한 '이행의 소'였는데, '형성의 소'규정이 적용되어 등기이전에 소유권이 이전된다고 잘못 생각했었다. '농지매매증명'이 없어 쩔쩔매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법원 직원들이 너무 고압적이고 불친절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변호사들도 광고에 열을 올리고, 핸드폰 번호를 공개하며 영업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법원공무원들도 친절하고, 법령, 판례, 서식이나 매뉴얼도 공개되어 있다. 무료 법률지원 시스템도 구축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법정 용어와 절차가 어렵고, 접근하기엔 쭈뼛쭈뼛 해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30년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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