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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낙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청학동, 자전거여행)(9)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263225685


죽어 낙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일상이 낙원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일상의 순간 중 몇 개는 낙원의 순간일 수 있겠다. 낙원의 순간을 알아채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알아채지 못하곤 '삶은 지옥임내, 팍팍하네'라고 말하면 무엇이 달라지던가. 차분히 산책하고, 달려보고, 차를 마시고, 스마트폰 없이 걸어다니면 낙원의 순간을 알아채게 된다. 때때로 낙원의 순간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낙원은 삶 속에 느끼고 찾아야 한다. 죽어 낙원이란 건 낙원이 없다는 얘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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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차는 완전히 다른 음료다. 커피를 마시면 맛이 혀를 강타한다. 차는 그렇지 않다. 차는 맛을 느껴야 한다. 입에 들어왔을 때, 머금었을 때, 목을 넘길 때의 맛을 느낀다. 미세한 감각이 움직여야 구분해낼 수 있다. 그러니 떠들어서도 안 될 일이고, 돌아다니며 음미할 수도 없다. 차분히 앉아 혀끝, 입천장, 목젖의 느낌에 집중하게 된다. 자연스레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차를 마시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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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죽고, 모두 죽는다. 무덤은 죽음이 평등하다는 걸 말해준다. 무덤이 크고 작을 순 있겠지만 죽음의 의미는 같다. 모든 걸 0으로 만든다. 시간이 쌓이면 우리의 죽음도 퇴적되어 쌓여간다.


gallery_07_01.jpg 고창 고인돌



'머뭇거림' 이란 단어가 멋져 보인다. 살면서 머뭇거린 순간이 많았다. 미래를 알 수 없었고,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잘 하고 있는 건가. 지금 결정하는 게 맞는 것인가. 나중에 후회하진 않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누군가 머뭇거린 나를 보면서 한심하게 생각했을지라도, 돌아보면 머뭇거린 그 순간이 결정하고 판단하는 살아있는 순간이었다.




068FFC44EDB34BA2AB78E1511848531B.jpg 감은사지 3층 석탑



가야금이란 이름을 들으면 슬프다.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적국에 투항했다. 가야는 망했으니 우륵의 결단은 결과론적으로 옳았다.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는 가야사람들을 모두 흩어놓았던 모양이다. 남쪽에 살던 우륵은 충북 충주로 보내졌다. 충주의 관료들은 우륵을 감시했을 것이다. 우륵은 친적도, 친구도 없는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뜯다 죽었다. 우륵은 어떤 생각을 하며 말년을 보냈을까.


2044534_525025_3625.jpg 충북 충주시 탄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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