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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어둠은 부드럽고, 먼 어둠은 진해서 칠흙이다.

(광릉 숲, 자전거여행)(17)

by 고길동

https://blog.naver.com/pyowa/223350325315



지식으로 이해되는 세상과 직관으로 느끼는 세상이 다를 때가 많다. 직관도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어질수록 과학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가까운 어둠은 흐려서 부드럽고, 먼 어둠은 진해서 칠흙이다.'



이 문장은 '자전거 여행'에서 내가 손꼽는 문장이다. 관찰의 힘이란, 그걸 글로 끌어내는 힘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어둠은 신비한 존재다.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실체가 있는 듯 없는 듯한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인지, 어둠이 기본값이고 그 사이를 빛이 번져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빛과 어둠은 서로 연동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이다. 빛을 맞으면 멀리서 던져지는 조그만 바늘의 느낌인데, 어둠 속을 걸으면 흐물거리며 습한 무언가를 헤쳐 나가는 느낌이다. 빛이 과학적이라면, 어둠은 인문적이다.



시선도 인문적이다. 시선은 받아들이는 걸까 나아가는 걸까. 과학은 가시광선을 받아들이는 거라 설명하고, 직관은 눈동자에서 대상으로 뻗어가는 거라 말하고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과학이 뭐라 설명하건 시선은 눈동자에서 뻗는 것이다.



어릴 적 동산에 앉아 내 시선을 자주 관찰했다. 보통 때는 대상을 볼 뿐 내 시선이 보이지 않았다. 가끔 정신이 맑고 날이 좋으면 내 시선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내 시선이 파동을 치며 원뿔 모양으로 시선의 끝으로 나아갔다. 대상을 옮기면 시선의 파동은 새로운 곳을 향해 원뿔 모양으로 파동쳤다. 친구들에게 얘기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시선의 파동이 보이면 언제 다시 볼 줄 모르니 너무 반가웠다. 이름도 붙여줬었는데 잊어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시선의 파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된 어느 날부터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photo-1543518360-68b9612a7c8c.jpg © lalasse, 출처 Unsplash


https://blog.naver.com/pyowa/22334799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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