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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은 설명하지도, 묘사하지도 않는다. 독자를 소설 속에 데려다 놓고는 떠나버린다. 소설 속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삶에 어쩌지 못하는 인물들이 보인다. 삶은 시간이 지난다고 고귀해지지도 않고, 깊어지지도 않는다. 삶은 은근슬쩍 흘러가 죽음에 도달한다.
다섯 달 내내 거리를 헤매며 일자리를 구하다가 드디어 오늘, 구걸하러 거리로 나설 결심을 하신 것이다.
(굴, 안톤체홉)
단편의 한 문장을 읽다 아침에 보았던 노숙자 할머니가 생각났다. 매일 아침 보였던 노숙자 할머니가 사라졌었는데, 지하상가 구석에 앉아 있었다. 거울에 비춰져 보였는데 반대편으로 옮겨 지내시는 모양이었다. 다섯 달 내내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을 때, 노임을 낮추고 낮추어도 자리가 찾아지지 않을 때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렇더라도 '구걸', '노숙자'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원망스러운 삶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삶이다. 구걸이란 결심이 필요한 사건이다. 낯설고 처량한 순간이다.
민음사 체홉 단편선 표지는 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Unexpected Visitors'이다. 지주의 아들이 혁명에 뛰어들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그가 오랜 시베리아 유형을 마치고 돌아왔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이 돌아왔다. 혁명가도, 아내도, 아이들도 삶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또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럼에도 삶은 꾸역꾸역 흘러간다.
체호프는 44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