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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Dec 15. 2021

사료를 기다리는 물고기

하이예크 '노예의 길' 제8장 누가, 누구를?

하이예크의 '노예의 길'을 읽고 있다. 어렵다고 해서 책장에 꼽혀만 있던 책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8장 제목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읽었다. 겨우 20쪽을 읽었는데도 하이예크의 통찰력에 작은 전율마저 느꼈다. 15장으로 구성된 책인데 앞으로 한번에 정리할만한 책이 아니다. 장 별로 나눠읽고, 생각하고, 전율을 글로 적어놔야만 하는 책이다.


수 천년 동안 권력은 국가가 독점하였다. 근대의 역사는 시민이 국가로부터 권력을 찾아오는 과정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임금의 은혜와 국가의 보살핌에 기대살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토대의 변화는 시민이 생산수단을 나눠갖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생산수단을 토대로 정치권력도 나뉘게 되었다. 이제 경제적 성공과 실패의 책임은 개인의 권리이자 개인의 책임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국가는 존재해왔고, 국가는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고 있다. 국가는 언제건 국가주의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국가의 따뜻한 배려와 공익이라는 밑밥을 뿌리며 시민들이 양식장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양식장 안에 들어가면 어떠한 포식자로부터도 안전하다고 선전하고 있다.


우리는 단호하게 국가의 보호를 거부해야 한다. 보호는 결국 통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양식장에 들어가는 순간 나올 수 없음을 봐왔기 때문이다. 양식장에 들어가는 순간 뿌려주는 사료만 기다리는 운명임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언제 뜰채로 들려나가게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사냥할 수 있다. 운도, 불운도 나의 운명이다. 운과 불운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자유의 징표다.


       

==================  <이하 발췌>   


평등의 규칙과 같은 고정된 규칙은 잠자코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우연 혹은 외부적 필연성과 같은 것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몇 사람이 모든 사람의 중요성을 균형 있게 재어서, 그 몇 사람의 즐거움과 판단에 따라 누구에게는 더 주고 다른 이에게는 덜 주는 것은, 사람들이 이들을 초인간적 존재라고 믿고 있고, 초 자연적 테러에 의해 지지되지 않으면 결코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존 스튜어트 밀)  

     

이때 사회주의 운동은 바로 그 특정 집단의 지위에 초점을 맞추며, 그래서 그 목표도 이 집단의 상대적 지위를 높이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문제의 성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국가라는 도구에 영향을 미치고, 또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조직화된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국가의 강제력만이 유일하게 누가 무엇을 가질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므로, 유일하게 가질 가치가 있는 권력이란 바로 이런 명령권 행사의 일정한 참여지분이 될 것이다. 


모든 경제현상들 사이의 밀접한 상호의존성으로 우리가 원하는 데서 계획을 멈추기 어려우며, 또 일단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이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 방해받게 되면, 계획자가 그의 통제수위를 완전히 포괄적 수준에 이를 때까지 높이지 않을 수 없다.  

  

불평등, 실망, 불운과 같은 것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누구든 부닥칠 수 있는 (운에 따른) 고통에는 순응할 것이지만, 당국의 결정에 따른 결과인 고통에 대해서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 대한 완전한 권력을 가질 수 없고, 개인으로서 우리 각자가 자신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생산수단들이 한 사람의 손아귀에 귀속되어 있다면, 그 손이 ‘사회’ 전체라는 이름의 손이든 아니면 독재자의 손이든 관계없이, 이러한 통제를 행사하는 자는 우리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경쟁사회에서 빈곤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기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개방된 기회들보다 훨씬 더 제약되어 있다. 경쟁시스템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도 큰 부를 쌓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부가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 권력자의 선처에 달려 있지 않다. 경쟁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백만장자가 나에 대해 가지는 권력은, 최하급 공무원이 국가의 강제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재량에 따라 내가 어디에 살고 일할 것인지 결정할 때, 그가 내게 행사하는 권력에 비해 훨씬 더 적다.          

 

부자가 힘이 있는 세상은 이미 힘 있는 기존의 권력자들만이 부를 획득할 수 있는 세상보다 여전히 더 나은 곳이다.          


우리가 가진 기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경쟁체제로부터 도출된 것이며, 경쟁이 사라지면 필연적으로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정당한 가격 혹은 공정한 임금이라는 말로 뜻하고자 하는 것은 통상적인 가격이나 임금,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사람들이 기대하게 된 보상, 혹은 만약 독점적 착취가 없었더라면 존재했을 가격이나 임금이다.           


개별 근로자의 ‘그의’ 생산물 전체에 대한 권리주장을 일단 부정하고, 자본으로부터 얻는 보상 전부를 모든 근로자들 사이에 분할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는 마찬가지의 기본적 문제가 여전히 제기된다.          

더 성공했거나 덜 성공한 배관공의 소득격차도,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소득격차만큼이나 크다.    

           

나치운동 초기시절 화폐소득으로 볼 때, 나치운동의 보통 운동원은 평균적 노동조합원이나 과거의 사회주의 정당의 당원보다 가난하였다.  빈곤계급들은 약간의 정당성을 가지고, 번창하는 노동운동 부문들을 피착취계급이 아니라 착취계급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운동은 국가가 모든 경제적 활동을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동의하지만, 산업근로자들이 그들의 정치적 힘을 사용하고자 했던 목적에는 반대했던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파시스트와 나치는 문제해결에 필요한 합의수준이 합리적 기대를 넘어서는 합의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민주적 해결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환상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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