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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적십자로 출근합니다

by 포데로샤

"여보, 당신은 뭐든 시작은 잘해. 그런데 끝을 보는 게 없어."


아내의 지적, 맞는 말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시작은 했지만 중도에 포기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대학생 시절 요요를 배운다고 1박 2일 워크숍까지 다녀왔지만 얼마 안 가서 그만두었다. 스트레스를 푼다고 기타를 사서 반년 넘게 레슨을 받았지만 지금은 장식용으로 쓴다. 탁구 레슨을 1년 넘게 받았는데 라켓을 잡지 않은지 10년도 넘었다. 영문 번역을 해 보겠다고 합정역 5번 출구를 1년 동안 지나다녔는데 지금은 영어 자체가 가물가물하다. 모두 다 내 의지 부족의 결과다.


그래도 내가 꾸준히 한 게 하나라도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직장생활이 떠올랐다. 바로 적십자 생활. 1년도 안 되어 포기한 것들이 즐비한데, 한 직장을 무려 19년이나 다녔다니. 호구지책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고, 어느 순간 믿게 되고 빠져들게 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직장생활 중 나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2018년 10월 회사에서 '15년 장기근속 표창'을 줬는데, 그걸 받고서 만감이 교차했다.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다니. 첫 출근을 하기 위해 부모님과 양복을 사러 갔던 기억부터 거쳤던 업무, 가 본 현장, 만남 사람들이 떠올랐다.


지내면서 좋은 일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간마다 힘든 시간도 있었다. 그렇지만 행복한 기억들이 많았다.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고통을 줄여준다는 특이한 사명을 갖고 있는 기관에서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을 많이 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의의 봉사자와 후원자, 헌혈자, 수혜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본 것도 나에게 공부가 되었다.


직장생활의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서 나는 지난 시간의 분투를 하나하나 글로 기록해 두고 싶었다. 기억은 잊히지만, 기록은 결국 남으니깐.


브런치를 알게 되고, 그간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썼다. 적십자 이야기에 사람들이 얼마나 흥미를 느낄지는 모르지만, 이런 활동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정리도 하고 함께 보여드릴 겸 꾸준히 썼다. 한 주에 한 편을 쓸 때도 있고, 안 써질 때는 두 주 세 주에 한 편을 쓸 때도 있었다. 그렇게 손 놓지 않고 써서 올리다 보니 20편의 글로 묶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20년 차 적십자맨이 되었다.


내가 쓴 글들은 내 직장생활의 전반전을 다룬 이야기다. 이 글이 가능했던 건 내가 현장 가까이에서 여러 업무를 해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적십자 업무 중에서 내가 담당으로서 해 보지 못한 업무들도 많다. 그런 일들은 업무 경험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소개하려고 고민하고 있다.


과연 나는 내 적십자 생활의 후반전에도 이런 경험들을 담아낼 수 있을까. 확신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지금처럼 현장 가까이에서 활동한 이야기를 흘려버리지 않고 메모하여 글로 쓰고 공유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오늘도 적십자로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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