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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Dec 16. 2021

기억되는 사람

한 번도 뵌 적은 없다. 지난 5월 '1980년 5월 광주적십자병원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라는 글을 준비하면서 그때 그 병원에 근무했던 선배 직원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고 주변에 알아보다가 퇴직하신 김철부 부장님 연락처를 받았다. 두 차례 통화해서 이야기를 듣고 글에 함께 정리했다. 글을 쓰던 와중에 이 분이 책 <솔페리노의 꿈> '1980년 5월'이라는 글에도 나온 걸 찾았다. 김 부장님은 수도권에 있는 자녀 집에 머물고 계시다면서 코로나 접종을 마치는 가을쯤 광주에 내려올 거라고 하셨다. 교회 소식지에 썼던 글이 집에 있을 거라며 나중에 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도 한 번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고 통화를 마쳤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이제 내려오셨겠지. 전화 드려봐야겠다.'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김 부장님이 그사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놀랐다.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해 보니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더 많은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빈다. 


국제적십자운동 기본원칙의 하나인 '중립'의 원칙을 잘 설명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 속에서 부상당한 공수부대원 한 명이 학생들에 쫓겨서 적십자병원 앞 개천에 뛰어내리자 학생들이 뒤쫓아 내려 포위하고 돌로 치려는 순간, 적십자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은 김철부 당시 병리사가 뛰어가 시민들을 말리고 생명을 건 설득을 시작했다. 이어서 병원에서 들것을 든 직원이 나와 공수부대원을 병원으로 옮겼다. 항의하는 시위 군중들이 적십자병원을 포위하고 몽둥이를 들고 습격하려 하자 직원들 전원이 몸으로 막으며 적십자는 어느 편이건 상관없이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한다고 설득하였다. 이때 공수부대에 이 일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10분도 안 되어 공수부대원들이 들이닥쳤다. 50여 명의 시민, 학생들은 쫓겨서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밀고 들어오려 하자 이무원 당시 적십자병원장과 의사, 간호사들이 결사적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공수부대원들의 바지와 군홧발에 매달렸다. "나를 죽이고 들어가라"며 결사적으로 매달린 의사와 간호사 등 적십자 직원들의 진정한 용기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자 그 무서운 공수부대원들도 어쩔 수 없었는지 결국 무기를 내려놓고 들어왔으며, 이들은 지하의 물리치료실을 포함하여 복도에까지 꽉 찬 부상자들 가운데 공수부대원과 전투경찰, 시민, 학생 부상자들이 골고루 섞여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적십자병원에서는 그 누구도 체포되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으며 공수부대원, 전투경찰, 시민, 학생 모두 생명을 보장받았다. 그 후 계엄군이고 시민군이고 간에 무기를 소지한 자는 혼란이 수습될 때까지 적십자병원에 그 누구도 출입하지 못했다.

김혜남 저, 솔페리노의 꿈 '1980년 5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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