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다움 Apr 29. 2024

이건 정적인 운동이 아닌 것 같다

요가 : 마지막 5분 명상을 위한 도움닫기

  운동을 못하고 싫어하는 데 성격은 급한 내가 운동을 선택할 때 기준은 '쉬워 보이나?'와 '바로 할 수 있나?'이다.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한 것이 요가였다. 우선 나는 사지를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을 어려워한다. 반대로 천천히 움직이면 쉽다고 느낀다. 게다가 요가는 '나의 몸에 맞춰서' 동작을 하면 된다기에, 일단 되는 데까지 하자는 마음으로 임하며 특별한 사전훈련도 필요 없어 부담이 덜 하다. 그나마 '하기 싫은 운동'으로 요가를 선택하고, 마흔을 코앞에 두고 다시 배우기로 했다.

  요가를 처음 배웠던 것은 대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운동은 해야겠고, 운동에 특별한 돈을 투자하기엔 여유가 없어서 맨몸으로 할 수 있는데 비교적 접근이 쉬운 요가를 선택했다. 그런데 몇 번 수업을 나가고 그만두었다. 이유는 '어지러워서'였다. 내 몸이 막대기처럼 뻣뻣한 반면, 열정은 넘쳐흘러서 강사님의 동작에만 집중하다 보면 호흡이 제대로 안돼서 머리가 '띵'해지곤 했다. 호흡을 제대로 하려 해도 잘 되지 않았고, 아무리 내 몸에 맞춰서 되는 데까지 한다지만 앞, 옆 어디를 봐도 나와는 다분히 다른 동작과 평균이하의 유연함으로 낑낑대는 내 모습이 초라해져서 요가를 그만두었다.(운동을 그만두는 데는 언제나 구체적이고 다양한 이유가 발생한다. 하하하)

발렌타인데이 기념행사(?)로 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요가'에도 참여했다. 음... 근데 요가는 고독한(?) 정신수련 훈련이니 그냥 혼자하는걸로...하하

 

 그러다가 미국에 와서 요가 수업을 다시 듣게 된다.  '그래, 이거야'하고 한동안 요가 수업을 꾸준히 나가고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운동은 1시간을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지를 쉼 없이 움직이며 1시간을 꽉 채우는데 비해, 요가는 처음 약 5분은 편안한 자세로 호흡을 하고, 끝나기 5분 전에도 눈감고 누워서 명상하는 게 맘에 들었다. 상대적으로 같은 시간을 운동해도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적은 게 이득(?)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적용하며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동시간에 합법적으로(?) 눈감고 누워있는 게 포함되어 있어서'란 남들에게 내놓기 부끄러운 이유로 다시 시작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지만) 내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은 운동 후에 찾아오는 '호흡'은 확실히 달랐다. 즉 운동을 시작하기 전 눈감고 하는 호흡과 대조되면서 그 효과를 더욱 실감한다. 코를 통해 신선한 산소가 내 폐에까지 깊이 들어가는 느낌, 그리고 케케묵은 나의 묵은 감정과 함께 이산화탄소가 내 몸을 빠져나가는 느낌이 날 편안하게 만든다. 모든 게 이 마지막 5분 호흡, 진정한 이완을 위해 50분을 그렇게 늘리고 조여가며(?) 내 몸을 긴장하게 만든 동작들이 이해가 된다.

  요가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다른 생각을 감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서 몸을 구기고 잡아당기고 버티다 보면 어느새 고뇌와 번민 등이 들어올 틈 따위는 없다. 정신을 딴 데 뒀다간 까딱하면 내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하고, 후들후들 떨리는 팔다리로 버티다 보면 선생님의 카운트가 끝나기만을 간절히 염원하며, 내 온 신경을 집중한다. 격한 움직임 후 정적인 호흡은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명상 효과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단, 사지가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유체이탈적인 느낌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하하하)

   

  요가를 처음 하게 된 계기는 '조용하고 차분한 이미지'로, 상대적으로 덜 힘들 것 같아서였다.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하기에 좋은 운동이 아닌가 싶어서 덜컥 수강했지만, 그땐 이미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빨리 움직이는 게 덜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두 손은 베베 꼬고 한 발 서기 스쾃 자세로 1분 버티기를 하고 나서였다. 내 안에 접혀있던 세포들을 줄지어 세우는 느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적인 게 맞는데, 내 안의 근육들은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삶에서의 대부분 일도 그렇다. 처음의 이미지와 달리 전개가 반전으로 치달을 때가 많다. 학생 때는 대학만 들어가면 다 해결될 것 같았고, 졸업 후에는 직장만 들어가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낳으면 등등 시기와 상황에 따라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목표를 향해 달렸던 적이 있다. 그 결과 뽑아도 다시 자라나는 잡초처럼, 내 앞에 놓인 퀘스트들은 주제만 바뀐 채 여전히 날 채찍질한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무작정 도망가는 게 능사가 아니기에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본다. 누워서 편히 쉬는 것처럼 보이는 시체자세에 끌려서 요가를 시작했지만 거친 돋움을 위한 숨 고르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수업 중반을 지나서 나가기도 어려웠던 것처럼, 어떤 일의 한복판에 들어선 이상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버티며 할 수밖에.

  그렇게 버티는(?) 요가를 하면서 인상 깊었던 말은 '동작은 거들뿐 호흡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유연하게 손이 발끝까지 닿는지가 아니라 내 안의 호흡을 길고 천천히 마시고 내뱉는 것을 잘하기 위해서 동작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질을 생각하면, 뚝딱거리는 내 관절과 타이트한 근육으로 움직임이 이상해도 '호흡'이란 기본에 충실한 채 계속하다 보면 그 외의 것들은 천천히 따라오게 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처음엔 안간힘을 써도 손끝이 복숭아 뼈 근처에서 서성였는데, 이제는 발가락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유연함이 생겼다. 너무 힘주지 않고, 그저 하다 보니 생긴 이 작은 변화가 기쁘다.

  이것을 예측불가 다사다난한 내 생활에도 적용해 본다.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가되, 기본에 충실한 채 힘을 빼본다. 육아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본질이고, 집안일은 집안에서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하는 것이 근본이며, 미국에서 영어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게 본연의 역할이다. 너무 많은 수식어와 다양한 방법들이 내 머리를 어지럽힐 때는, 요가를 할 때 기본인 호흡에 집중하듯이 정의에 집중해 본다. 그리고 한 번에 하나씩, 나에게 친절한 태도를 유지한 채, 산적한 퀘스트들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나마스떼.


덧. 미국에서 요가 수업을 듣다가 놀랐던 점 중 하나. 새벽 6시하는 요가수업이었는데, 매번 조기 마감되는 인기 수업이라서 호기심에 신청했다.(언제나 호기심이 문제다. 흑) 요가수업인데 덤벨,밴드, 공 등 다양한 도구를 두고 시작한다. 범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중반으로 치달을수록 쿵쾅거리는 비트와 형형색색의 현란한 조명이 나를 감싸기 시작한다. 동작은 요가 동작인데 두 팔엔 덤벨을 힘차게 휘두르고 허벅지 사이에는 공을 끼운채 부들부들 버틴다. 다시 수업설명을 보니 난이도 '상'에 이른바 혼합요가였다. 요가의 자세에 덤벨과 같은 각종 도구와 스피드를 추가하니 나에겐 역대급 운동으로 등극한다. 아무리 운동해도 땀이 잘 안 나던 내 체질에 땀샘을 열어준 고마운(?) 수업이었다.

이대로 계속 하다 죽을 것 같아서, 생의 마지막(?)을 남기는 마음으로 운동 도중에 인증샷을 남겼다. 허허허 

  여기서 한 번 더 느꼈다. '요가가  정적인 운동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유사문장으로 '결혼은 안정이 아닐 수도 있다', '미국에 와도 영어가 안 늘 수도 있다' 등이 있다. 하하하)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을 넘어서는 결말은 언제나 있다는 것. 섣불리 속단하고 멀리 예측하기보다는 그저 내 앞에 주어진 오늘에 충실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며, 오늘도 요가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