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30대 초반이었을 때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때가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한국에 갔을 때니 30대 초반쯤, 2000년 밀레니엄 조금 지나서. 종로에서 택시를 잡아 탔는데 나이로 치면 우리 삼촌 뻘 될만한 택시기사 아저씨가 거울로 내 얼굴을 쓰윽 훑어보더니 대뜸 물었다.
몇 살이에요?
아무리 내가 한참 손아래라도 그렇지 초면에 대뜸 몇 살이냐고 물으니 대답하기가 석연찮고 기분도 좀 나쁘고 그래서 잠자코 있었다. 조금 있다가 또 물어왔다.
그럼 아가씨예요 아줌마예요?
이 역시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2지선다라 쉽게 대답할 수 있어서 그랬을까, 나는 결혼했어요 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기사 아저씨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아줌마가 왜 아가씨처럼 생머리로 다녀요?
나원 참, 내가 결혼한 것 하고 생머리로 다니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람. 나는 기분이 아주 나빴지만 나이 드신 분 한테 얼굴 붉히기가 싫어 웃으면서 얘기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불쾌한 기억이긴 한데 그분은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결론은 기혼과 미혼을 엄격히 구분하는 문화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증거로 한국에서는 기혼과 미혼을 구분하는 여러가지 어감의 명사들이 있다. 처녀, 총각, 아줌마, 아저씨, 미혼녀, 미혼남, 유부녀, 유부남, 이혼녀, 이혼남, 돌싱녀, 돌싱남, 미혼모, 미혼부... 옛날보다는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각 사회 구성원들은 자기가 속한 이 명사에 알맞은 차림을 하고 행동을 해야한다. 처녀면 처녀답게, 유부남이면 유부남답게.
반면 독일에서는 결혼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을 구분하는 단어는 참으로 빈곤하여 미혼과 기혼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따로 명사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동사를 빌어와서 쓸 뿐이다. 결혼했건 안 했건 한결같이 여자 이름 앞엔 Frau가 붙고, 남자 이름 앞엔 Herr가 붙는 걸 무시하고서라도 사람을 처음 만나면 결혼했는지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심지어 나이가 몇인지 묻지도 않는다) 이것은 독일 사회에서 결혼이 우리나라만큼 덜 중요하다는 뜻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애 낳고 결혼 안 하고 한참 동안 살다가 늦게 결혼하는 사람도 있고, 혼인신고 없이 평생 동거하며 살다 가는 커플도 많다.
우리 회사에는 린테너 부인이라고 나이 육십이 넘은 회계부서 직원이 있는데, 이 분은 몇십 년을 결혼을 안 한 채 자식도 없이 남자 친구와 산다. 나는 그분을 만나면서 Lebensgefährte(여자는 Lebensgefährtin)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분은 동거하는 분 얘기를 할 때마다 남자 친구라고 말하지 않고 Lebensgefährte라고 부른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 정도 되겠다. 한국에서라면 '이 분이 제 동반자셔요.'라고 소개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동반자? 동업을 하는 사이인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린테너 부인처럼 남편도 아니고 남자 친구도 아닌 동반자와 살아가는 사람들이 독일에 꽤 많다. 그래서 나는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의 뜬금없는 결혼식 소식에 깜짝 놀라기도 여러 번이다. 혼인신고도 안 하고 결혼식도 안 올리고 애를 여럿 낳고 한참을 살다가 늦게 결혼식을 올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뭐야, 학부모가 되도록 아직도 결혼을 안 한 거였어? 그래서 한국사람인 내 기준으론 이런 뜬금없는 결혼식에는 축의금나 선물주는것이 생소하다.
이런 것을 보면 독일에서 결혼과 혼인신고가 가지는 의미는 직장인 세금 클래스가 1(싱글에 해당)에서 3이나 5, 혹은 4(기혼에 해당)로 바뀌어서 세금을 조금 절약할 수 있다는 의미 외에 그다지 큰 의미는 없는 듯하다. 그래서 늦게 결혼한다는 지인이 있으면 축하한다는 말 뒤에 '이제 세금 좀 덜 내겠네'라는 말을 덧붙인다. 사실 월급으로 세전 500만 원을 받는다면 자식이 몇인지, 사는 지역이 어디인지,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 실수령액이 약간 달라지긴 하지만 대략 싱글 세금 클래스 1인 경우 세후 3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게 되고, 결혼하여 세금 클래스 3이 되면 세후 350만 원 선의 월급을 받게 되니 세금을 많이 절약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내가 20년 전에 만났던 그 택시 기사 아저씨가 독일에 와서 이렇게 다른 두 나라 결혼의 의미를 듣게 된다면얼마나 놀랄까. 나는 그 기사 아저씨한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아저씨, 여기 미스 린테너 씨입니다. 나이는 예순이시고요, 아직 아가씨니까 긴 생머리하고 다녀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