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길산 수종사에서

이관순의 손편지[30-16]

by 이관순

운길산 수종사에서


9월 끝자락에 운길산을 올랐다가 수종사를 찾았습니다. 활짝 트인 시야로

양수리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깊은 호흡에 가슴이 절로 열립니다.

어제의 9월과 오늘의 10월은 또 딴 세상입니다.

수종사를 배경으로 북한강에서 오르는 바람소리와 가을의 차마 자락이

끌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흔하던 매미의 울음은 오간데 없고, 견결하게

초록성을 쌓았던 여름 숲도 기를 숙인 게 완연해 보입니다.

쇠잔해진 초록은 굴뚝의 연기로 흩날려 사라집니다. 갑자기 지난여름에,

동해안 백사장을 어지럽게 밟고 다닌 내 발자국들이 양수강 위로 아련히

떠오릅니다.


호젓한 수종사엔 계절의 전령이 찾아든 듯이 혼자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추녀에 달린 풍경(風磬) 말입니다. 찰랑찰랑 마음에 방울소리를

울리는 풍경은 언제 들어도 살갑고 편안함을 줍니다. 삶의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고, 바람 든 스산한 생각들을 정결하게 빗질해 주니까요.

사찰마다 풍경 끝에 물고기가 매달려 있습니다. 왜 추녀 밑 풍경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매달려 있을까? 옛적 이유를 모르던 때, 풍경에 달린

물고기를 꽤 신기하게 바라보았었지요.

도대체 풍경과 물고기 사이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면 굳이 물고기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텐데, 어느 사찰에 가도

풍경이 달린 곳엔 물고기도 함께 있습니다. 그런 의문으로

한동안 풍경을 올려다보다가 한 순간 의문이 풀렸습니다.

내 나름의 깨침을 얻은 겁니다.


물고기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풍경소리를 만들고 울려 퍼지게 합니다.

이때 물고기를 피사체로 초점을 맞추다 보면 뒤로 열린 배경이 보입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하늘이 물고기 뒤로 열려 있음을. 푸른 하늘은

곧 푸른 바다를 뜻함을 알았습니다.


광대한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노닐고 있는 것이구나.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물고기를 매달아 놓음으로써 그곳에 물이 한없이 풍부한 바다를

만들어 낸 것이구나. 의문은 의외로 쉽게 풀렸습니다.

물은 생명을 유지해 주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화재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물이 풍부해야 어떤 불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넉넉한 수량을 확보해서 오래된 목조건물을 화재로부터 보호하려는

상징성임을 알았습니다.


그보다 더 심오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물고기는 깨어 있을 때도

잠을 잘 때에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어서까지 눈을 감지

않지요. 이는 수행자가 물고기처럼 항상 잠들지 말고 부지런히 도를 닦아

정진하라는 뜻을 지닙니다.

❝눈을 떠라!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있어라.

깨어 있으라.

언제나 혼돈과 번뇌에서 깨어나 일심으로 살아라.

그러면서 너도 깨닫고 남도 깨달을 지니…❞


수종사에서 듣는 바람소리, 풍경소리에 습하게 구겨진 마음을 펴 말리면서

공광규 시인의 시 ‘수종사 풍경’을 내 나름 변주해 봅니다.

“양수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습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와 눈과 비에 얇아진 마른 몸, 그 몸을 바람이 와서

때릴 때, 부서지는 맑은 소리……” ‘수종사 풍경’이네요.

흐르는 물소리에 수척해지고 가을빛은 나날이 돌계단을 오르는 요즘

키가 큰 달리아, 코스모스, 해바라기 어깨 위로 노닐던 구름이 어느새

털갈이를 마치고 두둥실 하늘 높게 올라가 있습니다.


모두들 발걸음을 느릿하게 늦추어 걸으면서 수확을 앞둔 누렇게 익은 가을

들판과 산하를 돌아보십시오. 내 가슴 깊은 곳에 여울져 흐르는 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가을은 한없이 푸근하고 인자한 어머니의 품입니다. 허수아비도 웃고

서 있는 정감 넘치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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