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18-16]
춘천행 기차에서 나들이 가는 할머니들과 마주 앉게 됐습니다. 연신
서로 손을 만지고 무릎을 치면서 떠들며 깔깔대며... 왜 여자들은
나이가 들면 목소리가 커지는지, 목청이 보리 이삭 패듯 합니다.
얘기가 시들해지자 핸드폰을 열고 주고받는 폼이 손 자녀 자랑입니다.
“우리 둘째야, 잘 생겼지? 한 자리할 거 같지? “ 육아가 힘들다고 팔자
타령하던 할머니도 침이 마르게 자랑합니다.
할아버지 세상이라고 다를 바 없죠. 핸드폰의 첫 화면 이미지로 아이들
사진을 쫙 깔은 분도 많습니다. 가까이 두고 보고 싶지만, 육아를 맡지
않는 한 손자녀의 얼굴 보기가 녹록지 않은 세상입니다.
세상살이가 바쁘고 다들 떨어져 사니, 매주 손 자녀들과 만나면 거의
우상이 될 수준이고, 한 달에 한두 번만 돼도 부러움을 삽니다.
특별한 날에나 얼굴 보는 경우도 허다하니까요. 손 자녀를 향한
조부모의 짝사랑은 이렇듯 애틋합니다.
우리 집은 3대가 함께 삽니다. 아들 딸 남매가 내게 선물한 손 자녀가
다섯인데 위로는 고등학교에서부터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 어린이
집, 18개월 된 손녀까지 다채롭습니다.
손 자녀에게서 행복감을 느끼고 따뜻한 교감이 오가는 것은 특히
아이를 안아줄 때입니다. 잠자기 전, 아침에 일어나서, 등 하원 할 때,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도 할아버지를 부르며 뛰어오는 아이들을 꼭
안아줍니다.
처음 수동적이던 아이들이 이젠 습관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죠.
지금은 내가 안아주지만 곧 쟤들이 날 안겠구나, 내 키를 훌쩍 넘긴
중고생이 된 외손녀, 외손자를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흐르는 세월을 생각하면 아이를 안아줄 날이 길지 않음을 느낍니다.
하나둘씩 내 품을 벗어나는 위치 전도가 찾아오겠죠. 그때가 되면
아이들이 손을 벌이고, 할아버지를 안으려고 할 것입니다.
돌아올 삶의 궤적이 떠올려집니다. 하지만, 이래도 저래도 아이들과
갖는 시간은 행복한 일입니다. 채색만 다를 뿐 손자녀와 가슴으로
나누는 사랑이란 애틋함은 더 깊고 성숙해질 테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자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른 건 신비합니다.
딸이 첫 손녀를 안겨줄 때, 볼을 대면서 어디서 이런 선물이 왔을까.
그때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가슴 뭉클한 정감을 일으킨 적은 없었으니까요.
아내로부터 두 자녀를 얻을 때도 이러한 감정은 갖지 못했습니다.
아빠가 됐다는 뿌듯함과 가장이 된 우쭐함은 있었지만.
내리사랑이라는 말도 어쩌면 늦게 철들며 생긴 보상심리 같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다섯 손자녀의 성장주기를 일정한
간격으로 맞으면서 그때마다 새롭게 눈을 뜨기도 했지요.
손자 선물을 받을 때마다 나름 사랑이란 거름을 듬뿍듬뿍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막내 손녀가 태어나서는 또 다른 감동으로
뭉클했어요. 백일과 돌을 거치면서 기다가 일어서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때, 주기별 성장과정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아이의 재롱을 보면서, 안아주고 장난을 치고 그리고 볼을
비비다가 갑자기 이런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아이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구나! 하는.
‘최고의 선물’에서 ‘마지막 선물’로 바뀐 사실을 깨닫습니다. 더는
내가 받을 선물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18개월짜리 막내 손녀가 보여주는 귀여운 작은 동작,
어줍은 말 한마디, 떼쓰며 울거나 웃을 때 드러나는 앞니 5개,
작은 얼굴에 퍼지는 미소까지 모든 게 아름답습니다.
마지막 선물이란 생각이 들 때마다 순간순간이 더 깊은 정이
흐릅니다. 마치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때처럼. 영화가 끝나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죠.
그 아이를 보다가 이보다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나에게 오감을
열어주는 말하는 꽃. 애틋한 정분이 안개꽃처럼 피어오릅니다.
❝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
사시사철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세월도 흘러가는 것이니
아쉬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이
그토록 아름답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한 게지요
(정일근 詩에서)
❞
한철 피었다 지는 세상에서 외롭지 않게 다섯 손자녀와 시절 따라
아름다운 기억을 쌓는 일은 더없는 기쁨입니다. 앞으로 10년은 족히
어린 꽃들과 사랑을 교감하며 지낼 수 있으니 한없는 은총입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강변역에 내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롯데마트로
향합니다. 내게 달려와 두 손을 내밀며 눈을 반짝거릴 세 손자녀,
고사리 손에 쥐어 줄 먹거리를 사기 위해서죠.
버거 젤리와 마이쮸, 왔다 껌, 꿈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