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sns에 과거에 올렸던 소식이 알림으로 왔다. 평소에는 알림이 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호기심이 발동했다. 과거의 오늘? 내가 어떤 내용을 올렸을까? 9년 전 오늘은 나와 신랑이 감격에 취했던 날이었다. 다름 아닌 손녀가 처음으로 걷기 시작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손녀는 태어나자 마자 우리 집으로 왔다. 2013. 4.5일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처음으로 손녀가 우리 품으로 들어왔던 날이기 때문이다. 딸이 출산을 하러 병원을 간다는 연락을 받고 어떻게 병원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속초에서 서울까지 아무 말 없이 두 손을 꼭 움켜쥐고 병원까지 도착했던 기억만 떠오른다.
처음 면회가 되고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그 많은 신생아들 틈에서 손녀를 대번 알아볼 수 있었다. 딸을 처음 낳았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만남 이후 출산휴가가 끝나는 3개월 후 손녀는 우리 집으로 왔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의 중심은 손녀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남편과 나의 개인생활은 다 내 팽개쳐도 좋을 만큼 하루하루가 신세계였다.
손녀딸을 낳을 당시 딸은 육아휴직을 낼 상황이 아니었기에, 엄마가 봐주마 하고 데려 왔다. 직장 생활하는데, 엄마가 어떻게 봐줘하며 걱정을 하였지만, 엄마한테 그냥 맡겨, 그 한마디만 던졌고, 우리 부부의 손녀 육아가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먹을 분유는 통통이 담아 소분해 놓았고, 기저귀며, 갈아입을 옷을 다 개어 놓았고, 아이의 용품을 준비하는 것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재확인하였다. 하지만 나의 출근 준비는 로션 하나 바르는 것으로 끝내고, 누워 있는 아이를 쳐다보며, "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있어 ~~" 하면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옹알이 를 하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한참을 아이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으면 낮동안 손녀를 돌봐줄 사람인 내 동생이 도착한다.
출근을 해서 업무를 하는 동안에도 나의 정신은 온통 손녀딸에게 가 있었다. 우유는 잘 먹고, 잘 자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정을 알고 싶어도 간섭하는 것 같아 연락도 못하고 있다가 퇴근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달려 집으로 왔고, 낮 손녀의 상태를 전달받았다.
퇴근 이후 가장 먼저 한일은 아이를 메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세상 견문을 넓혀 주겠다는 이유로 가까운 바다로 나가고, 시장으로 나갔다. 서점에도 데려가고, 속초에서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몇 번이고 갔다. 아이가 처음 보는 세상을 다양하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많이 간 곳은 이마트 2층 가장 안쪽 공간이었다. 그곳은 손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다양한 열대어가 어항 속에서 놀고 있는 곳이었다. 또 어항옆에는 햄스터와 도룡농 등 작은 동물들이 쉴새없이 움직였고, 쳇바퀴를 돌렸다.
아이는 그런 동물과 열대어에서 눈을 떼지 않아고, 알아 들을수 없는 말을 내 뱉었다. 같은 동물을 그림으로 보여주어도 별반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에는 반응했고 좋아했다.
추운 겨울은 바다로 산으로 갈 수 없어 출퇴근하다시피 이마트로 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수많은 동물과, 꽃, 생물을 보여준 손손녀는현재 관심이 없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둘쩨가 관심이 많고, 생물학 자겸 과학자가 꿈이다)
주말에는 좀 더 멀리 나갔다. 인근 고성과 양양으로. 축제장은 더 자주 갔다. 축제장에서는 지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모두 누구냐고 물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셋째냐는 말이었다. 그때 당시 우리 부부 나이는 50을 갓 넘겼던 때라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늦은 나이에 셋째를 낳는 사람도 당시에는 유행이었으니까.
아이의 성장 속도는 육아수첩에 나와 있는 데로 잘 커가고 있었고, 매일매일 딸 부부에게 보고를 했다. 책 속에 나와 있는 성장 속도에 맞추어 잘 크고 있었지만, 걷는 것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집 아이들은 모두 돌 전에 걷는다는데, 우리 집 손녀는 돌이 지나도 걸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아니다. 기어 다니지도 않았다. 앉아서 엉덩이로 날아서 다녔다. 엉덩이를 들어 올려 통통통 하며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했다. 우린 그 모습이 신기해서, 일부러 시켜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돌을 지나고도 두 달이 지났는데, 아이는 걸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육아책에 적혀 있는 데로 분유를 먹였고, 이유식까지 했다. 아이 전용 냉장고도 들였을 만큼 아이 먹거리에 대해서는 철저를 기했다.
제 엄마가 15개월을 넘겨서 걸었는데, 그 딸도 그렇겠지.. 하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걸을 수 있도록 퇴근 후 걷는 연습을 할 수 있는 장난감도 사주었다. 하지만 아이는 걷지를 않았다. 아예 걸으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통통 걸리며 엉덩이로 다녔다.
그런데 2014. 7. 5일. 오늘로부터 9년 전이다. 그날도 우리 부부는 퇴근 후 아이를 데리고 영랑호를 갔다. 영랑호 둘레길에 넘어지려는 아이를 억지로 세워 놓고, 우리 부부는 멀리 떨어져. " 보배야!! 보배야!! 할아버지한테 와봐 ~~" 아이는 뒤뚱뒤뚱하더니 풀썩 하고 엉덩이를 땅바닥으로 탈썩하고 주저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내가 달려가려고 하자, 남편이 가만있어보라며, 다시 아이를 불렀다. 그런데 아이가 일어나더니 한 발을 떼는 것이다.
한 발을 뗀 후에는 다시 넘어졌다. 우린 흥분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잘했다며, 사진을 찍고, 제 부모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야말로 호들갑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걷기 시작했다.
만 15개월이 지나도록 걷지 않던 아이가 지금은 다리로 하는 스포츠는 모두 잘하고 있다. 겁이 많아서 서는것도차 두려워하던 손녀가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고, 댄스를 배우고, 늘 뛰어 다닌다.
아이가 15개월이 지나, 제 집으로 돌아가고,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부모 육아는 끝이 났다. 하지만 처음 손녀딸이 걷던 날 7월 5일, 할머니 육아를 다시 시작했다. 지금은 그때처럼 걷지 못해서 애태우지도 않고, 등교 준비를 스스로 하고 혼자서 현관을 나서고, 학교가 파한 후에도 혼자서 집으로 온다.
10년 후의 육아는 거저먹기다. 등교하기 전 밥을 챙겨주고, 돌아오면 간식을 챙겨 주는 정도다. 주위에서는 아이를 돌봐주면, 내 시간을 뺏기고, 퇴직 후 인생을 즐겨야 하는데, 왜 봐주냐고, 알아서 하게 놔두라고 한다.
처음 손녀가 우리한테 왔을 때, 처음 걸었을 때, 그 기쁨을 잊을 수 없고, 자기 옆에서 오래오래 있어달라는 손녀를 거절할 수 없다. 그리고 처음 육아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기도 하다. 등교하고 나면 오롯이 다 내 시간이다. 지금처럼 카페에서 여유롭게 보내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앞으로 제2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설계도 한다.
육아를 한다는것은 골병드는 일이라고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난 해냈고, 앞으로도 다시 해야한다면 , 다시 할것이다. 지금부터의 육아는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