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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N 전기수 Jun 02. 2020

코로나 시대의 우리

김형환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2절-




내가 갖고 있는 책, 존 맥아더 목사님의 [우주와 인간의 시작]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절을 시작하는 히브리어 구의 구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주어와 동사에 앞서 위치하는데, 마치 주어에 대한 독특한 면을 강조하려는 듯 보인다. 이렇게 변역할 수 있다. "지구에 대해 말하면, 그것은 혼돈하고 공허하였다."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초점인 새로운 행성이 있는데, 그것은 혼돈하고 공허했다. 히브리어 표현은 '토후 와 보호' '토후'는 '황량한 땅', '황폐한 장소'를 나타낸다. '보후'는 '공허한'을 뜻한다. 지구는 완전히 황량하여 공허한 곳이었다. p102




김형환 교수는 현시대를 바로 이 창세기 1장 2절 말씀에 비유한다. 코로나로 물든 현 세계는 바로 '혼돈하고 공허한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다다른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고. 




그 말을 들으니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워 하고 있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도 유명 강사다. 그 강사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잠시  개점휴업 상태였다. 다중을 상대로 하는 강사이다 보니 전염병의 창궐은 그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몇 달째 고향에 내려가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선입견을 갖고 봐서 그런가. 사진에서 본 그 강사는 과거 내가 알던 말쑥한 모습은 어디 가고 수염이 텁수룩한 실로 자연인 그 자체였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처럼 사람들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했다. 김형환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코로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구까지도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었던 창조 이전의 시대로 말이다. 




과거에도 페스트나 스페인 독감 같은 재앙이 있었다지만, 지금처럼 고도로 발달하고 세계가 연결된 시대에서 겪는 팬데믹의  파괴력과 영향력은 다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매일 같이 매스컴을 통해 접하고 있다. 그리고 개개인이 몸소 체험하고 있다. 




이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모든 것을 초기화시켰다. 동료와 일속에서 살던 직장인들은 일도 동료도 없던 자리로 돌려보냈고, 대형 건물 속에서 일하던 직장인들도 그보다는 작고 초라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건 마치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 나오는 시간의 근원지로 인류 대부분을 돌려보낸 형국이다. . 




혹자는 말한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기 전에는 전과 같은 평안을 찾을 수 없다고. 아니 설령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재앙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참 모습을 절감하며 질병 앞에 망연자실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 그럴 수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길을 잃었다면, 별자리를 기준으로 내가 서 있는 곳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준이 될 북극성을 찾아야 한다.




먼저 철학에서 길을 찾아본다. 철학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기투'라는 단어다. 즉 실존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이 갖고 있는 본질인데, 바로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전에서 찾아보니 '기투'를 이렇게 설명한다.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에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하이데거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기본 개념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은 퇴로 없는 길목에 서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초월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으로 그리스 서사시에서 찾아보았다. [고전은 서사시다]는 책에서 저자는 [일리아스]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운명은 신들도 어쩌지 못한다. 제우스도 아들 사르페돈을 구할 수 없었고, 아폴론도 헥토르를 끝까지 보호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물론 테티스도 자신의 아들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죽음의 운명은 오롯이 인간만의 것이다. 인간은 그 운명을 의식하면서도 여전히 살아간다.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상황을 아킬레우스의 비극과 함께 짜 넣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서사시가 주는 교훈은 델피 신전의 신탁과도 맞닿아 있다. 그건 우리가 흔히 소크라테스의 격언으로 알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다. 이 말에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한계상황에 대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 




인간에게 죽음은 '피터팬의 그림자' 같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내용인즉 이렇다. 내가 어릴 때 텔레비전으로 본 [뮤지컬 피터팬]의 첫 장편은 피터팬이 신디의 방에서 그림자를 떼어내기 위해 애쓰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그 피터팬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떼어내기 몸부림치는 인간.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 수고가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 같은 전후 세대들은 요즘처럼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는 겪어보았지만, 이토록 돈을 쏟아부을 만큼 가계와 기업이 힘들어 한 적도 처음이다. 텔레비전에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폴로 하고 있는 강사가 나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를 보며 사진에서 본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직군 중에 군중을 상대해야 하는 강사가 있을 것이다. 일터를 잃은 그의 모습은 망연자실 그 자체였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가르침을 주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위한 기쁨과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고무적인 건 그는 탄력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서히 자신의 기쁨과 길을 찾아가는 모습이었고 얼마 전에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강의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단지 전염병으로만 보면 단지 그건 피하고 싶은 재앙에 불과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무릎에 눕혀 관조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이제 각자 개개인은 그 질문에 언어와 행동으로 답하는 일만 남았다. 인간사도 도전과 응전의 변증법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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