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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Jun 22. 2024

혁명인가 쿠데타인가...'태조왕건 정변'

[정변의 역사-확장판 2] '정사 너머에' 있는 역사

칠장사 명부전 궁예벽화. 궁예의 말기와 최후 행적은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 아래 내용은 6월에 출간된 '정변의 역사-확장판' 하이라이트 부분.


... 이처럼 잘 나가던 궁예가 안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은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 이후부터다. 정사에 따르면, 이 시기부터 궁예는 자신을 '미륵 부처'라고 자처하며 본격적으로 '신정적인 전제주의' 정치를 행했다. 자신은 물론 아들들까지 신격화했고 강론, 행차, 복장 등에 있어서 미륵 부처로서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 보였다. 결정적으로 '관심법'(觀心法)이라는 전지적 수단을 동원해 신하들의 충성을 유도하고 공포를 유발했다고 전해진다. 관심법은 상대방의 몸가짐이나 얼굴 표정, 얼굴 근육의 움직임 따위로 속마음을 알아낸다는 것이다. 이에 궁예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위기를 맞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 이에 설득된 왕건은 갑옷을 입고 장군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정변을 단행했다. 정사에 따르면, 정변이 일어났을 때 왕건의 군대에 저항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수많은 민중들이 호응했다. 이윽고 건의 대가 궁예가 있는 궁궐문 앞에 당도했을 때, 일반 군사들과 민중들이 함께 어울려 북을 두드리며 궁예를 끌어내자고 소리쳤다. 정변 소식을 전해 들은 궁예는 이렇다 할 저항 한번 해보지 않고 미복 차림으로 궁궐 북문으로 도망쳤다.


... 궁예의 말기와 최후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지금까지도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의 핵심은 궁예가 정말 미쳐버린 폭군이었냐는 것이다. 상술했듯 궁예는 초·중기에는 어진 정치로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말기에 이르러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해 민심을 잃었고 신하와 백성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묘사됐다. 그런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 한 세력이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으면, 그 세력은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전임자와 그 추종 세력을 왜곡하거나 격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에 기반해 역사의 기록을 남겼고 후대 사람들은 해당 기록을 '정사'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들은 조선을 건국할 때 고려 왕조 및 왕족들에게 이 같은 공격을 가했다. 이러한 점이 궁예에게도 적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즉 왕건 쿠데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전임자였던 궁예를 '인격 말살'시키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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