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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Jun 22. 2024

"조선 역사 1천 년 이래 제1대 사건" '묘청의 난'

[정변의 역사-확장판 4] 자주와 사대의 격돌 전말

고려 삼경 중 하나인 서경과 그 일대를 그린 조감도. 묘청은 서경으로의 천도를 추진했지만 개경파에 밀려 몰락했다.

#. 아래 내용은 6월에 출간된 '정변의 역사-확장판' 하이라이트 부분.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 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곱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中


... 서경 대화궁 건설은 서경파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줬다. 이들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한발 더 나아간 주장을 펼쳤다. 바로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나라 정벌이다. 칭제건원은 군주를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서경파의 일원이었던 동경지례사 서장관 최봉심은 "장사 1000명만 주면 금나라에 들어가 그 왕을 사로잡아 바칠 수 있다"라고도 공언했다.


... 개경파의 극렬한 반대가 지속되면서 서경파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들은 왕을 잇따라 만나 서경 천도의 필요성을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인종은 개경파를 의식해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경파는 인종이 다시금 자신들에게 동조해 줄 만한 방안을 강구했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각종 술책까지 부리는 무리수를 두게 됐다.


... 서경 천도의 꿈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 오랜 기간 공들여 추진했던 대업이 물거품이 되자, 인종과 개경파에 대한 서경파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급기야 서경파는 1135년 1월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서경파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반란을 모의했는지를 나타내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일사불란하게 반란을 일으키고 단기간에 주변 지역을 장악한 것을 보면, 사전에 반란을 어느 정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묘청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명명했다. 자신들의 군사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부르며 자주적인 독립 국가 건설을 선포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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