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의 역사-확장판 8] 제1차 왕자의 난 전말
...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이방원 등 한씨 소생 아들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유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와 산전수전을 함께 겪었는데,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소위 '죽 쒀서 개 준 꼴'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이들은 이성계의 지시로 마땅히 누려야 할 '공신록'(功臣錄)에 이름이 오르지도 못한 상태였다. 한씨 소생 아들들의 수모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끓는 불에 기름을 붓는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사병 혁파'다. 당시 왕자들은 개별적으로 '가별초'라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정도전은 이를 혁파해 중앙 정부가 모든 군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 세자 방석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게 왕자들의 사병이라고 봤다. 이를 반드시 빼앗아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 야망이 컸던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순순히 굴복할 수 없었다. 1398년 8월 25일, 마침내 이방원은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 다른 기록에 따르면 "거사 당시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한 기병이 가득 찼고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라고 나와있다. 이방원의 군사들은 우선 태조 이성계가 있는 궁궐을 겹겹이 에워싸 포위했다. 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성계가 절대로 궁궐 밖으로 나오지 말고 그 어떠한 것에도 관여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들이 아비에게 정면으로 칼을 들이댄 것이다. 뒤이어 거사의 핵심 목표인 정도전 제거에 나섰다.
... 한편 병석에 누워있다가 정변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천륜도 모르느냐"라며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핵심 측근들을 모두 잃고 노쇠해져 버린 왕이 어찌해 볼 도리는 없었다. 대세가 완전히 기운 것을 깨달은 이성계는 왕위를 내려놓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여담으로 이방원의 명을 받은 신료들이 이성계에게 '정도전, 남은 등이 역적이기 때문에 죽였다'라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하자, 이성계는 마지못해 서명한 뒤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는다"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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