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의 역사-확장판 9] 유교 국가 조선에서 금기시됐던 정변
... 이성계가 궁궐을 떠난 후 한동안의 시일이 지났다. 별안간 동북면에서 '조사의'라는 사람이 중심이 된 반란이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동북면은 이성계의 행차 목적지이기도 했다. 역사학계에선 이를 단순한 반란으로 보지 않는다. 조사의의 단독 반란이 아니라, 이성계와 조사의가 밀접히 교류했고 반란을 함께 도모했을 것으로 추정(거의 확신)하고 있다.
... 1402년, 마침내 이성계와 조사의가 거병했을 때 함경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가담했다. 함경도에서의 반란 소식을 접한 이방원과 조정 신료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반란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골머리를 앓았다. 그 실체란 바로 이성계의 가담 여부였다. 당초 조정에서는 이성계의 반란 가담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고 애써 부인하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여러 정황상 이성계의 가담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과 관군의 상대는 보통의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현 임금의 아버지이자 조선을 건국 한 백전무패의 맹장 '태조 이성계'였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5일 동안 별다른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 이후의 전황을 살펴보면 두 가지의 그림이 나올 수 있다. 하나는 추정을 제외한 채 정사에 기록된 흐름대로 전황을 살펴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추정을 곁들여 살펴보는 것이다. ... 이번엔 후자다. 친정에 나선 후 북쪽으로 진군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방원은 '원중포'라는 한 포구로 갔다. 이방원은 원중포에서 4일 동안 머물렀다. 이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방원은 원중포에서 4일을 머무른 후 북진은커녕 갑자기 개경으로 돌아가 버렸다.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마치 자신의 볼일은 끝났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전까지 기세등등했던 반란군이 이방원의 이 같은 움직임 이후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바로 여기서부터 '추정'이 개입된다. 조사의의 난 발발 직후 이방원이 급선무로 한 일은 이성계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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