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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Jun 28. 2024

아래로부터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다...'동학농민혁명'

[정변의 역사-확장판 15]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 전말

반봉건·반외세를 표방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 아래 내용은 6월에 출간된 '정변의 역사-확장판' 하이라이트 부분.


"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0~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관군 좌선봉장 이규태 증언 中


... 농민들은 조병갑의 전횡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당시 남접을 이끌었던 접주 '전봉준'을 앞세워 조병갑에게 세금을 낮춰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 요구를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은 (주모자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들의 이름을 적은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만들면서 비로소 봉기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동지들과 함께 조병갑 제거와 군기창 점령, 전주영 함락 등을 담은 구체적인 행동 강령들까지 제정했다. 마침내 전봉준과 농민들은 1894년 2월 봉기해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 드디어 '1차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라갔다. 이후 전봉준은 백산(현재 전북 부안)에서 동도대장으로 추대됐고 손화중과 김개남은 전봉준을 보좌하는 총관령이 됐다. 이들을 중심으로 비로소 농민군이 제대로 된 진용을 갖췄다. 이때 백산에 모인 농민군은 무려 8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 사관은 이 광경을 "앉으면 죽산(농민군이 앉으면 손에 든 죽창만 보이고), 서면 백산(다 일어나면 흰 옷 입은 사람만 보인다)"이라고 묘사했다. ... 초반에는 비교적 우수한 전력을 가진 중앙군이 우세한 듯했지만, 농민군은 사력을 다해 반격했고 전세는 차츰 농민군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중앙군은 농민군에 패배해 뿔뿔이 흩어졌다.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홍계훈의 경군이 있었던 전주성으로 쳐들어갔다. 예상외로 강력한 농민군에 놀란 전주성 내 관군들은 더 이상 전주성을 사수하지 않고 급히 도망쳤다. 이로써 1894년 4월 27일 농민군은 피를 흘리지 않고 전주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 당시 국내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텐진조약에 근거해 조선에 파병된 일본군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급기야 일본군이 무력을 동원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민비를 유폐시킨 '경복궁 쿠데타'가 발생했다. 분노한 김개남이 중심이 된 농민군 내 강경파들은 1894년 8월 말 남원에서 재봉기를 결의했다. 초반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전봉준도 9월 초 삼례에서 재봉기 했다. 이때 집강소를 통해 모여든 농민군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반외세, 항일로 대변되는 '2차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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