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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Oct 19. 2024

'태평양 전쟁'-미국의 압도적 공세, 필리핀 탈환전

[4]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

1944년 10월 20일, 레이테 섬 팔로 해변에 상륙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미군의 대반격

일본군은 과달카날 전투를 전후해 뉴기니 동남부에서도 패퇴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1943년 1월 초 뉴기니 부나 부근에 상륙해 일본군을 물리쳤다. 일본군은 서북방의 라에-살라마우아 지역으로 후퇴했다. 아울러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국, 호주 연합군 가운데 호주군이 다른 방면에서 일본 남태평양 파견군을 압박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라바울을 목표로 '솔로몬 제도'를 따라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부나 부근을 장악한 미군은 필리핀을 목표로 뉴기니 북쪽 해안을 따라 서진할 예정이었다. 다급해진 일본군은 제17군으로 중부 솔로몬 제도를, 신규 편성한 제18군으로 뉴기니를 방어하려 했다. 라바울에는 이 군대를 통할할 지휘부를 뒀다. 하지만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뉴기니 동남부를 잃은 상황에서, 나머지 뉴기니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 증강이 절실했다. 이에 대규모 수송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려 했다. 수송선 곁에는 호위 임무를 맡은 구축함과 제로센 전투기들이 있었다. 그런데 미군이 폭격기와 전투기 등으로 기습 공격을 퍼부어 수송선 8척과 구축함 4척이 격침됐고 제로센 6기도 격추됐다. 일본군은 내륙에 발도 디디지 못한 채 수장되거나, 바다에서 표류하다 적군에게 발각돼 사살됐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전사했으며 극히 소수의 병사들만이 간신히 생존해 라에-살라마우아에 도달했다. 이 수송 작전의 실패로 인해 일본군은 뉴기니 전선이 머지않아 붕괴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여기뿐만 아니라 중부 솔로몬 제도에서도 일본군의 맹점이 드러났다. 일본군이 방어선을 형성한 지역은 라바울과의 거리가 상당해 병력, 무기, 식량 지원 등을 받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제공권이 없는 상태에서 미군 항공기의 위협고스란히 노출됐다. 일본군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항공모함에 있는 일부 기들을 긴급 투입하는 '이호 작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제공권 확보는커녕,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항공 전력만 소모했다. 이때 전선을 시찰하던 야마모토가 전사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마침내 미군은 거대한 반격 계획인 '수레바퀴 작전'을 바탕으로 1943년 6월 말부터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전개했다. 이미 본토에서 쏟아진 막대한 물량으로 인해 객관적 전력 측면에서 절대 우위를 확보한 미군은 점진적으로 북상했다. 중부 솔로몬 제도의 랜도버 섬, 문다 섬, 베라베라 섬 등에 차례로 상륙한 뒤 방어 준비가 허술한 일본군을 손쉽게 격파했다. 여기를 지원하기 위해 해상에서 일본군 함정들이 오기도 했지만, 미군은 레이더와 우월한 항공 전력으로 궤멸시켰다. 비슷한 목적으로 날아온 빈약한 일본군 항공기들도 똑같은 운명을 맞았다. 10월 초에 접어들면서 중부 솔로몬 제도에 있는 대부분의 섬들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이에 일본군은 북부 솔로몬 제도에 있는 '부겐빌' 섬에 군대를 배치해 대응에 나섰다. 해당 군대는 나름 일본군의 주력이었으나, 미군이 11월 초 이곳에 상륙했을 때 이렇다 할 저항을 해보지 못하고 밀림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여기저기서 항공기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다.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지만, 양국 군의 항공 전력 격차가 확연히 드러났다.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 항공기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이쯤에서 미군과 일본군의 항공 전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쟁 초기만 해도 일본군의 항공 전력이 미군을 능가했다. 일본군의 주력 전투기인 '제로센'은 뛰어난 기동성과 긴 항속거리를 바탕으로 미군을 효과적으로 공략했다. 공중전에서 12대 1의 격추율을 선보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항공모함 기반 전투기라는 명성까지 얻었다. 미군 전투기인 '와일드 캣'의 성능은 뒤떨어져 제로센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미군의 신형 전투기인 'F6F 헬캣'이 등장했는데, 이는 튼튼한 기체에 더해 제로센의 장점인 기동성까지 겸비했다. F6F 헬캣은 제로센의 치명적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취약한 기체를 철저히 공략하면서 압도해 나갔다. 이후 성능이 더욱 향상된 '콜세어'까지 등장하면서 양국 군의 항공 전력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


미군이 부겐빌 섬의 공군 기지를 장악함에 따라 라바울이 폭격의 위협에 노출됐다. 일본군은 기지를 '트럭' 섬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접어들자, 미군은 라바울의 뉴브리튼 서쪽 끝에 있는 마커스 곶에 상륙했다. 이곳에 있던 일본군의 방어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1944년 2월에는 뉴브리튼 섬과 뉴기니 사이의 댐피어 해협을 돌파한 뒤 애드미럴티 제도에 상륙했다. 미군은 목표로 했던 라바울을 완전 포위했고, 지속적인 공습을 가하며 서서히 파괴했다. 솔로몬 제도 작전과 더불어 뉴기니에서도 미군은 파죽지세로 전개했다. 우선 라에-살라마우아 지역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일본군을 북쪽으로 쫓아냈다. 이어서 마커스 곶 공격에 발맞춰 댐피어 해협 서쪽의 핀 쉬하 펜에 상륙한 뒤, 밀림에서 넘어온 일본군을 격파했다. 뉴기니에서 전개하던 미군은 머지않아 중부 태평양 방면의 미군과 협력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공세력은 한층 강화됐다. 이후 미군은 일명 '개구리 뛰기 작전'으로 일본군 점령지를 차례차례 함락시켰다. 마침내 패잔 일본군을 밀림으로 몰아낸 뒤 뉴기니 북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제 필리핀을 본격적으로 넘볼 수 있게 됐다. 한편, 뉴기니 작전이 벌어질 때 중부 태평양 방면에서도 미 태평양 함대의 공세가 시작됐다. 남서 태평양과 달리 중부 태평양은 큰 바닷속에 산호초로 이뤄진 섬들이 산재해 있었다. 일본군은 신설 병단을 파견했고,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부 병력까지 데려와 방어에 나섰다. 미군이 우선적으로 공략한 곳은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 마킨 섬이었다. 여기서도 미군의 압도적 우위가 예상됐지만, 실상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타라와 베티 섬에서 양국 군의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미군은 이곳을 '마리아나 군도'로 진격하기 위한 중간 거점이자 폭격기들의 항공기지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이에 대규모 군함과 함재기들을 동원해 일본군에게 맹폭을 퍼부은 뒤 해병대를 상륙시켰다. 이번에는 일본군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전에 탄탄한 벙커와 토치카 등을 설치했고, 서로 연결된 참호까지 구축한 상태였다. 미군의 포격으로 방어 시설들이 어느 정도 파괴됐지만, 미 해병대를 상대할 역량은 남아있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전력을 얕잡아보고 상륙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매우 정확한 사격 및 포격으로 대응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군이 상륙 지점에 설치한 각종 장애물과 예상보다 낮은 수심이 미군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미군은 중장비와 탱크 등 우세한 전력으로 점차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지만, 일본군이 '한 명도 남김없이 싸우다 죽겠다'는 각오로 맹렬히 저항하면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이 난무했다. 미군은 해병대는 물론 군함과 곡사포 공격까지 가한 끝에 가까스로 일본군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총 5000명의 일본군은 거의 전멸했다. 미군도 3000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며 '상처뿐인 승리'를 거뒀다.


다음으로 미군은 마셜 제도를 급습해 일본군을 물리친데 이어 콰잘린 환초에도 상륙했다. 이때 미군이 궁극적으로 노린 것은 일본 해군의 진주만이라고 할 수 있는 트럭 섬이었다. 콰잘린과 애드미럴티 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 및 엔터프라이즈 등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트럭 섬에 있는 일본 해군 기지를 맹렬히 폭격했다. F6F 헬캣 등 미군 최신형 전투기들은 폭격기들이 안전하게 폭격할 수 있도록 일본군 전투기들을 대거 궤멸시켰다. 미군 잠수함과 수상함도 동원돼 일본군 구축함 등을 격침시키기도 했다. 이 공격으로 일본군은 300대에 달하는 항공기와 32척의 함선, 구축함 4척 등을 잃었다. 트럭 섬이 사실상 초토화되자, 일본군은 중부 태평양의 거점들을 버리고 필리핀과 팔라우로 퇴각했다. 전진 기지였던 라바울 등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더욱 고립됐다. 미군의 진격은 거침없이 지속됐다. 1944년 3월 말부터 팔라우 섬을 겨냥한 공세를 펼쳤다. 그 결과, 일본군 연합함대 대부분이 북쪽으로 쫓겨났고 항공기 약 200대, 함선 20척 등이 파괴됐다. 연합함대 사령관인 '고가 미네이치'는 공격이 거세질 때 가장 먼저 비행기로 탈출하다가 행방불명됐다. 한편, 앞서 일본 대본영은 어전회의를 통해 '절대방어권' 개념을 설정한 바 있었다. 중서부 태평양, 쿠릴, 오가사와라, 버마 등을 반드시 방어해야 할 지역으로 설정했다. 방어에 충실한 사이, 항공 전력을 대폭 증강해 반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동안의 대함거포주의에서 탈피하려는 조치였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일련의 전황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군은 도저히 개선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방어권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마셜 제도가 뚫린 것은 치명적이었다. (부차적인 지역에 속했던 알류샨 열도에서도 미군의 반격이 전개돼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이 함락됐다. 일본군은 알류샨 열도를 내주고 북방 방위선을 쿠릴 열도까지 후퇴시켰다.)


일본군의 패퇴가 나타난 곳은 태평양 전선만이 아니었다. '버마' 전선에서도 그랬다. 이 지역의 연합군(미군, 영국군, 중국군)은 1943년 말부터 북버마의 육로와 서부 해안에서 일본군에게 반격을 개시했다. 특히 중국군은 북버마의 후콩강 계곡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944년 3월, 영국군 공정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중국군은 이 지역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5월부터는 인도와 중국 간 연결 요충지 및 미치나를 포위 공격해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로써 북버마는 일본군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군은 윈난성의 노강 정면에서도 공세를 펼쳐 적군을 궤멸시켰다. 그런데 3월에 또 다른 지역에서 나타난 일본군의 해괴한 움직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도한 욕심의 산물이었던 버마 점령 직후부터,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영국령 '인도'까지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인도 전역에 대한 장악은 물론 영국군을 궁지에 몰아 연합군에서 이탈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전황이 갈수록 어려워짐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인도 진출 계획을 버리지 않았다. 기어이 악명 높은 '임팔 작전'이 시행됐다. 이는 일본군이 인도 안으로 진격해 임팔을 점령한 뒤, 중국과 인도 사이의 연결로를 차단해 인도 장악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까지 가는 길이 너무 험난했다. 고산지대와 정글이 계속 이어져서 차량 이동이 불가능했다. 더욱이 일본군 지휘관인 '무타구치 렌야'의 참담한 전략이 일본군을 수렁에 빠뜨렸다. 보급을 등한시한 그는 매우 적은 식량을 구비시킨 채 진격하게 했다. 제공권이 상실돼 공중 보급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식량이 떨어지면 길 가다가 풀을 뜯어먹거나 이것을 나르던 동물을 잡아먹으라고 했다. 여하튼 임팔에 당도만 하면, 모든 보급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실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막힌 전략이었다. 일본군은 선봉 부대의 고군분투로 4월 임팔을 포위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머지않아 연합군에게 반격을 허용했다. 이미 일본군은 크게 지쳐있었고 무기도 부족했다. 우기까지 찾아와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7월이 됐을 때, 일본군 선봉 부대가 렌야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퇴각하면서 임팔 작전은 어처구니없이 종결됐다.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5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버마 전선의 붕괴는 일본군 수뇌부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항공, 해상 전력이 기반이 되는 태평양 전선과 달리, 육상 전력이 기반이 되는 전장에선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과소평가했던 중국군이라는 점은 충격을 배가시켰다. 이에 일본군과 국민들의 사기는 끝없이 추락했다.


■마리아나 전역

미군은 이 즈음에 유럽 전선에서도 중대한 성과를 올렸다. 영국군과 함께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전개해 독일군을 수렁에 빠뜨렸다.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에 엄청난 군수물자까지 지원하며 '민주주의의 병기창'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기실 태평양과 유럽, 양면 전선에서 동시에 승리를 이끌어가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의 다음 목표는 마리아나 군도였다. 이곳을 통하면 일본 본토가 전방위로 폭격당할 수 있었기에, 미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일본군은 무려 1200대의 항공기를 마리아나 군도에 배치했다. 본토 등에서 날아온 항공기까지 동원해 미군과 격전을 벌인다는 '아호 작전'을 수립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치명적 결함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항공기 조종사들의 실력이 형편없었다. 유능한 조종사들은 이미 앞선 전투들에서 수없이 소멸한 상태였다. 일본군 지휘부의 오판도 있었다. 이들은 미군의 상륙이 아무리 빨라도 7월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 내다봤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미군은 6월 11일에 공세를 감행했다. 우선 막강한 항공 전력으로 아직 이륙하지도 못한 일본군 항공기들을 기습 파괴했다. 전함과 순양함을 통한 함포 사격도 이뤄져 일본군의 해안 방어를 크게 약화시켰다. 뒤이어 7만 명의 미군이 마리아나 군도의 핵심 섬인 '사이판'에 상륙을 시도했다. 극히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군은 해안 진지에서 거세게 저항했다. 야간에도 급습을 단행해 적군을 크게 괴롭혔다. 미군은 압도적 전력으로 교두보를 확보한 뒤 내륙 깊숙이 진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1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상륙 소식을 접한 일본군 함대가 부랴부랴 달려와 마리아나 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황국의 흥망이 전투에 달려있다"라고 선언하며, 항공모함과 기지 등에서 수많은 항공기들을 출격시켰다. 아호 작전의 전개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결함 등으로 인해 별다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미군 전투기들은 일본군 항공기들을 매우 손쉽게 격추해 나갔다. 전투에서 파괴된 일본군 항공기는 600대 이상이었다. 해상에서도 일본군은 궁지에 몰렸다. 미군 잠수함의 맹공으로 인해 일본군의 대표적 항공모함인 '다이호'와 쇼카쿠가 침몰했다. 다음날에는 또 다른 항공모함인 '히요'가 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이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군 함대가 궤멸되면서 사이판에 주둔한 일본군은 철저히 고립됐다. 이들은 사이판 중앙에 있는 타포차우 산으로 이동한 뒤 동굴을 활용해 저항했다. 사이판에 있는 전차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야간에 기습을 행하기도 했다. 동원된 전차들은 약 40대에 달했다. 미군은 조명탄을 발사해 전장을 환하게 밝힌 뒤, 적군 전차들을 순차적으로 격파했다. 이미 제공권 등이 미군에게 완전히 넘어간 이상, 일본군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7월 3일, 사이판 최대 도시인 가라판이 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최후의 수단으로, 일본군 잔존 병력 3000여 명이 6일 밤에 미군 진지로 반자이 돌격을 단행했지만 전멸하고 말았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 지휘관 사이토와 나구모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사이판의 일본군만 불행한 운명을 맞은 게 아니었다.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민간인'들도 그랬다. 사이판의 북쪽 절벽에서 5000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미군이 적극적으로 만류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전에 이들은 미군에게 투항하면 엄청난 치욕이 뒤따른다는 세뇌 교육을 받았었다.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군의 '전쟁 범죄'도 무수히 자행됐다.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은 연약한 아이와 여자, 노인들을 앞세워 미군에게 진격하기도 했다. 미군은 대응 사격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자살을 하지 않으려는 민간인들을 총이나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여하간 처참함을 뒤로하고 사이판을 점령미군은 'B-29 폭격기'로 일본 본토를 마음껏 폭격할 있게 됐다. 


사이판 전투에 이어 마리아나 군도에서 가장 큰 섬인 '괌' 탈환전도 전개됐다. 미군은 7월 21일 두 개의 지점에 상륙했다. 각각의 미군은 남쪽과 북쪽에서 진격해 합류할 예정이었다. 해안에 있던 일본군은 기관총과 야포 등으로 저항했지만, 전력 차가 워낙 커서 조만간 무너졌다. 미군은 파죽지세로 내륙으로 진격했고 24일 두 방면의 미군이 연결됐다. 나아가 괌의 서해안 중남부에 있는 고지인 '오르테' 반도를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을 반드시 점령하려 했다. 다만 위험부담이 큰 정면 대신 우회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전차까지 동원한 미군에게 서서히 뚫리기 시작했다. 결국 오르테 반도를 비롯한 괌 남부가 미군에게 함락됐다. 미군은 괌 북부에 대한 공세도 전개, 수도인 아가나, 바리가다, 이고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일본군은 북부 산의 동굴진지로 들어가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전멸이란 비운을 피할 수 없었다. 약 2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괌 전투에서 소멸됐다. 잇따른 승전으로 미군은 태평양 전쟁 지휘부를 하와이에서 괌으로 옮길 수 있었다. 괌은 일본 본토와 필리핀을 겨냥하는 미군의 전력이 총체적으로 응집되는 곳이 될 터였다. 이처럼 마리아나 군도에서 일본군이 완전한 패배를 경험할 즈음, 일본 정부 내부도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반 도조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전쟁을 주도했던 도조 히데키 내각이 흔들렸다. 도조는 내각 개편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지만, 도조 내각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증폭됐다. (이 와중에 전임 총리였던 고노에는 도조 내각이 끝까지 존속돼 도조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중신들은 히라누마 저택에서 회합을 가진 뒤, 도조 내각 퇴진과 거국일치 내각의 출범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도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내각 총사퇴를 하기로 결정했다. 한때 '도조 막부'라고 불리며 사실상 독재 체제를 구축했던 도조 내각은 국민들의 거센 지탄을 받으며 초라하게 물러났다. 도조와 그의 각료들은 추후 '전범'으로써 군사 재판에 회부될 것이었다.


■필리핀 탈환전

미군은 필리핀으로 진격하기 전, '펠렐리우'라는 섬에 주목했다. 여기에 있는 비행장 등이 장애요소라고 판단한 미군은 1944년 9월 펠렐리우 여러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상륙 작전을 펼쳤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만만치 않은 저항이 뒤따랐다. 요새화된 벙커에 잠복해 있던 일본군이 나타나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다. 병사들의 희생도 컸지만 상륙주정이 극심하게 파괴됐다. 다른 지역에선 대체로 파죽지세로 진격했던 미군이 이곳에선 초반에 눈에 띄는 진격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해변 중앙부에 상륙한 미군 등이 적군의 거센 저항을 뚫고 비행장에 접근했다. 비행장에서도 미군은 큰 고초를 겪었다. 엄폐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가해지는 일본군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미군은 파괴된 탱크와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 등을 엄폐물로 삼아 끈질기게 진격했다. 가까스로 비행장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병사들의 희생이 막심했다. 게다가 무더위와 식수 부족 등의 악재까지 겹치면서 피해는 더욱 가중됐다. 그럼에도 미군은 비행장에 이어 펠렐리우의 남쪽과 동쪽 등을 점령하며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다. 끝으로 '피투성이 코 능선'에 대한 공세가 펼쳐졌다. 미군은 이곳에 함포와 '네이팜탄'을 쐈고 해병대를 진격시켰다. 여기서도 미군에게 재앙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미군이 좁은 공격로를 통해 진격할 때, 땅굴 속에 숨어있던 일본군이 갑자기 튀어나와 반자이 돌격을 단행했다. 이러한 공격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둬 미군 병사들이 수없이 죽어나갔다. 일본군 저격수들도 맹활약을 펼쳐 미군을 난관에 빠뜨렸다. 일본군은 미군이 네이팜탄 및 함포 공격을 가할 땐, 땅굴 깊숙이 숨어들어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해병대의 희생이 너무 커지자, 미군은 해병대를 철수시킨 뒤 대규모 육군 병력을 잇따라 투입해 공격에 나섰다. 미군은 1개월 넘게 지난한 공세를 이어간 끝에, 능선을 겨우 점령할 수 있었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할복 자살했고 잔존 일본군들은 무의미한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다 전멸했다. 3개월 간의 펠렐리우 전투에서 미군은 1만 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기실 펠렐리우가 갖는 전략적 가치에 비해 미군의 희생이 과도하게 나온 셈이었다.


10월, 드디어 필리핀 탈환전이 전개됐다. 미군은 우선 약 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레이테' 섬을 공격,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과거 "반드시 돌아오겠다"라고 말했던 맥아더가 총지휘관이었다. 이때 일본군은 미군의 레이테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 총력전을 펼치려 했다. 이에 인류 전쟁사 최대 규모의 해전인 '레이테 만 해전'이 발발했다. 미군과 일본군 모두 최신형 거함들을 대거 동원했다. 기실 객관적인 함대 전력상 미군이 절대 우위에 있었다. 미군은 정규 항공모함 8척, 경 공모함 8척, 호위 항공모함 18척, 전함 12척, 구축함 99척, 항공기 약 15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정규 항공모함 1척, 경 항공모함 3척, 전함 9척, 구축함 35척, 항공기 약 300대였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과거 쓰시마 해전 때처럼 일종의 '도박'을 해보려 했다. 함대를 4개로 나눠 미군을 뚫고 레이테에 도달하는 게 당면 목표였다. 우선 오자와 함대가 필리핀 동부의 외곽 지역에서 미군 함대를 유인하고, 그 사이에 주력인 '구리타'의 함대가 필리핀 중부 해역을 가로질러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한 뒤 레이테로 진입하려 했다. 시마와 니시무라 함대는 서쪽에서 구리타 함대를 뒷받침할 계획이었다. 일본군의 공세 주력은 전함인 '무사시', '야마토', '나가토' 등이었다. 이에 미군은 '윌리엄 홀시' 중장이 지휘하는 제3 함대가 바깥 지역을 방어하고, 토마스 킨케이드 소장이 지휘하는 제7 함대는 레이테 주변에서 대응하기로 했다. 23일 구리타 함대가 주력 전함을 앞세우고 브루나이에서 출격했다. 그런데 진격로인 팔라완 섬을 통과하던 중 미군 잠수함이 나타나 기함인 아타고와 마야함 등에 치명상을 입혔다. 기함의 충격으로 구리타 함대는 나머지 함대와 긴밀히 통신하는 게 어려워졌다. 일본군은 작전 초반부터 스텝이 꼬인 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4일 필리핀 중부 해역에 도달하긴 했지만 더 큰 타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수함으로부터 구리타 함대의 전개를 보고받은 미군 지휘부는 즉각 항공모함에서 함재기를 출격시켜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이 과정에서 전함 무사시가 집중포화에 노출돼 침몰했다. 구리타 함대는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홀시의 미군은 이 후퇴를 완전 후퇴로 오판해 산베르나르디노 해협 방어를 완화시켰다. 뒤이어 외곽에 있던 오자와 함대를 치기 위해 움직였다. 오자와 함대는 미군 함대를 유인하려다 구리타 함대의 퇴각 소식을 접한 뒤 더 이상 유인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 회항하던 중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군에게 포착됐고, 곧바로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에 있던 미군 함대가 오자와 함대를 추격했다. 이 틈을 타 구리타 함대는 해협을 가볍게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니시무라 함대가 수리가오 해협 돌파를 시도했다. 이들 앞에 있는 것은 전함과 순양함 등으로 촘촘하게 형성된 강력한 미군 방어선이었다. 일본군 함대는 적군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돌진했고, 결과는 절망적인 참패였다. 미군은 무자비한 함포 사격, 어뢰 공격, 공중 폭격을 퍼부었다. 함대는 궤멸됐고 수많은 병사들과 더불어 사령관인 니시무라가 전사했다. 니시무라 함대를 뒤쫓아오던 시마 함대는 겁을 먹고 도망쳤다. 회항하던 오자와 함대도 위기에 처했다. 25일, 홀시의 미군 함대는 오자와 함대를 치기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근접했을 때, 미군은 200기에 달하는 함재기들을 출격시켜 공격을 가했다. 방어 전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오자와 함대는 순식간에 궤멸됐다. 이 과정에서 진주만 공습에도 참여한 바 있던 경 항공모함 즈이카쿠 등이 침몰했다. 한편, 운 좋게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한 구리타 함대는 레이테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사마르 섬 앞바다를 지나갈 무렵, 별안간 소수의 미군 항공모함 전대가 출현했다. 이들은 수리가오 해협 방어에 참가했던 전력이기도 했다. (일본군은 이것이 미군의 주력이라고 오판했다.) 구리타 함대가 우세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에, 당초 미군 전대는 후퇴하려 했다. 하지만 후퇴 요청이 불허되자 지원 병력이 오기 전까지 버티는 전략을 구사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국지성 호우 지역에 머무르면서 함재기들을 출격시켜 공격도 했다. 일본군은 호우 지역에 있는 미군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성공적인 임기응변으로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할 즈음, 구축함인 'USS 존스턴'이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구리타 함대에 돌진했다. 이에 힘입어 나머지 구축함들도 용기를 내 적진에 돌진했다. 객관적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비록 존스턴 등이 격침되는 불행이 뒤따랐으나, 구리타 함대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당황한 구리타는 의지가 약해졌다. 조만간 미군의 지원군이 올 수 있다는 판단도 했다. 아직 예정대로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전투를 치르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그는 의문의 '구리타 턴'을 함으로써 전장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로써 일본군의 레이테 진입 작전은 막대한 손실만 남긴 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일본군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전함 3척, 항공모함 4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11척, 잠수함 4척을 한꺼번에 상실했다. 이번에도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함포 사격을 위주로 적군에 맞서는 무리수를 두다가 참패를 당했다. 그런데 이 해전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자살 공격인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현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자살 공격용 항공기인 '오카'를 생산해 조종사를 탑승시켰다. 폭격기에 오카를 장착한 뒤, 적군 함정이 가까워지면 오카를 발사했다. 즉 인간이 탄 유도탄 미사일이었던 셈이다. 오카는 항속 거리는 짧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를 갖췄던 만큼, 미군을 상당히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일본군은 도대체 왜 이런 비인간적인 전투 방식까지 동원했을까.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미국 군함에 도착하기도 전에 격추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일본군에는 미숙련 조종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실력으로는 항공모함에서 이착륙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숙련된 조종사로 거듭나게 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던 만큼, 차라리 출격해서 일왕을 위해 몸 바쳐 죽으라는 의도가 있었다.


한편, 레이테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사령부가 있는 오르모크 항구를 목표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야간에 전차 등을 동원해 반격을 가하면서 미군에 일정 부분 타격을 줬다. 또한 지속적인 증원(도합 5만 명)을 통해 저항력을 키웠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브라우엔 비행장, 오르모크 동쪽의 리몬 언덕 등에서 일본군은 궤멸됐다. 12월에 오르모크가 미군에 의해 함락됐고, 레이테 북서쪽의 팔롬폰 등도 넘어가면서 미군은 레이테 전체를 장악했다. 다만 일본군 잔존 병력이 산속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이들을 소탕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레이테 점령 직후에 민도르 섬까지 함락시키면서 미군의 '루손' 섬 공략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도 루손에 위치했다. (미군 일각에선 레이테를 점령해 일본 본토와 남방 간 연결로를 끊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시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맥아더가 정치적 이유에 근거해 굳이 루손 공략을 고집하면서 시작됐다는 설이 있다.) 일본군은 레이테에 병력을 많이 보냈었기 때문에 루손에서의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이에 산악지대를 활용해 지구전 등을 펼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45년 1월이 됐을 때, 미군 항공기들의 엄청난 폭격과 군함들의 함포 사격이 단행됐다. 일본군의 해안 진지는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이 직후에 17만 명이 넘는 미군 병력이 루손 섬의 링가엔 만에 상륙했다. 일부 미군 병력은 마닐라 탈환을 목표로 먼저 남부 방면으로 직행했다. 일본군은 야간에 전차 등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고 산 마누엘에서 격파됐다. 뒤이어 비행장이 많은 클라크 지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사전에 일본군은 방어 진지를 구축해 놓은 상태였으나, 미군의 압도적 공세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탓텐버그 비행장에 성조기가 올라가면서 미군의 클라크 장악이 이뤄졌다. 다음으로 미군이 향한 곳은 마닐라였다. 앞서 링가엔 만에서 진격한 미군과 사방에서 낙하한 미군 공수부대가 가세했다. 2월 초부터 마닐라 안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1개월가량 전투가 지속되면서 마닐라는 폐허가 됐고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일본군은 무고한 시민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거나 가솔린으로 불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난징 대학살'을 잇는 또 하나의 심각한 전쟁 범죄였다. 마닐라 시가전으로 일본군은 1만 명 넘는 병력이 전사했고, 미군도 6000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은 3월 초 마닐라를 탈환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군은 바탄 반도와 코레히도르 섬을 겨냥한 공세도 전개, 비교적 경미한 피해만을 입고 모조리 점령했다.)


마닐라가 함락된 후, 루손 섬에 있던 일부 일본군은 남부 연안으로 이동해 지구전에 돌입했다. 대부분이 비전투 병과로 구성됐지만 나름 격렬히 저항했다. 미군 지휘관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도 올렸으며, 궤멸적 타격을 당한 후에도 일부 병사들이 고산 지대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이들은 8월에 태평양 전쟁이 종결된 줄도 모르고 저항을 이어가다가 항복했다. 남부 지구 전투에서 10만 명 넘는 일본군 병력 가운데 4분의 3이 전사했고, 나머지는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었다. 루손 섬 북부에서도 일본군은 가열하게 저항했다. 약 15만 명에 달했던 이들은 산악지대(바기오, 카가얀 협곡)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바기오를 겨냥한 미군은 정면 공격이 여의치 않자 우회 공격과 협공을 전개했다. 이에 힘입어 4월 말에 바기오를 함락시켰다. 카가얀 협곡 등에서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미군은 전투뿐만 아니라 전염병이라는 비전투 요인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은 잔존 일본군 후방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뒤 위아래에서 협공을 가했다. 소규모로 분산된 일본군은 산이나 정글 속으로 도망쳤다. 이곳에서 아무런 보급을 받지 못한 채, 끔찍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식인하는 현지 원주민들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부처럼 북부에서도 태평양 전쟁이 종결된 것을 곧바로 알지 못한 일본군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여하튼 루손 섬을 장악한 미군은 목표로 했던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했다. 필리핀에 미군의 항공 전력이 대거 들어서면서 일본군의 수송길은 철저히 차단됐다. 필리핀 탈환전으로 총 32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 병력이 소멸됐고, 해상 및 공중 전력도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다. 이제 일본 본토가 미군의 주요 표적이 됐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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