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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Oct 31. 2024

'한국 전쟁'-분단 체제 성립, 공산권의 적화 야욕

[1] 냉전 시대 최악의 열전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한국 전쟁'은 공산 진영의 세 거두가 합의해 발발한 국제 전쟁이었다.

■분단 체제 성립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대일전을 선포한 소련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만주에 있는 일본 관동군을 순식간에 제압한데 이어 한반도 이북 지역까지 쳐들어갔다. 일본이 항복한 뒤인 1945년 8월 24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을 점령했고, 얼마 안 가 북한 전 지역이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소련군은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가져왔다'는 구호가 적힌 포스터를 곳곳에 붙이며 대대적인 선전전을 펼쳤다. 북한 주민들은 소련군을 일본군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준 '해방군'으로 인식했다. 이에 소련군에게 꽃다발 등을 선사하며 열렬히 환영했다. (소련군 일각에선 만행도 발생했다. 식량 약탈과 여염집 여인들에 대한 겁탈 등이 자행됐다. 보다 못한 한 노인이 "내 재산을 모두 줄 테니 조선 여인들을 건드리지 말라"라고 호소한 기록도 있다.) 조만간 평안남도 도청에 치스차코프 대장을 정점으로 하는 군사정부가 수립됐다. 소련은 북한의 지도자를 물색해 나갔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를만한 인물을 선호했다. 그 결과 소련군 장교로 활동한 바 있는 젊은 '김일성'이 간택됐다. 당시 북한에서 명망이 있던 민족주의자 조만식은 일찌감치 배제됐다. 남쪽에서 비교적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조선의 레닌' 박헌영은 소련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여겨져 배제됐다. 김일성은 북조선 공산당 책임비서로 임명된 후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한편 미군은 9월 4일이 돼서야 인천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왔다. 원래 일본에만 집중했던 미군은 남한에서 군정과 관련한 명확한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혼란상은 필연이었다. 우익은 물론 좌익 세력도 난립하며 곳곳에서 충돌과 갈등이 빚어졌다.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이 모여 중대한 합의를 봤다.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열강들이 이를 돕기 위해 최대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남한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탁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신탁통치를 새로운 식민지배로 간주했다.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은 초반엔 반탁 운동을 펼치다가, 소련의 지령을 받은 뒤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섰다. 시간이 갈수록 남한에서의 이념적 분열상이 극도로 고조됐다. 이런 가운데 1946년 3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됐다. 한반도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방식과 관련한 논의가 전개됐다. 여기서 미국과 소련은 의견 차이만 표출했다. 미국은 신탁통치 찬반 세력 모두를 임시정부 구성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 찬성 세력만 포함시키자고 했다. 미국은 찬반 세력 모두를 포함시켜야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부를 만들 수 있었고, 소련은 찬성 세력만 포함시켜야 유리한 정부를 만들 수 있었다. 1947년에도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대립만 반복하다가 결렬됐다. 미국은 한반도 정부 구성 문제를 '유엔'(국제연합)에 넘겨 해결하려고 했다. 11월에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결성하고, 이 기구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결의가 도출됐다. 소련은 애초부터 유엔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유엔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여겼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북한 총선거가 실시될 경우, 북 측이 인구수 등에서 불리한 만큼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 확신했다. 이에 1948년 북한으로 들어가려는 위원단을 돌려세웠다.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하자고 결의했다. 결국 5월에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지역에서 자유 총선거가 실시됐고, 8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제3차 유엔총회는 이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기다렸다는 듯, 북한에서도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통해 9월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 국가들은 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과 북이 별도로 정부를 세움에 따라 '분단'이 공식화됐다. 이때부터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아되기 시작했다.


■공산권의 적화 야욕

북한은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정규군을 창설했다. 1946년 7월, 소련의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 등을 모스크바로 초청한 뒤 소련군 지원 하에 군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후 무력 집단의 개편 등을 거쳐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을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정부 수립 직후에는 인민군 총사령부를 민족보위성으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소련군은 북한군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마자 철수를 단행했다. 철수할 때 적지 않은 군수물자를 넘겨줌으로써 북한군 전력 증강에 보탬이 됐다. 기실 소련군 철수는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를 암묵적으로 압박한 셈이었다. 한국은 공산 세력의 준동을 우려해 미군 주둔을 계속 요청했지만, 소련군의 모습을 본 미군은 점차 철수 쪽으로 기울었다. 어느덧, 북한에서의 권력 장악을 공고히 한 김일성은 1949년 3월부터 전쟁을 염두에 둔 행보를 보였다. 내부적으로는 군 병력충원제도를 지원제에서 징병제로 변경하며 전시 동원체제를 갖췄다. 외부적으로는 극비리에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을 만나 한반도 무력 통일 계획을 제시했다.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상황으로 때, 우리가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할 필요가 있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남조선 반동 세력은 평화통일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다. 우리 군대는 남한의 군대보다 훨씬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남한 내에서 강력히 일고 있는 게릴라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김일성의 계획에 스탈린은 의외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북쪽이 먼저 남침해서는 안 된다"라고 잘라 말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북한 인민군은 남조선 군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둘째, 남한에는 아직도 미군이 있다. 적대 관계가 형성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다. 셋째, 38선에 관한 미소 협정이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 측이 먼저 협정을 파기한다면, 그것은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에 김일성은 크게 낙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가까운 장래에 한반도를 통일할 기회가 없다는 뜻인가? 우리 인민들은 다시 하나가 되고 싶어 하고, 반동 정권과 미국 상전들의 멍에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하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스탈린은 "적이 침략 의도를 갖고 있다면 조만간 침략해 올 것이다. 그들이 공격해 오면 반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때 반격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지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노련한 스탈린은 당초엔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반대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움직임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머지않아 스탈린의 마음을 180도 바꾸게 만드는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우선 '주한미군이 철수'했다. 1949년 6월 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철수를 완료했다. '소련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스파이들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원폭 관련 정보를 빼내는 데 성공했고, 이에 기반해 8월 카자흐스탄 사막에서 원폭 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 이제 소련은 비대칭 전력에 있어 미국과 동등한 수준에 이르렀다. 전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중국이 공산화'됐다. 장제스의 국민당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탁월한 전략 전술로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끝으로 '애치슨 선언'이 나왔다.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했다.


애치슨 선언이 나온 연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을 안보상 중요한 지역으로 여기지 않았다. 유럽이나 일본, 남미를 훨씬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한 것도 안보상 더 중요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군대를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 공군이 탄생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태평양 전쟁 등을 거치며 미국은 제공권 장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자연스레 공군이 정식으로 창설됐고, 안보 관련 방위선에서 항공기가 수월하게 뜰 수 있는 지역이 중시됐다. 한국은 험준한 산악 지형이 많아 전략적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별안간 전쟁의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2월,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과 여러 정세를 협의한 뒤 김일성에게 남침과 관련한 전향적인 전문을 발송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다시 모스크바를 극비리에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국제 환경과 국내 상황이 모두 '조선통일'에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엘리트 공격사단을 창설하고 추가 부대 창설을 서둘러야 한다. 사단의 무기 보유를 늘리고 이동 전투수단을 기계화해야 한다. 이와 관련된 귀하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겠다. 그런 연후에 상세한 공격 계획이 수립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구체적인 작전도 지시했다. 38도선 가까이 있는 특정지역에 병력 집결, 북조선 당국이 평화통일에 관한 새로운 제의를 계속 내놓을 것, 상대가 평화제의를 거부한 뒤 기습공격을 가할 것 등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옹진반도 점령 계획에 동의했으며,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한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선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전쟁의 책임을 교묘히 떠넘기는 듯한 태도도 보였다. 마오쩌둥에게 가서 전쟁 '동의' 및 병력 지원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필수적인 사항이라고 첨언했다. 여전히 스탈린은 미국을 의식해 소련이 전면에 나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면서 마오쩌둥의 중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김일성은 곧바로 마오쩌둥에게 달려가 전쟁 계획을 알리고 동의 및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마오쩌둥의 심정은 대단히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혈전이었던 '국공 내전'이 이제 막 종결됐는데, 또다시 전쟁에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상대가 미국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부담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고심 끝에 "미군이 참전하면 병력을 파견해 필요한 지원을 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 국제 공산진영의 수장이었던 스탈린의 암묵적 압박이 있었고, 북한이 건재해야 중국도 무사할 수 있다는 판단이 앞섰다. 결국 한국 전쟁은 김일성이 추진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동의함에 따라 발발한 것이었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북한군은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으로부터 다량의 군수 물자들이 반입됐으며, 최정예라고 평가되는 한인계 중공군 약 5만 명이 북한군에 편입됐다. 몽골 인민공화국으로부터 군마 7000필을 지원받기도 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북한군의 전력은 눈에 띄게 강화됐다. 당시 북한군의 주요 전력을 살펴보면 전차 242대, 항공기 211대, 장갑차 54대, 박격포 2318문, 대전차포 550문, 자주포 및 곡사포 728문 등이었다. 북한군 10개 사단 약 13만 명이 전방에 배치됐고, 후방에 10만 명의 예비군까지 조직됐다. 반면 한국군의 전력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전차와 전투기는 아예 부재했으며 곡사포, 박격포, 장갑차 등은 북한군에 비해 극히 적었다. 병력은 예비군 없이 약 10만 명이었는데, 절반 가까이가 공산 게릴라군 소탕을 위해 38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배치됐다.


북한군은 남침 전까지 '국지도발'을 끊임없이 감행했다. 개성, 옹진, 춘천 등지에서 국지적 전투가 지속됐다. 특히 개성 일대에서는 2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통해 북한군은 사실상 '전쟁 훈련'을 한 셈이었다. 인민유격대를 후방에 침투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험준한 산악지형에 잠입해 각종 공작을 펼쳤다. 한국군은 북한 유격대를 소탕하느라 진땀을 뺐다. 북한이 도발만 한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의 지시를 받들어 '위장 평화 공세'도 펼쳤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제안하거나 체포된 북한 간첩과 조만식의 교환을 떠보기도 했다. 앞에서 교란 작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뒤에선 북한군의 '선제타격계획'이 도출됐다. 이는 소련의 바실리예프 군사고문단장과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이 공동으로 작성했으며, 총 3단계로 이뤄졌다. 1단계는 주공과 조공으로 구분, 주공은 서울 북쪽에서 직접 압박을 가하고 조공은 춘천-양구에서 원주-수원 방면으로 진격해 궁극적으로 서울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2단계는 한국에서의 봉기 상황을 고려하며 4개 축선을 따라 군산-대전-대구-포항까지 조속히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3단계는 목포-여수-마산-부산을 연하는 선까지 진격, 미군 증원 이전에 한국 전 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스탈린의 최종 승인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1950년 '6월 25일'이 개전일로 확정됐다. 기습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25일 새벽 4시에 전면 공세가 이뤄질 터였다. 뒤이어 '사단급 부대 기동연습'이란 미명 하에 '남침을 위한 부대이동 명령'이 하달됐다. 대규모 북한군이 38선 상에 속속 집결했다. 민족보위성은 적정 파악을 위한 '정찰명령 제1호'에 이어, 마침내 공격명령인 '전투명령 제1호'를 전 군에 발령했다.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에도 한국군의 대비 태세는 매우 허술했다. 23일, 한국군은 45일 간 지속됐던 경계령을 해제했다. 장병들의 피로도를 고려한 조치였다. 나아가 수많은 장병들이 휴가나 외출을 떠났다. 지휘관들은 전쟁 전날 한가하게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장교 클럽 개관식에 참석했다. 사실상 방조나 다름없는 행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거대한 '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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