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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Oct 25. 2024

'태평양 전쟁'-일본 본토 폭격, 원자폭탄 투하

[5]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

히로시마 원폭 사흘 뒤인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있다. 세간에서는 이를 '분노한 신의 강림'이라고 표현했다.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역

일본은 1945년 초에 '결승비상조치요강'을 결정한 바 있다. 이른바 '본토 결전'과 '국체 보호유지' 구상이었다. 국토방위를 위해 국민조직을 재편성하고 총무장을 단행할 것, 국가가 중요생산 및 교통수송을 관리할 것, 국가의 통제가 말단까지 미치도록 만전을 기할 것 등이 담겼다. 국가정책과 작전의 일체화, 일본 만주 중국의 일체화 등도 표방했다. 사실상 일왕과 소수의 지배층만을 위해 국민들의 막대한 희생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울러 일본군은 미군의 다음 공격 방향을 예의주시했다. 적군이 오가사와라 제도로 상륙한 뒤 오키나와나 타이완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번에도 틀렸다. 미군은 오가사와라 제도 남쪽의 '이오지마'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곳은 대본영이 본토 방위의 한 축으로 간주한 지역이기도 했다. 미군은 이오지마의 크기가 작았던 만큼, 일본군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저항도 강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이오지마에는 사이판으로 가려다가 못 가고, 부득이 이곳으로 이동해 온 일본군이 적지 않게 있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사력을 다해 땅굴 진지를 만들었으며, 섬 전체의 '요새화'를 도모했다. 이를 활용해 지구전 출혈 전술을 구사할 계획을 세웠다. 미군은 1945년 2월 16일부터 B-29 폭격기를 통한 공중 폭격과 함포 사격을 이오지마에 퍼부었다. 19일에는 전차 200대 이상을 갖춘 1만여 명의 미군이 상륙했다. 이 직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해안가에 상륙한 미군의 발과 장비가 푹푹 빠지면서 난관에 처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미군은 조금씩 전진해 해안가를 벗어났다. 이전과 달리 상륙지점에서의 일본군 공격은 없었다. 미군은 예상한 대로 적군의 규모가 크지 않다며 방심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미군이 좀 더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근접하자 맹렬한 공격이 가해졌다. 수많은 미군 병사들이 동굴 벙커에서 행해지는 기관총과 포 사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면서 속절없이 쓰러져 나갔다. 예상 밖의 전개에 미군은 심히 당황하며 혼란스러워했다.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은 미군이 일본군 진영에 포를 쏘면서 반격에 나섰다. 다행히 탄약이 부족했던 일본군의 공세가 점차 무뎌지면서 미군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이들은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가 일본군 벙커와 땅굴 진지를 공격했다. 특히 '화염 방사기'를 동원해 벙커 등에 있던 일본군을 불태워 죽였다. 일본군은 착검을 한 채로 반자이 돌격을 하는 등의 무리수를 뒀지만 얼마 못 가 무력화됐다. 미군은 방어하던 일본군을 포로로 받지 않고 남김없이 사살하려 했다. 거짓 항복에 대한 악몽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본군도 투항보단 자결을 선택했다.


초반의 어려움을 딛고 미군은 더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여기서도 전황이 순조롭지 않았다. 일본군이 섬 곳곳에 구축해 놓은 방어선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군은 타나만 산을 공격했다가 거센 반격에 직면해 졸지에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상술했듯 요새화된 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미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총동원해 기어이 적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나갔다. 3월 2일, 주요 진지가 있는 모토야마와 비행장 등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후 소수의 일본군이 최후의 반자이 돌격과 유격전을 단행했으나 이마저도 미군에게 격퇴됐다. 미군이 1주일이면 끝날 것이라 예상했던 이오지마 전투는 1개월 넘게 지속된 후 종결됐다. 일본군 못지않게 미군의 피해가 극심했다. 7000명에 육박하는 병력이 전사했고 부상자는 약 2만 명에 달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피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국민들도 큰 충격에 빠졌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여담으로 미군 병사들이 이오지마에서 가장 높은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아버지의 깃발'이라는 제목의 해당 사진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결정적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오지마에 이어 거대한 섬인 '오키나와'가 미군의 표적이 됐다. 오키나와는 앞서 1944년 10월 10일에 강력한 폭격을 맞은 바 있다. 미군은 오키나와 작전 이전에 여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해군 및 방공 전력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또한 상륙군의 후방을 보호하기 위해 오키나와 인근에 있는 게라마 열도를 먼저 공격하기도 했다. 1945년 4월 1일이 되자, 오키나와를 겨냥한 미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전개됐다. 일본군은 이번에도 상륙지점에서 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내륙에 있는 석회동굴 진지와 슈리성 등에 틀어박혀 끈질기게 지구전을 펼쳤다. 해당 진지들은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미군의 고전이 예상됐다. 그런데 이오지마에서의 학습 효과가 있었던 미군은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우선 병력(18만 3000명)과 화염방사기 등을 대량으로 투입했다. 그런 다음 한 전선에서 사단급 부대가 교대로 돌아가면서 공세를 펼쳤다. 한 부대가 공세를 가하다가 지치거나 피해가 커지면 다른 부대가 와서 교대하고, 얼마 뒤에 또 다른 부대가 와서 바꿔주는 전술이었다. 이를 통해 미군은 오키나와 북부와 남부 지역에서 일본군 진지를 격파해 나갔다. 결국 6월 17일에 일본군의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해졌고 사령관과 참모장 등이 할복 자살하면서 오키나와 전투가 종결됐다. 이오지마보다 훨씬 큰 면적을 갖고 있는 오키나와였으나, 전투 기간은 약 3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특기할 만한 점은 여기서도 여과 없이 발휘된 일본군의 잔인성이었다. 이들은 17세부터 45세까지의 오키나와 남자들을 모두 징용했고, 여학생들까지 끌어들여 '히메유리 부대'를 창설했다. 투항하려는 자들은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자살을 강요했다. 섬 주민들을 대거 총알받이로 만든 결과, 무려 15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희생이 유발됐다. 일본군 전사자도 약 9만 명에 이르렀다.


한편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 해군의 참담한 노력이 있었다. 해안가에 있는 미군 함대에 가미카제 공격을 가하는, 일명 '기쿠스이 작전'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군 함정들을 노출시켜 미군 항공기들을 유인한 다음, 항공기의 호위가 부족한 항공모함 등에 자살 공격을 가해 격침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미군 함정 26척이 침몰했164척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일본군이 이때의 미군을 감당하기란 심히 역부족이었다. 항공모함만 해도 수십 척에 달하는 등 막대한 물량으로 중무장한 미군에게,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공세는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더욱이 기쿠스이 작전 과정에서 핵심 전함인 '야마토'를 사실상 미군에게 헌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해안 모래밭에 야마토를 좌초시켜 '고정포대'로 삼음으로써 미군에게 타격을 가하려 했다. 이에 구축함 몇 척과 함께 적진으로 출격시켰다. 항공기의 엄호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머지않아 야마토는 미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됐다. 야마토의 좌현에 집중 공격이 가해졌고, 내부의 탄약고 등에서 연쇄폭발이 발생했다. 일본 해군의 자랑이었던 야마토는 커다란 폭음과 버섯구름을 유발한 뒤 침몰하고 말았다. 3000명 넘는 병사들도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야마토의 격침은 일본 연합함대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토 결전 체제와 원폭 투하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본격적인 공습이 개시됐다. 1945년 3월 9일 야간, 도쿄 시민들의 머리 위로 미군의 B-29 폭격기 300여 대가 나타났다. 도쿄 전역에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잠자던 도쿄 시민들은 별안간 사지로 내몰리게 됐다. 미군이 굳이 야간에 작전을 시행한 것은 이때 일본군의 대공방어가 취약했기 때문이다. 폭격기들은 저고도에서 무지막지하게 소이탄, 확산탄 등을 쏟아부었다. 큰 화염을 발생시키는 소이탄은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 때에도 대량으로 사용돼 효과를 입증했다. 엄청난 양의 폭탄들이 투하돼 도쿄 시내 곳곳이 파괴됐고, 화염이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일본의 가옥 대부분이 나무로 만든 목조 건축물이었던 만큼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도쿄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화재를 진압해보려 했지만 현저히 역부족이었다. 공습은 도쿄만이 아닌 일본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주목할 만한 특징은 군사 목표물이 아닌 일반 시민들을 정면으로 겨냥했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군수공장, 비행장, 방어시설 등을 폭격하지 않고 민가, 병원, 학교 등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그 이전에 행해진 공습은 주로 군수공장을 목표로 했었다. 미군은 일반 시민들도 일본군의 군사적 역량을 지탱하는 핵심이라고 여겼다. 또한 공포를 유발하는 공습 전략으로 일본 국민들과 군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어버리려 했다. 공습은 수십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와 약 900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그런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 군부와 경찰, 소방대는 일왕이나 황족, 고급 관료 등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했다. 민간인들에게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했다. 각자 알아서 생존하라는 이었다. 심지어 연약한 민간인들은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되니 구석진 곳에 격리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군부 인사도 있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노인, 여자, 어린아이들을 척박한 장소에 몰아넣기도 했다.


대규모 공습과 동맹국인 독일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되레 미군의 상륙을 대비해 군부 중심으로 본토 결전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이와 관련한 어전회의에선 "황국을 수호하겠다는 충성과 불패의 야마토 정신으로 무장한 1억 국민들이 군과 함께 싸울 것"이라는 '1억 총 옥쇄론'이 등장했다. 6월에는 제국의회에서 의용병역법이 공포, 15세부터 60세 미만의 남자들과 17세부터 40세 미만의 여자들이 의무적으로 소집됐다. 뒤이어 '전시긴급조치법'도 나왔는데, 이는 정부가 비상사태 발생 시 다른 법령에 구속받지 않고 갖가지 명령이나 처분을 할 수 있는 전면적 수권입법이었다. 상술했듯 일본 수뇌부가 말하는 본토 결전은 국민들의 막대한 희생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비겁하게 회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왕과 대본영은 특정 지역에 대규모 지하요새를 만들어 숨거나, 대륙에 있는 일본군 점령지로 도망칠 계획까지 세웠다. 한편, 미국은 일본 본토 공략과 관련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오지마에서 뜻밖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본토 공략에 대한 부담감이 더욱 커졌다. 미 군부 일각에선 본토 결전 시, 약 100만 명에 달하는 미군이 전사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도 나왔다. (당시 미국은 이른바 '몰락 작전'이라는 본토 대공세를 입안했다. 이에 기반해 10월에 규슈 지역, 1946년 초에 간토 지역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자국 군인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싶었던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간절히 바라게 됐다. 소련군의 참전 여부는 '얄타 회담'에서 논의됐었고, 조만간 열릴 '포츠담 회담'에서도 주요 의제가 될 전망이었다.


본토 결전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가운데, 일본 내에서는 나름 평화적으로 '종전'을 도모해 보려는 노력도 있었다. 이는 '스즈키' 내각이 들어서면서 가시화됐다. 이들은 무리한 결전 고집으로 민심 이반이 극심해지면, 과거 러시아처럼 일본 내에서도 '공산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무엇보다 천황제와 독점자본의 지배력을 영속화하는 게 궁극적 목표였다. 관련 방안으로 소련의 중재를 통한 미국과의 화의가 모색됐다. (이 시기에 새롭게 출범한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일본의 조기 항복을 강력히 권고했다.) 스즈키 내각은 일왕의 명의로 된 친서를 소련에 전달했고, 고노에를 특사로 파견할 준비를 마쳤다. 이에 소련은 포츠담 회담이 마무리된 후에 답변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연스럽게 일본 수뇌부의 이목이 포츠담 회담 결과집중됐다. 1945년 7월 17일, 연합국 최고지도자들이 베를린 교외에 있는 포츠담에 모여 회담을 가졌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애틀리 수상,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담이 한창 진행되던 26일, 미국 영국 중국 3국 공동으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됐다. 총 13개 조항으로 구성된 해당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전후 대일처리 방침을 명시했다. 핵심 내용들을 살펴보면 일본 군대의 무장 해제, 군국주의 축출, 전쟁범죄자 처벌, 일본에서의 민주주의 부활, 언론 사상 종교의 자유 확립, 군수산업 폐지 등이었다. 또한 이 회담에서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이 확정됐다. (소련은 대일전 참전 계획을 은폐하기 위해 일부러 포츠담 선언에 불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천황제 존폐 여부는 회담에서 그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다. 만약,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거부할 경우 '신속하고 완전한 파괴'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도 가해졌다. 이때 미국은 가공할 만한 무기인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상태였다.


회담을 예의주시했던 스즈키 내각은 크게 좌절했다. 본토 결전을 주장하는 일본 군부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갔다. 다만 일본 정부가 실낱같은 희망을 거는 측면은 아직 남아있었다. 바로 소련이었다. 여전히 소련의 중재를 통한 화의가 가능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한 기대는 일찌감치 산산조각 난 줄도 모르고 애처롭게 소련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애써 무시하면서 소련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런 가운데 군부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육해군 군부대신은 황궁에서 열린 정보교환회의 때 스즈키를 따로 만나 포츠담 선언에 대한 명확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라고 압박했다.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군부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끝내 군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스즈키는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고 전쟁 완수에 매진하겠다"라고 밝혔다. 일본이 쓸데없는 소모전을 끝내고 수십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물 건너갔다. 이 같은 입장은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미국은 매우 '파괴적인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8월 6일, 두 대의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시민들은 그저 정찰용 비행기라고 생각했고, 방공호에 들어가지 않은 채 바깥에 머물렀다. 한 대의 폭격기에서 낙하산에 매단 폭탄이 투하됐다. 오전 8시 15분, 엄청난 섬광과 폭음이 발생하면서 도시 전체가 파멸의 불길에 휩싸였다. 약 10만 명에 육박하는 히로시마 시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그대로 소멸했다. 일례로 은행 앞 대리석 돌계단에 앉아 문이 열리길 기다리던 사람이 증발해 버렸고, 그가 앉았던 흔적만이 돌계단에 남았다. 도시의 절반 이상은 폐허로 변했으며 약 18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고작 한 개의 폭탄이 가져온 피해는 이처럼 어마어마했다. '리틀 보이'라고 명명된 원자폭탄은 TNT(트리니트로톨로엔) 2만 톤이 폭발한 것과 같은 위력이었다. 원폭 투하 직후에는 방사능이 섞인 '검은 비'가 내렸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그 비를 마셨고, 고스란히 방사능에 오염돼 목숨을 잃었다.


얼마 뒤 트루먼은 라디오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츠담에서 최후통첩을 냈던 것은 일본 사람들을 완전한 파괴로부터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는 곧바로 이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무조건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볼 수 없었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파괴의 비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추가적인 원폭 투하를 예고한 것이었고, 그대로 실행에 옮겨졌다. 히로시마 원폭 사흘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폭탄의 이름은 '팻 맨'이었다. 히로시마와 똑같은 파괴적인 과정이 뒤따랐고, 순식간에 일본인 약 7만 명이 소멸됐다. 미국은 이를 통해 일본의 항복을 촉진시키려 했다. 막대한 희생이 요구되는 본토 결전을 저지함과 동시에 대일전에 참전할 소련군을 제치고 일본을 단독 점령할 계획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다.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이었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날,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곧바로 만주에 있는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가 펼쳐졌다. 당시 관동군은 70만 명이 넘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미숙련 징집병들이 대다수였다. 소련군도 과거 러일전쟁 때 무기력했던 그 러시아군이 아니었다. 독일과의 피 튀기는 전쟁을 통해 최정예로 거듭나 있었다. 불과 1주일 만에 관동군 주력이 궤멸됐고, 소련군은 한반도 이북 지역으로 빠르게 진격해 들어갔다. (소련군의 진격 속도에 놀란 미국은 다급하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했다. 소련군이 이를 즉각 수용하면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할됐다.)


■일본의 항복

소련군 참전은 일본 수뇌부에 큰 충격을 안겼다. 사실상 마지막 희망이었던 소련의 중재는커녕 또 하나의 강력한 적군을 맞이하게 됐다. 나아가 소련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자칫 일본 본토에 소련의 마수가 뻗치거나 공산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 등 연합국에 항복하는 게 훨씬 낫다는 판단 하에 서둘러 항복과 관련한 행동에 돌입했다. 이때는 군부도 어느 정도 항복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다만 군부는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천황제 유지 보장, 일본이 전쟁범죄자 처벌, 자주적인 무장 해제, 소규모 병력으로 도쿄 제외한 지역 점령 등이었다. 포츠담 선언에서 나온 '무조건' 항복과 완전히 동떨어진 태도였다. 조만간 열린 임시각의에서 항복 조건을 둘러싸고 오랜 시간 격론이 벌어졌다. 군부는 기존 입장을 고수한 반면 스즈키 내각의 핵심인 도고 외상은 천황제 유지 보장만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조건들까지 내걸면 신속한 평화는 물론 천황제 유지도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여러 번 회의가 열렸지만 입장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나마 해결사 역할을 한 게 '일왕'이었다. 일왕이 참석한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선 도고 외상의 손을 들어주면서 항복 협상을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곧바로 일왕의 국법상 지위 유지를 조건으로 하는 항복 안이 미국 측에 제시됐다.


애매한 답이 돌아왔다. 일본이 항복하는 그 순간부터, 일왕과 정부의 통치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종속'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최종적 통치 형태는 민주주의에 기반해 결정된다는 첨언도 있었다. 일본 내에선 이의 해석을 둘러싸고 또다시 격론이 벌어졌다. 특히 일본 육군은 한층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미국의 답이 천황제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며 오로지 전쟁을 지속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 인사들을 체포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스즈키와 도고 등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사전에 육군의 쿠데타 계획을 감지한 뒤 대비를 해나갔고, 일왕을 만나 결단을 내려줄 것을 촉구했다. 이 시기에는 일본 상공에 미군 항공기가 나타나 항복협상 진행 사실이 담긴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 그제야 일본 국민들은 현재의 전황과 일본 정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의 항복 결정이 지연되면서 위기감은 다시 증폭됐다. 도고 등은 결정이 마냥 늦어지면 국내의 혼란상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러는 사이, 스웨덴 공사로부터 극적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국이 '천황제 존치'라는 일본의 요구 조건을 사실상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힘입어 도고 등은 일왕을 다시 만나 설득 작업을 했고 절대적 권위에 기반한 '성단'을 촉구했다. 8월 14일, 일왕이 소집한 합동회의에서 마침내 결론이 도출됐다. 여전히 육군 측은 전쟁 지속을 주장했지만 일왕의 언급은 달랐다. 그는 "짐은 어찌 돼도 좋다. 국민들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다"라며,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즉시 수락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긴급전문의 형식으로 세계에 타전됐다.


일본 육군은 쿠데타를 실행해 항복을 막으려 했다. 이에 잠시동안 궁성을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쿠데타에 동원된 부대들이 돌아서면서 실패로 끝났다. 15일, 일왕은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낭독했다. "참기 힘든 것을 참고 항복하여 국체를 보호 유지할 있는 것을 기뻐하며. 향후 국민들에게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기를 바란다." 이를 들은 일본 국민들은 무릎을 꿇고 연신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대본영에 의해 잘못된 전황 소식만을 접한 국민들은, 일왕이 직접 전하는 패전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중국과 남방에 있던 일본군은 일왕의 항복 조서에 일시적으로 술렁였다. 황족이 급히 파견돼 조서를 따르라고 명령하면서 순조롭게 무장해제 등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후 9월 2일에 도쿄만 해상에 있는 미군 함정 '미주리호' 선상에서 정식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연합국 측에선 맥아더를 비롯한 9개국 대표가, 일본 측에선 시게미쓰(정부)와 우메즈(대본영)가 참석했다. 맥아더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게미쓰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 직후 맥아더는 "엄숙한 의식을 통해 과거의 유혈과 대학살로부터 벗어나 더 좋은 세상-인간의 존엄성과 인류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 온 자유와 관용, 정의에 대한 소망을 성취하는 데 전념하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며 진실로 모든 인류의 소망"이라고 말했다. 극적인 장엄함과 심오한 상징, 관대함이 결합된 조인식을 끝으로, 비로소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됐다. 전후 일본에선 미군의 단독 점령 체제 하에 군정이 실시됐다. 도쿄 재판도 열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의 전시 지도자들이 대거 전범으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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