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한국 전쟁의 중대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됐다. 함정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
맥아더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9일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중요한 구상을 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남진하는 북한군을 적절한 지점에서 방어하면서, 불시에 적군의 측면을 공격해 전황을 일거에 뒤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태평양 전쟁에서 각종 상륙 작전을 지휘해 본 경험이 있었던 만큼 맥아더는 상당한 자신감을 가졌다. 원래는 7월 하순에 이 작전(블루하츠 작전)을 시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남진이 계속되면서 작전은 폐기됐다. 이후 맥아더는 극동사령부 합동전략기획단과 함께 최적의 상륙 지점이 어디 일지를 재차 검토했다. 세 곳이 후보로 떠올랐다. 인천, 군산, 주문진이다. 대부분의 참모들은 군산을 선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엇보다 상륙 조건이 양호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올라온 병력과 협조하기가 용이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맥아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천을 고집했다. 미 합동참모본부와 해군본부의 격렬한 반대가 뒤따랐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큰 조수간만의 차가 우선적으로 꼽혔다. 만약 함선이 밀물일 때 상륙하면, 다음 밀물이 올 때까지 좌초돼 북한군의 공격에 쉽게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밀물이 아닐 때 상륙하면, 지상군이 수백 미터를 엄폐물 없이 질주해야 했다. 썰물이면 나타나는 갯벌도 문제시 됐다. 이는 수백 미터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져 보병과 차량의 통행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다. 상륙지 주변에 있는 돌로 쌓은 방파제와 축대도 지적됐다. 이는 높이가 상당했기에 방어 진영에는 절대적 이점을, 공격 진영에는 불리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만조 시 상륙 함정들이 비좁은 단일수로에 밀집하게 될 위험성도 제시됐다. 이렇게 되면 적군 해안포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모든 것들에 근거해 해군사령관인 찰스 터너 조이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을 '5000분의 1' 정도로 보았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인천이 상륙지로 결정됐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북한군의 보급로를 효과적으로 절단할 수 있고 서울로도 신속히 진격할 수 있었다. 군산 등은 이 같은 이점들이 부재했으며 적군을 포위할 수도 없었다. 둘째, 인천에서의 북한군 전력이 매우 취약했다. 북한군 지휘부는 유엔군이 인천보다는 다른 곳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예측했다. (린뱌오와 저우언라이 등 중국의 핵심 전략가들은 인천을 유력한 상륙지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인천에 비교적 적은 수의 병력을 배치했다. 그나마 있었던 병력을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하기 힘든 점들이, 역설적으로 북한군의 오판을 유도해 인천을 최적의 상륙지로 만든다고 설득했다.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미 합참은 '크로마이트 계획'을 승인했다. 이제 유엔군은 치밀한 사전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정보들을 수집했다. 한국군 첩보부대가 인천항 주변에 있는 영흥도 등에 잠입해 북한군의 병력 배치, 장비, 해안가에 설치된 기뢰의 위치 등을 파악했다. 다음으로 기만 전술을 펼쳤다. 유엔군은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군산, 영덕, 삼척, 남포 인근에서 군사 행동을 전개했다. 폭격을 통해 군산의 도로와 교량 등을 파괴, 북한군으로 하여금 조만간 이쪽으로 상륙 작전이 전개될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과 영국의 특공대가 군산에 기습 상륙을 단행한 뒤 철수했으며, 미군 항공기가 출현해 '민간인들은 속히 대피하라'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살포하기도 했다. 영덕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났다. 삼척에서는 미군 전함이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아울러 워커는 한 기자회견에서 의도적으로 '10월 상륙설'을 흘렸다. 김일성 등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9월 낙동강 전선에 더욱 사활을 걸었다.
유엔군의 사전 포격이 인천에만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륙 작전이 임박한 9월 13일, 유엔군은 인천에 있는 철도, 도로, 터널 등을 겨냥해 대대적인 포격을 실시했다. 화들짝 놀란 북한군은 즉시 지휘부에 인천으로의 상륙 가능성을 보고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유엔군은 조만간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할 참이었다. 미 육군 제7사단이 요코하마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고베에서, 미 해병 제5연대 및 한국군 해병 제1연대가 부산에서 각각 출발했다. 상륙군이 탑승한 수송선단은 261척에 달했다. 이들은 14일 서해의 덕적도에 집결한 뒤 인천으로 향했다. 운명의 15일 새벽 2시, 드디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됐다. 상륙 명령이 하달되자, 우선 미군과 한국군의 연합 특공대가 팔미도 등대를 재빠르게 점령했다. 뒤이어 미군 항공모함에서 날아오른 함재기와 전함들이 인천 해안가에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다. 이 직후, 미 해병대와 전차가 탑승한 여러 척의 상륙정들이 월미도 북단의 그린비치로 돌진했다. 북한군의 저항은 미약했다. 해안포는 미군의 포격으로 무력화됐고, 당황한 나머지 전선을 이탈하는 북한군 병사들이 늘어났다. 1차 상륙이 순조롭게 이뤄졌고 후속 상륙도 속속 전개됐다. 미 해병대는 월미도를 신속히 장악해 나갔다. 참호 속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전차포 등으로 가볍게 제압했으며 잔적들을 모조리 소탕했다. 오전 8시, 미 해병대는 월미도를 점령했다. 이후 미군은 전투기와 박격포 등으로 소월미도에 있는 북한군까지 공격했다. 여기서도 북한군은 가볍게 제압됐다. 1단계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썰물이 되면서 미군 함정들은 잠시 뒤로 물러났고, 상륙군은 월미도에 고립됐다. 이때 미군 항공기들이 대거 출격, 북한 증원군이 진입해 상륙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엄호했다. 오후에 만조가 되면서 인천항(적색해안)을 겨냥한 2차 상륙 작전이 전개됐다. 미 해병 제5연대 등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인천항 도크를 손쉽게 확보한 뒤 감제고지를 탈환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인천 시가지로 진격해 북한군 소탕 작전을 펼쳤다. 상술했듯 북한군 병력은 많지 않았고, 이미 상륙작전의 여파로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소탕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인천항과 더불어 인천 남동부(청색해안)에도 미군이 상륙했다. 한국군 제17연대도 뒤를 따랐다. 이들도 머지않아 목표인 해두보를 확보했다. 16일 아침, 인천은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완전히 수복됐다. 당초 우려했던 바와 달리, 인천상륙작전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돼 전사자도 적게 발생했다. 맥아더가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세기의 도박'은 의외로 쉽게 전과를 올리며 전황을 급변하게 만들었다.
■서울 탈환
미군과 한국군의 다음 목표는 서울이었다. 한국군 해병연대가 배속된 미 해병 제1사단은 서울 서쪽 방면(영등포, 김포)으로 진격하고, 한국군 독립 제17연대가 배속된 미군 제7사단은 서울 남쪽에서 북한군 증원 및 퇴로 차단,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올라오는 미군(제8군)과 연계하기로 했다. 미 해병 제1사단 5해병연대가 김포비행장을 장악한데 이어 김포반도의 서북부까지 점령했다. 아울러 미 해병 제1사단 1해병연대가 경인국도를 따라 영등포로 진격했다. 이곳에서의 북한군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미군은 항공기와 포병으로 맹폭을 퍼부었고, 호킨즈 대대 등을 투입해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그럼에도 북한군이 결사적으로 저항함에 따라 미군의 진격이 상당히 지체됐다. 이런 가운데 현재 영등포 로터리에 해당하는 시가지 중심부에 북한군이 부재하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미군은 이를 틈타 예비대(에이블 중대)를 해당 장소에 긴급 투입했다. 실제로 시가지 중심부에는 북한군이 없었고, 시가지 양단에서만 총격전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블 중대는 영등포 시가지의 동쪽 끝으로 진격해 진지를 구축했다. 허를 찔린 북한군이 뒤늦게 소부대로 공격해 왔으나, 에이블 중대는 가볍게 격파했다. 북한군은 여러 차례에 걸쳐 야간 공격도 감행했다. 그때마다 에이블 중대는 적군을 유인하는 등의 영리한 전술로 물리쳤다. 이 중대의 맹활약으로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를 점령할 수 있었다.
김포반도를 장악한 제5해병연대는 9월 21일 서울 서북쪽 외곽까지 진격했다. 이때 커다란 장애물을 맞닥뜨렸다. 북한군이 해당 지역에 있는 무악산, 금화산(105 북고지), 노고산(105 중고지), 와우산(105 남고지), 연희고지 등에 수천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결사항전 태세를 갖췄다. 지형상 이곳들은 공략하기가 어려웠다. 미군과 한국군은 함재기의 공중 지원을 받으며 북한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야말로 '혈전'이 벌어졌다. 미군 등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고지를 점령했다가 북한군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기도 했다. 뺏고 뺏기는 소모전이 생각보다 길게 지속됐다. 이는 전쟁 후반부에 나타날 악명 높은 '고지전'의 예고편이었다. 그러다가 서울 남쪽에서 진격해 온 미군(제7사단 32연대)에 의해 돌파구가 마련됐다. 대부분의 북한군 전력이 고지에 투입돼 이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나아갈 수 있었다. 영등포를 점령했던 제1해병연대도 한강을 건너 공격에 가세했다. 북한군은 압도적으로 증원된 적군의 화력 앞에 서서히 무너졌다. 특히 개량형 전차, 불도저 전차, 화염방사 전차들의 활약이 빛을 발했다. 25일이 돼서야 북한군의 고지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됐다. 당초 유엔군 지휘부는 25일을 서울 탈환일로 계획했지만, 크게 지연된 셈이었다. 26일부터 미 해병 제1사단을 중심으로 서울 시가전을 전개했다. 중앙청, 경복궁, 서울시청 등 주요 장소들을 목표로 진격하는 동안, 중간에 보이는 북한군을 일일이 소탕하려 했다. 그런데 북한군의 방어 전력도 꽤 강력해 보였다. 이들은 힘없는 서울시민들을 강제 동원해 주요 도로마다 바리케이드를 겹겹이 설치했다. 이것 주변에는 다수의 지뢰들도 있었다. 북한군은 박격포와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미군과 한국군의 대처 방식은 집요했다. 일단 바리케이드 주변에 있는 북한군 병사와 각종 무기들을 집중적으로 난타했다. 저항력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면, 곧바로 공병들이 나아가 지뢰를 제거했다. 그런 다음 전차들이 진격해 바리케이드를 깔아뭉갰다. 이런 방식으로 북한군 방어선을 하나하나 파괴해 나갔다.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기어이 해냈다. 그 결과 서울 시가지를 대부분 장악했고, 27일 오후 3시에 대한민국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전격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된 지 3개월 만에 거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원래는 미군이 중앙청을 점령한 뒤 성조기를 게양하려 했으나, 대한민국 해병대가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29일에는 맥아더와 이승만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환도식'이 거행됐다. 한편, 인천상륙작전과 맞물려 낙동강 전선에서도 대대적인 반격이 개시됐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소식을 접하지 못한 북한군은 초반에는 적절히 방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어느 한쪽의 일방적 우세가 아닌, 우열을 가리기 힘든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워커는 예상외로 북으로의 진격이 지체되자, 병력을 뒤로 물리고 기습적인 군산 상륙을 모색했다. 그러다가 낙동강 전선 돌파 가능성이 있다는 참모진의 조언에 따라 다시 해당 전선에 매진했다. 9월 23일, 마침내 낙동강 전선이 돌파되기 시작했다. 주공인 미군 제24사단과 제1기병사단이 각각 대구-김천-대전 방면, 다부동-보은-청주-수원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는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널리 전해지면서 북한군이 급격히 붕괴됐다. 심리적으로도 무너졌지만, 무엇보다 보급로가 절단되면서 북한군은 궤멸 위기에 처했다. 이들은 싸우지 않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미군과 한국군의 진격은 거침이 없었다. 미군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가 26일 오산 북쪽까지 나아가 인천에 상륙한 미군과 연결됐다. 이후 대전, 논산, 원주, 제천 등이 잇따라 탈환됐다. 일부 한국군(제3사단, 수도사단)이 북한군을 추격하며 가장 먼저 38선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북한군을 소멸시켰고, 2만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온전하게 퇴각한 북한군은 2만여 명에 불과했으며, 1만 명 정도는 지리산과 태백산맥으로 숨었다. 다만 미군과 한국군은 진격하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 오로지 신속한 진격만을 추구하다 보니, 남한 내에 있는 패잔병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지리산 등에 잠입한 북한군 패잔병들은 제2전선을 형성했고, 추후 중공군과 협력해 미군과 한국군을 크게 괴롭히게 된다.
■거침없는 북진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38선 인근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잠시동안 38선 돌파 여부와 관련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부터 그랬다. 강경파는 "즉시 38선을 돌파해 한반도를 통일하고 전범을 처벌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공군과 해군은 이미 38선 이북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첨언했다. 반면 온건파는 소련과 중국의 개입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쯤에서 진격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을 지속해다간 자칫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과 한국군 수뇌부는 '북진통일'을 강력히 주장했다. 만약 유엔군이 북진하지 않는다면,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최고 결정권자인 트루먼은 조금씩 북진으로 기울었다. 이유는 소련과 중국이 전쟁 개입 시기를 놓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9월 27일,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맥아더에게 38선 돌파 지침을 하달했다. 조심스러운 단서를 달았다. 유엔군이 중소 국경에는 절대로 접근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10월 7일, 유엔에서 미국의 38선 돌파 결의안이 채택됨에 따라 유엔군의 북진이 확정됐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상당한 시간을 지체했던 것처럼, 유엔군도 38선 인근에서 오래 지체함에 따라 적군 지휘부는 안전한 퇴각 및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소련과 중국은 이미 유엔군의 북진에 대해 경고한 바가 있었다. 소련의 말리크 대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진이 이뤄질 경우 '전쟁 확대' 가능성을 언급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주중 인도대사를 불러 "미군이 38선을 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것이 행동이 따르지 않는 선언적 개념에 그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유엔군의 동향과 별개로 한국군은 이미 38선을 넘었다. 이승만은 대구 육군본부 회의와 동해안 제3사단 방문 자리에서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라고 명했다. 자칫 미국과의 외교 마찰이 발생할 수 있었으나, 정일권 참모총장이 워커에게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니 반격하게 해달라고 건의하면서 순조롭게 북진이 이뤄졌다. 10월 1일, 선발대가 먼저 북진한데 이어 중부 지역에서 제2군단, 동부 지역에서 제1군단이 진격했다. 유엔군은 9일부터 북진했다. 미군 제1기병사단이 주공으로써 금천-사리원-평양 방면으로, 미군 제24사단이 조공으로써 연안-해주 방면으로,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제1사단이 토산-신계-수안 방면으로 각각 진격해 나갔다. 북진 이후 처음으로 나타난 두드러진 전과는 '원산' 탈환이었다. 동해안을 따라 빠르게 진격한 한국군 제1군단이 10일 북한 동부의 정치, 경제 중심지인 원산을 공격했다. 병사들의 생활 여건은 형편없었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기에 효과적인 공세가 펼쳐질 수 있었다. 한국군은 부대를 나눠 원산 시가지를 둘러싼 고지군들을 먼저 점령했다. 유리한 지점을 선점한 뒤, 일제히 원산 시가지로 진격해 탈환에 성공했다. 비슷한 시기,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목표로 한 미군 제1기병사단은 그 관문인 금천 공격에 나섰다. 북한군은 여기서 맹렬히 저항했다. 미군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좀처럼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이때 탁월한 전술이 나왔다. 미군은 우선 야간행군을 통해 일부 부대(제7기병연대)를 은밀히 방어선 후방으로 보냈다. 아울러 또 다른 부대(제1,8 기병연대)를 방어선 양쪽으로 우회 기동시켰다. 이른바 '양익 포위' 전술이었다. 비록 북한군의 거센 저항으로 포위 전술이 완벽하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이로 말미암아 방어선을 돌파해 금천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평양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곳은 대동강을 중심으로 동평양과 본평양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주공인 미군(제1기병사단)은 사리원-황주-평양 남쪽 흑교리를 거쳐 대동강변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자 조공인 한국군(제1사단)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당초 한국군은 후방작전 임무를 맡았지만, 1사단장인 백선엽이 평양 공격의 기회를 달라고 미군에 강력히 요청해 조공으로 변경됐다.) 미군과 한국군 사이에 '누가 먼저 평양을 점령하는지'와 관련한 경쟁이 불붙었다. 한국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제11, 12연대는 동남쪽으로, 제15연대는 우회기동을 실시해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 평양 시내에 포격을 실시하는 것과 관련한 논쟁이 있었다. 평양 출신인 백선엽은 평양에 소중한 문화재가 많기 때문에 포격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의 참모들은 적군을 효과적으로 궤멸시키고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포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참모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평양을 겨냥한 야포 사격이 실시됐다. 이후 한국군 제12연대는 대동강과 동평양 일대에 설치된 북한군의 3중 방어선을 뚫고, 동평양의 선교리 로터리에 진입했다. 이는 미군보다 빠른 진격이었으며, 한국군 제12연대는 평양에 가장 먼저 진입한 부대가 됐다. 한국군 제11연대는 미림 비행장을 점령했고, 적군 약 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우회 기동을 실시한 제15연대는 대동강을 도하해 후방에 있는 김일성 대학으로 진격했다. 자연스레 이 부대는 본평양으로 진입한 최초의 부대가 됐다. 김일성 대학에서 북한군 전차 7대의 갑작스러운 반격을 받아 고전했지만, 때마침 미군 폭격기의 도움으로 적군을 궤멸시킬 수 있었다. 제15연대는 김일성 대학을 거쳐 모란봉까지 진격했다. 그런데 이때, 다른 곳에 있던 한국군 제7사단 8연대도 동북쪽으로 진격해 들어와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의 뒤를 따랐다. 이 두 부대는 상호 간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서로가 무슨 작전을 수행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김일성 대학에서 아군끼리 오인 포격이 이뤄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나아가 자신들이 먼저 본평양을 점령했다고 주장하면서 치고받고 싸우는 일도 벌어졌다. (제7사단 8연대가 건물 벽에 자신들이 평양을 점령했다고 써놓으면, 제1사단 15연대가 와서 그것을 지우고 자신들이 평양을 점령했다고 써놓는 촌극도 발생했다.)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본평양의 핵심인 형무소와 내각본부를 차례로 점령하며 평양 점령 임무를 완수해 나갔다. 북한군의 대동강 교량 폭파로 동평양에서 어려움을 겪던 미군과 한국군도 도하를 강행해 본평양으로 진입했다. 10월 19일, 마침내 평양이 한국군과 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북한의 수도에서 인공기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게양됐다. 며칠 뒤에 열린 평양입성 환영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UN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됐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에서 축출됐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소련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울 뿐이요,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세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위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UN이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대회에 모인 평양시민들은 물론 한국인들도 통일의 시간이 왔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한편 미군은 평양 점령과 동시에 북한군의 퇴로 차단 및 북한 고위 관료들을 잡아내기 위한 작전도 펼쳤다. 이를 위해 미군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이 평양 북쪽에 있는 숙천과 순천에 낙하했으나 기대한 전과는 올리지 못했다.
미군과 한국군의 북진은 대체로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간과할 수 없다.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미군 제10군단이 원산 상륙을 계획했는데, 함정에다가 병력과 장비들을 탑승시키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한국군이 먼저 원산을 점령했다. 이미 원산 방면으로 출항했던 미군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상륙을 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원산 앞바다에 있는 기뢰들이 발목을 잡았다. 미군은 기뢰들을 일일이 제거해 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미군 제8군과 함께 북진해야 할 마당에, 엉뚱하게 기뢰 제거 작업을 하는데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이 같은 실수는 가열한 북진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울러 한국군은 평양 점령이라는 지역적 목표에만 집중한 나머지 북한군 지휘부를 등한시했다. 만약 평양 점령과 더불어 북한군 지휘부를 신속히 추격해 격멸했다면, 확실한 승기를 잡았을 것이다. 여하튼 북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이때 맥아더는 유엔군의 진출 한계선을 재조정했다. 기존의 정주-영원-함흥을 넘어 만주와 닿아있는 국경선 인근까지 진격하라고 명했다. 미 합참에서 소련이나 중공과의 충돌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맥아더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감과 확신에 차 있었다. 북한의 형님 격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개입할 시기는 일찌감치 지나갔으며, 설령 개입한다 해도 미군의 강력한 화력으로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가진 트루먼과의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전혀 없다"라고 못 박았다. 트루먼도 어느 정도 공감하며 맥아더의 북진 계획을 승인했다.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서부 지역은 미군 제8군이, 동부 지역은 미군 제10군단이 전개했다. 서부 지역에선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제2군단이 운산, 온정리로 진격했다. 특히 한국군이 국경선 일대까지 진격하기로 함에 따라, 한국군 제2군단의 6사단과 8사단이 각각 압록강 변에 있는 초산과 만포진, 중강진 방면으로 나아갔다. 서해안에서는 미군 제24사단과 영국군 제27연대가 신의주와 가까운 정거동까지 진격했다. 동부 지역에선 미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 미군 제7사단은 혜산진, 한국군은 청진 방면으로 각각 나아갔다. 맥아더는 늦어도 추수감사절(11월 23일) 이전까지 전쟁을 완전히 종결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궁극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한 북진 작전은 북한군의 별다른 저항 없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10월 26일, 쾌속 질주한 한국군 제6사단이 마침내 초산에 이르렀다. 이들은 수통에다가 압록강 물을 담고 벌컥벌컥 마셨다. 사실상 북진 통일이 이뤄졌다고 생각한 만큼, 저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일각에서 제기됐던 외부 세력 개입 가능성도 그저 기우에 그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한반도 최북단을 공중 정찰하던 미군 항공기가 미군과 한국군이 아닌 제3의 군사적 흔적을 발견했다. 마치 귀신을 본 것과 같은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랬다.우려했던 '중공군의 전면 개입'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