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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Nov 28. 2024

'한국 전쟁'-고지 쟁탈전, 정전 협정 체결

[5] 냉전 시대 최악의 열전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서 전문에 서명하고 있다. 이로써 3년 넘게 지속된 한국 전쟁이 종결됐다.

■정전 협상과 고지 쟁탈전

미국을 비롯한 유엔 측만 정전 협상에 뜻을 둔 게 아니었다. 공산 진영도 힘의 한계를 절감하고 정전을 추진했다. 1951년 6월 13일, 소련과 중국 북한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여 '조건부 정전'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23일에는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공식적으로 정전을 제안했다. 유엔군 측의 리지웨이가 전면에 나서 공산권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다. 막후에서 교섭이 이뤄진 결과, 정전을 위한 본 협상을 7월 10일 개성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미국은 협상이 길어야 1개월이면 끝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우선 '군사 분계선'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유엔군 측은 현재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군사 분계선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공산군 측은 38선에서 군사 분계선이 설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군 측은 합리적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공산군 측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있다가 돌연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미군은 의도적으로 불성실하게 나오는 공산군 측을 협상장에 복귀시키기 위해 군사적 압박이라는 강수를 뒀다. 다만 전면전은 아니고 '제한 전쟁'의 성격이 짙었다. 이로 인해 발발한 '고지 쟁탈전'은 양측에 무수한 피해를 입히며 소모전을 유발했다. (정전 협상을 앞둔 6월에 이미 양구 도솔산 일대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북한군과 고지전을 벌인 적이 있다. 하나의 고지를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진 끝에, 대한민국 해병대가 24개 전 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무적 해병'이라고 불렸다.) 미군과 한국군은 8월 중순 양구 북쪽에 있는 수리봉(983 고지) 일대에서 공세를 전개했다. 요충지였던 이곳은 방어하는 쪽이 상당히 유리했다. 남쪽 면의 경사가 매우 가팔랐고 곳곳에 수많은 지뢰들이 매설돼 있었다. 한국군(제5사단 36연대)이 먼저 공격을 했으나, 지뢰와 북한군의 수류탄 공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한국군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고 조금씩 전진해 나갔다. 가까스로 수리봉을 점령하는 듯했지만, 이내 북한군의 역공을 받고 퇴각했다. 한국군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만큼, 미군(제2사단 9연대)이 합세하기로 했다. 수리봉의 우측과 좌측에서 각각 미군과 한국군이 진격해 들어갔다. 북한군은 사격과 수류탄 투척 등으로 맞섰다. 무려 18일 동안 전투가 벌어지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고지의 능선은 병사들의 피로 얼룩졌다. 일명 '피의 능선 전투'로 불린 이 전투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1만 5000여 명에 달하는 북한군을 소멸시키며 수리봉 일대를 점령했다. 미군과 한국군의 사상자는 4400여 명이었다.


이를 계기로 공산군 측은 10월 25일 정전 협상에 복귀했다. 협상장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바뀌었다. 조만간 군사 분계선 문제에서 실마리가 마련됐다. 38선이 아니라 양 진영이 현재 접촉하고 있는 곳으로 가닥이 잡혔다. (협상 중에 한국 측이 원래 자신들의 영토였던 개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유엔군 측은 여러 사안들을 감안해 개성은 공산군 측에 양보했다.) 군사 분계선으로부터 각각 2km씩 물러나 비무장 지대도 만들기로 합의했다. 쟁점이었던 군사 분계선 문제가 해결되자 정전 협상이 곧 타결될 것처럼 보였다. 다음 의제였던 '포로 교환'은 제네바 협정 제118조에 의거해 신속히 매듭지어질 전망이었다. 제네바 협정에는 "적대 행위가 종료되면 포로는 즉시 해방되고 송환돼야 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포로 교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유엔군에게 붙잡혔던 공산군 포로들 중 상당수가 북한이나 중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기실 공산군 포로들 중에는 강제 동원된 남한 주민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원래 국민당군 소속으로 있다가 국공 내전에서 참패함에 따라 강제적으로 중공군에 편입된 사람들도 있었다. 제네바 협정에는 송환 거부 포로들에 대한 처리 방식이 나와있지 않았던 만큼, 유엔군 측은 골머리를 앓았다. 대안으로 공산군 포로와 유엔군 포로의 동수 교환을 제시했지만, 공산군 측은 모든 포로들의 교환을 고수했다. 유엔군 측은 고심 끝에 자유 송환 원칙을 확정했다. 이 원칙이 끝까지 지속되지는 못하는 듯했다. 추후 정전협정 체결 직전에 모든 포로들을 교환한다는 데 합의했다. 하루빨리 정전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이승만은 유엔군 측과 사전협의 없이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시키는 초강수를 뒀다. 정전 협상이 다시 결렬되자, 유엔군 측과 미국은 크게 당황하며 이승만을 맹비난했다.


포로 교환 문제가 난항을 거듭할 때에도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백마고지'(395 고지)에서 마오쩌둥으로부터 '만세군'이라는 호칭을 얻은 중공군(제38군)이 한국군(제9사단 29연대)을 공격했다. 정면에서는 포격을 가함과 동시에 한국군 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중공군은 퇴로가 차단된 한국군에게 대대적으로 돌진했다. 한국군의 전의가 꺾였다고 판단한 중공군은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연대를 번갈아가면서 투입하며 거세게 저항했다. 과거에 공격만 하면 쉽게 무너졌던 그 취약한 한국군이 아니었다. 보병과 포병, 전차의 협동 방어도 원활하게 이뤄졌으며, 미국 공군의 근접항공지원도 빛을 발했다. 강승우 소위, 안영권 하사 등이 폭탄을 안고 중공군 핵심 지점에 들어가 산화하는 감투 정신까지 발휘됐다. 결국 최종 승자는 한국군이었다. 10여 일간 12번 벌어진 쟁탈전에서, 한국군은 1만 4000여 명의 중공군을 소멸시키며 백마고지를 지켜냈다. 한편, 고지 쟁탈전과 더불어 미국 공군의 공세도 가열하게 전개됐다. 정전 협상에 임하는 공산군 측에 큰 압박을 가하기 위해, 미군 항공기가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올라 북한의 철도와 도로 등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수백 개에 달하는 폭탄들이 쏟아짐에 따라 북한의 기반 시설은 철저히 파괴됐다. 추후에는 무려 500대의 항공기가 날아올라 북한의 수력 발전소들을 맹폭하면서, 북한 전력이 마비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북한의 수도인 평양도 항공기 폭격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평양 핵심부 타격은 물론 북쪽에 있는 덕산 저수지 등도 파괴해 주요 철도 및 도로를 유실시켰다. 북한은 미군의 폭격에 커다란 공포심을 갖게 됐으며, 이후 전국에 수많은 방공호를 건설해 나갔다.


■정전 협정 체결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정전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1953년에 접어들면 더욱 명확해졌다. 은근히 전쟁이 좀 더 지속되길 바랐던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했고, 정전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다만 이 시기 중공군의 경우, 최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중공군의 병력은 꾸준히 증강돼 약 135만 명에 달했다. 북한군은 약 45만 명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정전의 시간을 앞두고, 마치 승리한 것과 같은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이에 5월부터 중부 전선에 있는 화천 북쪽의 금성 돌출부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번에도 한국군이 주 표적이었다. 6월에는 중공군 제20병단이 북한강과 금성천의 합류 지점에 있는 한국군 제5사단, 8사단의 방어선에 맹공을 퍼부었다. 대규모 병력의 전개와 야간 공세 등으로 인해 한국군은 북한강 남안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후 한국군의 반격이 무위에 그친데 이어, 미군(제8군)의 주요 방어선인 미주리 선의 중앙 돌출부도 피탈되고 말았다. 이쯤에서 중공군의 공세는 일단락됐다. 당초 목표로 했던 착시 효과 달성에 성공했다고 자평하며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상술했듯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독단적으로 석방하면서 정전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다시금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7월 13일, 중공군은 금성 일대의 좌측과 우측에서 한국군(제2군단)에 대한 양익 포위를 시도했다. 이 지역에서의 방어가 힘들다고 판단한 한국군은 미군과 함께 금성천 남단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중공군은 전쟁 막판에 적지 않은 남진을 이뤄내는 전과를 달성했지만, 지속가능하지는 못했다. 어느덧 공세 종말점에 다다랐다. 한국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역공을 가해 북한강과 금성천을 연하는 선까지 탈환했다. 미군 지휘부에서 더 이상의 북진은 허락하지 않음에 따라 여기서 휴전선이 형성됐다. 중공군이 금성 지구 전투에서 한국의 영토를 일부 탈취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중공군의 승리로 보인다. 그러나 중공군 전사자가 한국군이나 미군의 2배가 넘었던 만큼, 반드시 승리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서부 전선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임진강 상의 전략적 요충지인 '베티고지'가 주요 전장이었다. 중공군은 야간에 공격을 감행했는데, 김만술 소위가 이끄는 제2소대가 고지 사수 임무를 부여받았다. 사전에 김만술은 교통호를 정비하는 등 만반의 대비를 했다. 전투는 치열한 근접전, 백병전으로 전개됐다. 양 측에서 수류탄이 오갔고 병사들이 뒤섞여 피 튀기는 혈투를 벌였다. 김만술 소대는 소부대 전투사례의 모범으로 여겨질 만큼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 결과, 13시간 동안 지속된 전투에서 중공군을 격파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한편 전방뿐만 아니라 후방에서의 전투도 간과할 수 없다. 남한 내에서는 '빨치산'이라는 북한의 비정규전 부대가 내륙 산악 지형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정전 협상이 진행될 때에도 후방 교란을 도모하며 한국군과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한국군은 '쥐 잡기 작전'이라는 대대적인 공비 토벌을 단행했다. 단계적으로 이뤄진 작전을 통해 1만 6000여 명에 달하는 공비들을 섬멸했다. 기세가 완전히 꺾인 빨치산들은 머지않아 소멸의 길로 나아갔다. 1953년 7월 말에 접어들자, 드디어 정전이 목전에 다가왔다. 골칫거리였던 포로 교환 문제는 반공 포로들을 중립국인 인도에 남겼다가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대부분의 포로들이 한국이나 대만행을 선택한 가운데 제3국행을 택한 일부 포로들도 있었다. 그동안 정전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이승만 정부와 한국 국민들도 다소 누그러졌다. 현실적으로 정전이 국제적 대세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아울러 미국에게서 매우 중요한 이득을 취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군 20개 사단 증편을 확정 지은 것이다. 통일 대신 미군이라는 강력한 뒷배를 얻은 한국은 정전 협정을 수용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측 수석대표인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인 남일이 각각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서로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 다음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된 정전협정서 전문에 서명했다. 조인식장에서 퇴장할 때에도 상호 간 인사나 악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유엔군 사령관인 클라크가 정전협정 확인 서명을 했고, 김일성과 펑더화이도 각자의 위치에서 서명했다. 한국 측만 정전협정서에 미서명한 채로 남아있어 큰 아쉬움을 남겼다. 정전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잠시동안 포격전이 전개되다가, 7월 27일 밤 10시에 모든 전선에서 포성이 멎었다. 3년 넘게 지속됐던 한국 전쟁이 마침내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이 전쟁에 참전한 주체들은 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고통을 겪었다. 한국과 북한은 국가 기반시설들이 초토화돼 전후 재건 사업을 하는데 큰 애를 먹었다. 중국은 수많은 인적 손실에 따른 후유증에 시달렸고, 향후 20년 간 국제무대로 진출하지 못했다. 적지 않은 인적 손실을 겪은 미국도 승리할 수 있었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들으며, 국제 사회 리더로서의 지위에 타격을 입었다. 또한 한국 전쟁의 마무리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로의 진입인 만큼, 이후에도 한반도는 불확실성과 전쟁 위기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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