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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Dec 03. 2024

'독소 전쟁'-독일과 소련, 다가오는 파국

[1]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

스탈린과 히틀러. 두 독재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되고, 가장 많은 전사자를 발생시킨 대전쟁을 치렀다.

거짓된 협력

나치 독일과 소련은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사이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과 민족성을 매우 혐오했다. 또한 자라나는 소련의 군사력을 위협적으로 여겼으며, 언젠가 소련과의 전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탈린도 히틀러와 나치즘이 지향하는 바가 소련의 그것과 완전히 상충된다고 판단했다. 기실 독일과 소련 둘 다 전체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선 동일했다. 만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이 노동자와 무산계급의 주도로 국유화, 계획경제 등을 통한 평등사회를 지향한 반면 독일의 파시즘은 초엘리트 수뇌부의 주도로 국가 및 군국주의를 통한 적자생존, 불평등, 패권주의 등을 지향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비롯한 여타 국가들을 침략할 것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극동에서 일본의 위협도 상존하고 있었던 만큼, 그는 해법을 마련해야 했다. 결국 고립을 포기하고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국제연맹에 가입함과 더불어 전 세계 공산당 조직에게 혁명투쟁 포기 및 반파시즘 전선을 형성하라고 촉구하는 등 서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영국, 프랑스도 독일의 위협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탐탁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소련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협력이었다. 영국, 프랑스는 소련을 동등하게 보지 않고 하위 파트너 정도로 여겼다. 이에 소련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제안하면 시큰둥하게 반응하기 일쑤였다. 소련이 발트해-지중해에 있는 국가가 독일로부터 침략을 당하면 세 국가가 힘을 합쳐 격퇴하자고 제안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동맹이나 군사 협정을 체결하자는 제안에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군사협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에, 소련은 스탈린의 최측근인 보로실로프 등 최고위급 장성들을 참석시켜 동원 가능한 소련의 군사력을 일일이 설명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특별한 권한을 갖지 않은 인사를 참석시켰으며, 소련에 비해 매우 미비한 군사력만을 제시했다. 일례로 소련이 약 120개 사단을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고 하면, 영국은 기껏해야 16개 사단을 투입할 수 있다고 했다.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병합하려 하면서 불거진 '체코 위기' 때도 소련은 하대를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가급적 전쟁을 피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에 주도적으로 나서서 독일과의 협상을 시도했다. 소련은 여기에 조금도 끼지 못했다. 체코 위기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뮌헨 회담에도 초청받지 못했다.


소련이 서구와의 연대에 회의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소련 수뇌부에서 '영국에게는 적대적이고 프랑스에게는 냉담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스탈린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1939년 5월, 독일로부터 소련과 몇 가지 사안들을 놓고 협상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 시기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폴란드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폴란드 침공 시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히틀러는, 양면 전선의 위험을 없애기 위해 동쪽의 소련을 구슬려 묶어두려고 했다. 독일이 제시한 협상안은 소련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불가침 조약'과 동유럽 영토 분할에 관한 비밀 의정서, 무제한적인 무역 재개 등이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그토록 바라던 것들이 저절로 들어온 만큼,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8월, 독일 외무장관인 리벤트로프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스탈린이 직접 나와 농담을 건네며 리벤트로프를 환대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협상이 개시됐다. 불가침 조약 건은 무난하게 넘어갔고, 동유럽 영토 분할 건에서 상호 간 이해관계 조정이 있었다. 히틀러가 쟁점이 될만한 라트비아를 포기하기로 하면서 이 건도 합의가 이뤄졌다. 마침내 소련의 외무상인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한 테이블 앞에 앉아 관련 문서에 서명하면서, 독일과 소련 간의 협정이 체결됐다. 이 당시 몰로토프 뒤에 있던 스탈린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이를 계기로 전쟁 위험에서 벗어남은 물론 옛 차르 제국의 영광까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듯하다. 히틀러 역시 협정체결 소식을 접한 직후 "이제 유럽은 내 것이다"라고 외치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동쪽에 대한 염려는 제쳐두고 온전히 서쪽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한편,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국가의 반전 행위에 영국과 프랑스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방심하고 있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뒤늦게 진위 파악에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전 세계를 참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제2차 세계대전이 곧 발발하게 될 것이었다.


■다가오는 파국

독일군이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군도 빠르게 폴란드 영토로 진격했다. 협정에 의거한 대로 폴란드의 절반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목표는 순조롭게 달성됐다. 이후 소련군은 발트해 연안에 있는 국가들을 압박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이 소련군의 영향력 하에 놓였다. 또 다른 표적이었던 루마니아도 자신들의 영토 일부를 소련군에게 넘겨줬다. 스탈린은 이 기회에 소련의 영토와 군사적 지위를 크게 신장시킬 생각이었다. 다만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 핀란드에서는 재앙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소련군은 핀란드를 세력권 하에 두기 위해 수십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공격했다. '겨울 전쟁'이었다. 당초 쉽게 이길 것이라 확신했던 이 전쟁에서, 소련군은 핀란드군의 막강한 방어선인 '마너하임'에 발목이 잡혔다. 명중률이 매우 높은 핀란드군 저격수들과 스키 부대도 소련군을 극도로 괴롭혔다. 4개월 여만에 12만 명이 넘는 소련군 병력이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과거 스탈린의 과도한 군부 숙청으로 인한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숙청으로 전력이 취약해진 소련군은 원시적 보병 전술에만 의존하다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나마 병력을 대폭 충원한 뒤 물량 공세를 펼침으로써, 가까스로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은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핀란드 영토 일부를 할양받았다. 결코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겨울전쟁의 책임을 지고 보로실로프가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티모셴코가 국방인민위원으로 임명됐다. 그는 나름대로 소련군의 전력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즈음에 독일군은 서유럽 전선을 휩쓸고 있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빠르게 함락된 데 이어, 막강한 육군력을 자랑하는 프랑스마저 단 6주 만에 독일군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같은 전개는 스탈린의 바람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그는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서유럽 전선에서 발목이 잡혀 힘이 빠지길 바랐다. 그 사이에 소련군은 전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넓혀나가면서,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계획이었다. 이것이 차질을 빚게 되자 스탈린은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패배를 의아해하면서도, 향후 독일이 소련에게까지 마수를 뻗칠 가능성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는 1940년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나타냈다. 소련에 대한 적개심이 다시 점증했다. 우선 독일군은 서유럽 전선에서 힘겹게 전투를 치르고 있는데, 소련군은 너무도 쉽게 이권을 챙기고 있다는 불만이 작용했다. 소련군이 발칸 국가들까지 노리고 있다는 첩보는 이 같은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나아가 히틀러는 영국과 소련의 관계를 의심했다. 당시 영국은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독일에게 대적하는 국가로 남았다. 독일의 평화협상 제의를 물리치고, 치열한 항공전까지 불사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 같은 저항이 소련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소련이 사라지면 영국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며, 미국 역시 위협적인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봤다. 여기에 히틀러 특유의 사상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오래전부터 독일 게르만 민족이 살아갈 새로운 '생활공간'을 강조했다. 광활한 소련 영토는 이것에 적합한 것이었고, 독일군은 반드시 탈취해야만 했다. 구체적으로 아르한겔스크에서 아스트라한까지 뻗은 지역을 장악한 뒤, 게르만 민족을 이동시키고 그 땅과 원주민들을 식민 통치하는 것이었다. 우랄 산맥 너머에 있는 잔여 지역들은 소련인들로 채울 계획이었다. 이와 관련해 히틀러는 소련을 '독일의 인도'로 만들겠다는 발언도 한 바 있다. 또한 인종주의에 심취한 히틀러는 유대인과 슬라브 민족들을 열등하게 여기고 반드시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조만간 독일군에게 '프리츠'라는 암호명으로 된 총통의 극비 명령이 하달됐다. 소련을 겨냥한 군사작전 예비 연구를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독일군 수뇌부는 히틀러에게 제한 전쟁 가능성을 알렸다. 히틀러의 결심은 시간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얼마 안 가 독일군 장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1941년 중순 정도에 소련의 '절멸'을 목표로 한 대규모 전쟁을 예고했다. 뒤이어 소련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할 대군을 조직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에 독일은 은밀히 소련과의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만책도 펼쳤다. 이탈리아, 일본과 1940년 9월 27일에 맺은 '삼국동맹'에 소련도 들어오라고 종용했다. 소련은 이에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기실 스탈린의 의중은 다른 데에 있었다.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더 넓힐 수 있는 조약 체결을 원했다. 히틀러는 불쾌한 반응을 보이며 소련이 유럽이 아닌 영국령 인도로 나아가는 것을 제안했다. 당연히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히틀러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소련과의 거래를 청산할 최종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12월에 군사 지령 21호인 '바르바로사 작전'에 서명했다. 독일이 세계의 운명을 바꿀 대전쟁을 열심히 준비하는 동안, 소련에선 혼란스러운 모습이 나타났다. 한편에선 독일군의 침공을 예상하고 '소극적' 대비를 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독일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의미 없는 노력이 행해졌다. (후자는 히틀러를 두려워한 스탈린의 의중이 전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1940년 중순부터 국경선 일대에 요새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다만 그 요새들의 방어력은 매우 취약했다. 무엇보다 포와 무선통신 설비가 부족했다. 지뢰나 위장 등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국경선 일대에 기계화 군단과 비행 연대 등도 갖추려 했지만, 전쟁 직전까지 극히 적은 규모로만 갖춰졌다. 더욱이 이곳에 있는 병력은 훈련이 부족한 상태였고 사기도 최저 수준이었다. 지휘 체계가 잘 갖춰져 있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이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즈 등 남서부 지역을 공격할 것을 가정한 군사 시뮬레이션도 돌려봤다. 항공 방어 등 나름대로 그럴싸한 방어 및 반격 계획이 도출됐지만, 실제로 당시 소련군의 전력을 감안하면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일부 지휘관들이 그저 스탈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허황된 계획만을 열거했던 것이다.


히틀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스탈린의 행위는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는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독단적인 판단에만 의거해 히틀러를 상대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독일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할 가능성은 낮으며, 쓸데없이 독일을 자극할 만한 군사 행동은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이러한 기조로 인해, 국경선 일대에서는 소극적인 대비만 이뤄졌다. 불가침 조약 체결 당시 약속한 무역 의무는 충실하게 이행했다. 소련은 1년 5개월 동안 독일에게 석유 86만 5000톤, 곡물 150만 톤, 목재 64만 8000톤 등을 제공했다. 독일 해군에게 유익한 해상 기지를 제공했고, 독일 공군에게 유익한 기상 보고까지 해줬다. 독일이 매우 소극적인 자세로 무역 의무를 이행하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전쟁이 임박한 시기에도 스탈린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때에는 소련 내외에서 독일군이 조만간 침공할 것이라는 경고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유명한 소련 간첩인 리하르트 조르게는 독일군이 1941년 6월 중순에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구체적 정보를 제시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비슷한 경고를 보냈으며, 소련의 정보기관인 NKVD(내무인민위원회)도 그랬다.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소련의 간첩이 직접 침공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 모든 경고들을 무시하거나 반박했다. 독일과 소련의 좋은 관계를 이간질하려는 음모에 놀아난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심지어 전쟁 발발 하루 전날, 한 독일군 병사가 국경선을 넘어 "다음 날 독일군의 침공이 있을 것이다"라고 외쳤을 때 스탈린은 그 병사를 총살하라고 명했다. 이 와중에 스탈린의 의중을 충실히 떠받드는 소련 국영 통신사는 침공 정보를 일일이 반박하며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두 가지 측면에서 스탈린의 판단을 분석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현실적 측면이다. 그는 히틀러의 독일군이 확실한 수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을 침공할 순 없다고 확신했다. 광대한 소련 영토와 군대를 공략하려면, 독일군이 2배 이상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보유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직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양면 전선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봤다. 입수된 첩보인 6월 침공설도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오래지 않아 소련의 혹독한 추위가 찾아올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관념적 측면이다. 자존심이 강한 스탈린은 아마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끝까지 인정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소련 국민들에게 군사적 천재이자 무오류의 인간으로 '개인 숭배'를 주입해 온 마당에, 이와 배치되는 양태를 용납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설령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생각이 들 법도 했겠지만, 이를 억지로나마 억누르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순간에는 고집으로만 일관하지 않았다. 되레 두려움과 초조함에 사로잡힌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줬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주변 사람들이 약간의 조언만 해도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마지막에 가서는 두려움을 못 이기고 슬그머니 경계령을 발동하는 모습도 보였다. 경계령 발동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이미 독일의 대부대가 동쪽으로의 이동을 거의 완료했다. (일전에 독일은 해당 부대가 영국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잠시 동쪽에 주둔하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아울러 스탈린은 독일군이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쪽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소련 침공을 목전에 둔 독일군의 전력은 어마어마했다. 146개 육군 사단으로 편성된 350만 명의 병력과 3350대의 탱크, 2500대가 넘는 항공기 등이 공격 태세를 갖췄다. 독일의 동맹국이라 할 수 있는 핀란드와 루마니아도 적지 않은 병력을 파견했다. 1941년 6월 21일, 마침내 전군에 '도르트문트'라는 음어가 내려왔다. 22일 새벽 3시 30분에, 약 2000km에 달하는 국경선 전역에서 전면 공격을 개시하라는 이었다. 국경선에 있던 소련군 병사들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포착했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운명의 22일 새벽, 결국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인 '독소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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