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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Dec 18. 2024

'독소 전쟁'-지옥과 천당, 스탈린그라드 전투

[3]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

독소 전쟁의 분기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는 군사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한 시가전이었다. 소련군이 극적으로 승리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지옥과 천당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의 참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서술한 대로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철저한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바리케이드와 대전차호, 기관총, 소총, 지뢰 등을 대거 설치했다. 순양함으로부터 함포도 가져왔다. 소개령이 떨어졌음에도 도시를 사수하겠다며 남은 사람들도 많았다. 레닌그라드 사수 임무를 맡은 주코프는 시민들의 행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독일군은 도시의 방어 태세와 히틀러의 명령에 따른 부대 이동 등을 감안해 공격이 아닌 포위를 선택했다. 봉쇄된 레닌그라드는 시간이 갈수록 '지옥'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식량이 떨어져서 시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도시로 식량을 조달하는 유일한 통로는 라도가 호수였는데, 독일군의 공세와 넓은 면적으로 인해 이쪽 조달이 여의치 않았다. 더욱이 독일 항공기들이 날아와 식량 창고, 급수 시설 등을 폭격했다. 간신히 남아있는 생명줄까지 완전히 끊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지나다니는 개, 닭, 고양이 등을 잡아먹었다. 구워서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날것으로 먹었다. 심각한 굶주림은 질병 창궐과 죽음으로 이어졌다. 기력이 쇠잔해진 시민들이 곳곳에서 쓰러졌다. 건물 안과 거리, 방공호 등에서 시체들이 늘어났다. 하루 사망자 숫자가 약 5000명에 달했다. (포위 기간 중에 사망한 레닌그라드 시민의 총숫자는 약 64만 명이었다.) 거리에서 발생한 시체들의 경우 극심한 추위로 인해 얼어붙었다. 간신히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시체들을 옮길 힘이 없었기 때문에 시체들은 처리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됐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일부 사람들은 급기야 식인 행위까지 했다. 이들은 칼로 죽어있는 사람의 살점을 잘라먹었다. 식인 행위를 행한 사람들의 숫자가 수천 명에 달한다는 추정도 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특정 포위기간 중에 레닌그라드의 공장이 적극 가동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곳에 있는 노동자들은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활동해 탱크와 박격포 등 각종 무기들을 상당량 생산해 냈다. 이 무기들은 도시 방어는 물론 모스크바 방어에도 투입됐다.


11월이 됐을 때, 희망의 빛이 조금씩 레닌그라드에 비쳤다. 극심한 추위로 인해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었다. 호수의 얼음 두께가 200mm 이상이 되면서, 비로소 말을 통한 물자 조달이 가능해졌다. 식량 등이 적게나마 레닌그라드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나아질 조짐을 보였다. 소련군이 라도가 호수로 연결되는 간선 철도를 확보한데 이어 호수의 얼음을 가로지르는 화물차 운행로를 건설해 나갔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도 건설에 투입된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일했다. 이들이 기적적으로 임무를 완수함에 따라, 식량과 물자가 대거 레닌그라드로 유입될 수 있었다. 여전히 독일군의 폭격이 지속됐지만 도시는 점차 지옥에서 벗어났다. 그러다가 1943년 초에 레닌그라드는 확실한 구원을 얻었다. 만약 레닌그라드가 조기에 무너졌다면 소련군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가능성이 높다. 독일 북부 집단군은 이곳을 점령한 후 남쪽으로 진격해 모스크바를 협공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군은 이것까지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불굴의 의지로 도시를 방어해 낸 것은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셈이었다. 지옥과 천당을 오간 레닌그라드처럼 모스크바도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코앞까지 다가온 적군에 맞서 주코프가 구원투수의 사명을 짊어졌다.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에 머무르고 있던 를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도를 사수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명장답게 주코프는 대비 태세를 침착하게 해 나갔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동원해 모쟈이스크 방어선과 2차 방어선, 모스크바 내부에 각종 방어시설들을 마련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조국을 구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찼다. 이를 본 목격자들은 '영웅적이고 투쟁적인'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현실은 매우 암담해 보였다. 상대적으로 소련군의 전력은 취약한 반면 독일군은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초전처럼 독일군의 화력이 불을 뿜는다면 소련에게 절망적 파국이 닥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소련에게 극적인 행운이 찾아왔다. 여느 때보다 이른 10월 초부터 눈이 내렸고, 이후에 눈이 녹아 바닥이 온통 진흙탕으로 변했다. '라스푸티차'였다.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둔화될 수밖에 없었다. 길게 늘어진 보급선도 악영향을 미쳤다. 독일군은 모스크바 북쪽과 남쪽 방면에 있는 칼리닌 및 칼루가까지 진격했지만, 시간이 지나 바닥이 딱딱해지길 기다려야만 했다.


잠시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 스탈린은 군과 시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특별한 행사를 기획했다.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였다. 전시에도 굴하지 않고 매년 시행해 왔던 행사를 지속하겠다는 의지였다. 극비리에 준비된 이 행사는 폭설이 오는 날에 별문제 없이 행해졌다. 독일군 항공기들의 폭격이 우려됐으나 기상 조건으로 인해 안심할 수 있었다. 열병식과 더불어 스탈린의 연설 영상이 나왔다. 그는 과거 침략자들을 물리친 러시아의 군사 영웅들을 거론하며 대중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기대했던 대로 군과 시민들의 사기가 어느 정도 고양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열병식에 참석한 병사들은 행사가 끝난 직후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됐다. 11월 중순이 되면서 독일군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땅이 딱딱해짐에 따라 진격이 가능하게 됐다. 모스크바 북쪽 방면에 있던 독일군 제3기갑집단군과 제4기갑집단군이 전진해 클린 시를 점령했고,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도강했다. 남쪽 방면에서는 제2기갑집단군이 모스크바의 후방으로 진격하기 위해 툴라를 공격했다. 마치 뱀이 먹잇감을 공략하듯 서서히 조여드는 모습이었다. 모스크바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들은 툴라 지역에서 길게 늘어진 종심 방어지대를 기반으로 항전했다. 적군의 포위 시도를 차단하고 효과적인 방어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독일군을 가까스로 저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모스크바의 후방이 뚫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소련군의 맹렬한 저항이 있었다. 결사대인 판필로프 부대 등은 적은 병력과 무기들을 갖고 독일군 탱크 수십대를 파괴하며 진격을 저지하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소련군 병사들은 어느 누구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한 명의 적군이라도 더 죽이다가 산화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강력한 저항으로 독일군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상가상으로 악명 높은 추위가 본격적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기실 독일군은 동계 전투 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방한복. 보안경 등이 적절히 보급되지 못해 추위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동상 사고가 13만 건 넘게 발생했다. 탱크와 항공기도 이동의 제약을 받았고 파손되기까지 했다. 독일군은 눈에 띄게 침체된 모습을 보였다. 소련군은 동계 대비에 있어서 만큼은 독일군보다 확실한 우위였다. 병사들의 복장은 물론 차량 등도 난방이 되는 격납고에 보관됐다. 날씨의 도움에 힘입어 소련군은 극적 반전의 계기를 마련해 나갔다.


여러 난관에 부딪힌 독일군은 잠시 공세를 중단하고 소련군에 대한 전력 분석에 들어갔다. 조만간 희망 섞인 분석 결과가 도출됐다. 소련군의 전력이 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으며, 모스크바 이외에서 보충할 수 있는 병력이 매우 적다는 것이었다. 추위가 다소 사그라들면, 다시금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해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도 소련이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그런데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엄청난 반전이 뒤따랐다. 모스크바 전선 너머에, 대규모 소련군 병력(58개 사단)이 은밀히 대기하고 있었다. 이 병력은 어떻게 동원됐을까. 바로 극동아시아에 있던 병력을 대거 빼돌린 것이었다. 원래 소련은 일본의 침략을 우려해 극동아시아에 수많은 병력을 배치해 놨었다. 실제로 몽골에 있는 할힌골에서 소련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중일전쟁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방(동남아시아)행을 선택하면서, 소련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됐다. 간첩인 조르게는 일본군의 남방행이 결정되자마자 이 사실을 즉각 소련에게 알렸다. 스탈린의 긴급 지시로 극동아시아의 소련군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쪽으로 이동했다. 주코프와 소련군 지휘부는 이 병력을 기반으로 한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이들은 추위가 절정에 이르는 12월 5일을 작전 개시일로 정했다. 동계 전투에 취약한 적군의 약점을 정면으로 파고들려는 것이었다. 독일군 지휘부는 이미 대세가 결정됐다고 판단해 소련군의 반격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군 정찰기가 일부 소련군의 이동을 탐지했지만 지휘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12월 5일 새벽 3시, 드디어 소련군은 작전을 개시했다. 대규모 병력이 높이 쌓인 눈을 헤치면서 가열하게 진격했다. 소련군의 공세가 집중된 곳은 클린시와 모스크바-볼가 운하 방면이었다. 이곳에 있던 독일 기갑부대는 크게 당황했다. 가뜩이나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인데, 예상치 못한 소련군의 반격까지 더해지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소련군은 10일 간 이어진 전투 끝에 클린시를 탈환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소련군의 전과가 두드러졌다. 칼리닌 시의 독일군을 격퇴했고, 남쪽의 툴라에 대한 포위를 푸는 데에도 성공했다. 독일군은 독소전쟁 사상 처음으로 명백한 후퇴를 했다. 칼루가로 후퇴한 이들은 다시금 반격을 모색했으나, 소련군의 공세가 이어짐에 따라 여기서도 밀려버렸다. 전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독일군 지휘부는 히틀러에게 방어 및 반격이 용이한 지역으로 군대를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히틀러의 생각은 딴판이었다. "후퇴는 결코 있을 수 없다"라고 못 박았다. 그럼에도 후퇴 요청이 빗발치자, 주요 지휘관들을 해임했고 자신이 모든 지휘권을 인수했다. 히틀러의 독단적인 행태는 앞으로 독일군에게 커다란 악재로 작용할 터였다.


모스크바에 대한 위협이 완화되자 스탈린은 갑자기 의기양양해졌다. 여세를 몰아 소련군이 모든 지역에서 적군을 강하게 몰아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만간 봄이 오면 독일군의 전력이 회복되는 만큼, 그전에 확실한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첨언했다. 그러나 주코프가 반대하고 나섰다. 성급한 공세는 패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소련군의 방어선을 강화하면서 주요 전선 위주로 전투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탈린은 이 말을 무시했으며 소련군의 무조건적인 진격을 독촉했다. 중부 전선은 물론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 등에서 소련군의 공세가 전개됐다. 이는 주코프의 예상대로 패착으로 귀결됐다. 소련군 병사들은 '황소처럼' 용맹하게 돌진했지만, 독일군의 견고한 방어력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스탈린의 쓸데없는 무리수로 인해, 별다른 전과도 없이 약 4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소멸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모스크바를 향해 위태롭게 돌출돼 있는 르제프에 대한 공세도 실패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이 이곳을 통해 모스크바로 진격할 것을 우려해 반드시 탈환하라고 명했다. 소련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소련군은 르제프 공방전에서 연이어 실패했다. 1942년 7월, 약 50만 명의 소련군이 1700여 대의 탱크를 앞세워 공격했지만 3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채 퇴각했다. 11월에도 '화성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공격을 단행했으나 약 34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물러났다. 르제프의 독일군은 비교적 미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최대 규모의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소련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추후 전체적인 전황이 악화되면서 독일군이 자진 철수함에 따라 르제프 공방전은 일단락됐다. 1942년 초에 벌어진 일련의 상황 전개는 스탈린의 군사적 무능을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었다. 모스크바 코앞에서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소련군은, 최고 지도자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곧바로 커다란 홍역을 치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전쟁의 주도권은 여전히 독일군에게 있었다. 이들은 봄이 찾아오자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안점을 둔 곳은 남부 지역이었다. 히틀러는 수많은 광물 자원과 석유가 있는 카프카스 등을 점령해 소련의 전쟁수행 능력을 허물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주변에 있는 장군들은 이것에 난색을 표했다. 무엇보다 소련의 수도를 신속히 함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소련군과 국민들이 정신적 타격을 입고 자멸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히틀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장군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청색 작전'을 입안했다. 이것의 대략적인 계획은 남쪽으로는 카프카스 산맥의 고산 통로를 지나 카스피해의 아스트라한 및 그로즈늬이로, 동쪽으로는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이때 스탈린과 소련군은 치명적 오판을 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주공격이 남부 지역이 아닌 모스크바에 가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영국에서 향후 독일군의 공세 방향을 알려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전쟁 초반에 나타났던 군사적 무능이 다시 재현되는 모습이었다. 이에 6월 말에 전개된 독일군의 공세에 소련군은 쉽사리 무너졌다. (이 직전에 소련군은 하르코프와 크림 반도를 탈환하려다 독일군의 덫에 걸려들어 재앙에 가까운 패퇴를 했다.) 우선 최북단에 있는 독일군이 모스크바와 카프카스 사이에 있는 보로네즈로 쳐들어갔다. 소련군은 참호를 깊게 파고 독일군에 저항했지만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보로네즈를 넘겨줬다. 이후 독일군은 보로네즈 맞은편에 있는 돈 강으로 진격한 뒤, 남쪽으로 이동해 크림 반도에서 북상하는 아군과 결합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동쪽으로 후퇴했다. 수많은 소련 피난민들도 뒤를 따랐다. 독일군 항공기와 탱크는 광활한 초원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며, 후퇴하는 소련군과 피난민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일부 소련군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급히 방어선을 형성해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만간 소련 전체를 새로운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군이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요충지인 로스토프를 내주고 말았다. 과거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보여줬던 강력한 결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려움과 공황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스탈린은 전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악명 높은 명령 227호를 발령했다. 공포에 휩싸여 전선을 이탈하는 '겁쟁이'들을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거나 형벌 대대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NKVD와 저지 부대가 해당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남부 전선에서 뚜렷한 우위를 보이자,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다시 웃음기를 되찾았다. 그러면서 남부 집단군을 두 개로 쪼갰다. 카프카스의 유전을 장악하기 위한 A집단군, 그리고 이들이 원활하게 진격할 수 있도록 '통로'에 해당하는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한 B집단군이었다. 드디어 독소전쟁 최악의 격전장인 스탈린그라드가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독일군은 핵심 표적지인 카프카스를 장악하기 위해 이곳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소련군은 공업 도시들을 먹여 살리는 카프카스를 온존 시키기 위해 이곳을 반드시 사수해야 했다. 파울루스의 제6군이 중심이 된 독일 B집단군은 돈 강을 건넌 뒤 불모의 초원을 빠르게 돌파해 나갔다. 소련군이 저지를 시도 했으나 막대한 희생만을 낳은 채 패퇴했다. 부대 간 통신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는 소련군은 효율적인 기갑전을 펼치는 독일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초조해진 스탈린은 이 시기에 티모셴코를 해임하고 고르도프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해 분위기 반전을 꾀했다. 하지만 독일군 제6군에 더해 A집단군에서 파견된 제4기갑군까지 가세하면서 소련군은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8월 23일, 마침내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볼가 강에서 독일군의 공격이 감행됐고, 8km 길이의 진입로가 만들어지면서 도시 근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연이은 승리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파울루스는 조기에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곳을 겨냥한 독일군의 공세는 하늘에서부터 시작됐다. 600대의 폭격기가 날아올라 무수한 폭탄을 쏟아부었다.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약 4만 명의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지상 작전이 임박한 가운데 스탈린은 이번에도 주코프를 소환했다. 그를 최고 사령관 대리로 임명해 스탈린그라드 방어 임무를 맡겼다. 도시 뒤편에 있는 볼가 강으로 가서 전선을 살펴본 주코프는 전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 병력과 보유하고 있는 무기로는 독일군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옆에 있던 참모총장 바실레프스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예비 부대의 즉각적인 투입을 고려했지만, 섣불리 이를 시행할 수도 없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일단 후방에 병력을 놔둘 필요가 있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지상 공격이 개시되면 며칠 내로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주코프의 생각은 달랐다. 기적이 가능하다고 봤다. 스탈린그라드 방어에 매진하다가, 어느 순간 별도의 부대를 동원해 독일군의 취약한 측면을 기습 공격한다면 적군을 두 동강 내고 도시도 구원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에 대비했던 전략 예비 병력을, 스탈린그라드로 앞장서 진격하는 파울루스의 부대와 나머지 부대 사이에 전격 투입해 극적 반전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일명 '천왕성 작전'이었다. 다만 예비 병력이 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선 45일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이 기간 동안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소련군 제62군이 파울루스의 독일군 공세를 버텨내야만 했다. 초전에는 이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의 소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고, 일부 부대는 후방에 있는 볼가 강까지 단 3km만 남겨뒀다. 소련군은 공장이나 중앙 철도역, 선착장, 도시 중앙에 있는 마마이 고지 등으로 흩어졌다. 독일군의 공세는 맹렬하게 지속돼 스탈린그라드의 수많은 건물들이 폐허로 변해갔다. 이때 소련군 제62군을 이끌던 로파틴은 어처구니없게도 병력을 볼가 강 뒤편으로 후퇴시키려 했다. 당장 맞서 싸워도 모자랄 판에 비겁한 후퇴 및 직무유기를 행한 셈이다. 로파틴은 즉시 해임됐고 새로운 62군 사령관으로 바실리 츄이코프가 임명됐다. 그는 치아에 금니가 잔뜩 달려있고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원초적 싸움꾼'이었다. 원래 중국 국민당 군대의 군사고문으로 있던 츄이코프는 궤멸의 위기에 처해있는 소련군을 시급히 재정비해야 했다. 흩어져 있는 소련군이 지휘부의 통제를 받으며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츄이코프는 마마이 고지에 있는 사령부가 적군의 공격에 노출돼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지만, 급히 다른 곳에 있는 지하 벙커로 몸을 피해 살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독일군은 계속해서 소련군을 조여왔다. 이들은 폐허를 지나 소련군이 있는 중앙 철도역과 마마이 고지 등에 맹공을 퍼부었다. 한때 이곳들이 독일군의 수중에 넘어가기도 했으나 소련군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반격을 가해 일시적으로 탈환에 성공했다. 일대 공방전이 전개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지역의 주인이 계속 바뀌었다. 그래도 전력이 우세한 독일군이 소련군을 조금씩 밀어내는 상황이 전개됐다. 어느덧 소련군은 볼가 강 서쪽에 있는 일부 지역을 간신히 붙들고 버텨나가는 처지가 됐다. 츄이코프와 제62군은 외부와의 통신도 차단돼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소련군이 이쯤에서 전투를 포기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45일을 버티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주코프가 계획했던 천왕성 작전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로딤체프가 이끄는 소련군 제13근위사단이 볼가 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의 아군을 지원했으나 뚜렷한 반전은 이끌어내지 못했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 츄이코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놀랍게도 항복하거나 퇴각할 고민이 아닌, 어떻게 하면 버텨내고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는 스탈린그라드의 현재 상황을 감안해 '시가전'과 '백병전'이라는 전술을 고안해 냈다. 독일군의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도시에는 돌무더기가 쌓였고 건물들은 폐허가 된 상태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소련군에게 유용한 기회로 작용했다. 돌무더기를 독일군의 사격을 피할 엄폐물로 활용했고, 폐허가 된 건물 곳곳에 잠복했다가 기습 공격을 가하곤 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을 잡기 위해 시내를 헤집고 다녔으나,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맹위를 떨쳤던 독일군 항공기의 폭격도 무용지물이었다. 츄이코프의 명령에 따라 소련군이 최대한 독일군과 가깝게 배치되면서 공중 폭격이 전혀 이뤄질 수 없었다. 더욱이 지형지물에 익숙한 소련군이 주로 야간에 공격을 해오면서 독일군은 크게 위축됐다. 낮에는 곳곳에 배치된 저격병들이 독일군 병사는 물론 장교들까지 대량으로 저격했다. 어느새 파울루스와 독일군은 시가전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사전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볼가 강 너머에서 날아오는 다연발 로켓포, '카튜샤'도 독일군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발사될 때 나타나는 특이한 굉음으로 인해 '스탈린의 오르간'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독일군 병사들은 소련군의 야간 기습보다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로켓포를 가장 두려워했다. 비록 독일군이 9월 말에 시내 중심 구역을 상당수 점령했지만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점령했다고 생각한 장소에서도, 어김없이 소련군이 은밀히 잠입한 뒤 기습 공격을 가하면서 무수한 전사자가 발생했다. 명장답게 츄이코프는 병사들의 사기까지 북돋웠다. 앞으로 어느 정도만 버티면 지원군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계속 심어줬다. 파울루스는 크게 당황하면서도 독기가 올랐다.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소련군을 모조리 섬멸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양 진영 간 소모전이 격화됐고 사상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군은 2개 기갑사단 등으로 소련군을 북쪽에 있는 바라카듸 공장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엄청나게 선방했던 소련군은 완전히 구석으로 몰렸다. 제62군 사령부에도 포탄이 날아올 정도로 큰 위기에 처했다. 로켓포가 불을 뿜어 독일군의 진격을 다소 저지했지만, 최후 생존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막판에 독일군이 지쳐버린 게 소련군을 살렸다. 독일군은 2개월 동안 막대한 희생과 극심한 피로에 노출됐다. 이에 마지막 한 방을 날리는 것을 잠시 미루고 참호를 파고 휴지기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은 천왕성 작전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일을 해낸 것이다. 한편, 소련 저편에서 착착 준비되고 있던 천왕성 작전은 11월에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 한창일 때, 작전을 빨리 개시하라고 다그쳤다. 주코프도 도시에 있는 가련한 소련군을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천왕성 작전을 완벽하게 준비하기 위해 스탈린의 지시를 묵살했다. 준비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00만 명 이상의 병력과 약 1000대의 탱크, 1350대의 항공기, 1만 4000문의 중포 등이 마련됐다. 극도의 보안 속에 준비된 만큼 독일군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쯤에서 소련군의 전쟁수행 능력이 소생한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소전쟁 내내 당한 궤멸적 타격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이 같은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핵심은 독일군의 공격이 가해지기 직전에, 주요 기계 설비와 관련 인력을 신속히 후방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달려들어 각각의 공장에 있는 기계 설비를 뜯어낸 뒤, 화물차에 실어 우랄 산맥이나 시베리아 등으로 보냈다. 목적지에 당도하면 곧바로 기계 설비를 설치하고 군수 물자들을 대량 생산했다. 이의 효과는 1942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지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소련에게 각종 무기와 식량, 의료품 등을 지원했다. 스탈린도 미국의 지원이 전쟁 수행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천왕성 작전은 11월 13일 스탈린에게 최종 보고됐다. 11월 19일에 독일군의 북쪽 측면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고, 그다음 날에 남동쪽에서도 공격이 이뤄질 것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츄이코프와 소련군 병사들은 사전에 이 작전의 존재 여부를 알지 못했다. 주코프 등이 얼마나 보안을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군대의 이동도 매우 은밀하게 이뤄졌다. 19일, 마침내 소련군이 독일군의 북쪽 측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측면에는 독일군보다 동맹국인 루마니아군이 더 많이 있었다. 이곳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을 간파한 소련군 기갑부대는 빠른 속도로 들이쳤다. 소련군의 공세를 예상하지 못한 루마니아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독일군의 남동쪽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수많은 소련군 탱크가 들이닥쳐 이곳에 있던 주 방어군인 루마니아군을 격파했다. 불과 4일도 안 돼서 독일군의 주요 지점이 돌파됐고, 위아래에서 진격하던 소련군이 돈 강에서 결합했다. 필리포프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돈 강의 다리를 장악한 뒤, 대규모 소련군이 다리를 건너 빠른 속도로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진격했다. 별안간 진격로가 절단된 독일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파울루스의 독일군과 나머지 군대가 갈라지고 말았다. 그 사이에는 약 160km에 달하는 거대한 회랑이 생겼다. 전쟁 초반에 독일군이 즐겨 행했던 공격 전술이 역으로 독일군의 숨통을 죄는 형국이 조성됐다. 히틀러는 얕잡아봤던 소련군에게 대놓고 뒤통수를 처맞았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급히 만슈타인을 불러 중간에 있는 소련군을 격파하고 고립돼 있는 파울루스의 독일군을 구원하라고 명했다. 이를 예측한 소련군은 철두철미한 방어전에 돌입했다. 회랑에 대규모 병력과 탱크를 깔아놓고,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막아섰다. 잠시나마 사력을 다하는 독일군에게 악간 밀리는 듯한 모습도 보였지만, 곧바로 예비 부대까지 동원해 반격했다. 만슈타인의 공세는 12월 말에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되레 소련군에게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서둘러 드네프르 강 방면으로 퇴각했다. 이제 파울루스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됐다. 졸지에 양 방향에서 포위를 당했으며, 완벽한 전세 역전이 이뤄졌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절대로 항복하지 말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으라고 명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얼마간 전투를 이어갈 순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쟁 물자가 바닥날 것이었다. 간신히 확보한 비행장을 통한 보급품 수송은 너무 적어서 큰 의미가 없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맹렬한 포격과 공중 폭격 등을 가하며 압박했다. 영하 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더해지면서 독일군은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병사들이 그대로 얼어붙어 죽었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병사들은 지나다니는 고양이나 개, 심지어 사람의 시체까지 먹었다. 어느 순간에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의 항복을 종용했다. 일단의 소련군 장교들이 독일군 진영으로 들어가 항복 조건을 전달했다. 하지만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던 파울루스는 명을 받들어 항복을 거부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군이 맹폭을 퍼부음에 따라 산 송장이나 다름없던 수많은 독일군 병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1943년 1월 말이 됐을 때,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의 한 구석진 곳으로 독일군을 몰아넣었다. 아직 기력이 남아있는 일부 독일군은 과거 소련군이 행했던 시가전을 펼치며 끝까지 저항했다. 이 즈음에 소련군은 파울루스의 위치에 관한 첩보를 입수했다. 그가 혁명영웅 광장에 있는 한 백화점 건물에 은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련군이 백화점에 포격을 가한 뒤, 한 소련군 장교가 안으로 들어가 파울루스의 참모진을 만났다. 이들은 항복할 의사가 뚜렷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상관이 지하실에 있다고 알려줬다. 매우 초췌한 얼굴로 소련군 장교를 만난 파울루스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다. 그가 항복에 동의함에 따라 스탈린그라드 전투도 마침표를 찍었다. 약 6개월 동안 이어진 끔찍한 소모전으로 말미암아 소련군 전사자는 약 113만 명, 독일군을 비롯한 추축국 군대는 약 85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항복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파울루스를 맹비난했다. 한때 승리에 대한 확신에 차 있던 독일군 지휘부와 국민들은 일순간 침체의 늪에 빠졌다. 반면 스탈린과 소련군 지휘부는 전쟁의 변곡점이 마련됐다며 크게 기뻐했다. 소련 국민들 사이에서도 환희와 낙관적 전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향후 독소 전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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