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의 기갑전이 펼쳐진 쿠르스크 전투. 약 1500대에 달하는 탱크들이 뒤엉켜 기갑 백병전이 벌어졌다.
■사상 최대의 기갑전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1943년 봄이 찾아오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아픔을 딛고 재기를 모색했다. 기세가 한풀 꺾이긴 했으나 여전히 만만치 않은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만간 만슈타인의 주도로 '성채'라는 암호명으로 된 군사 작전이 입안됐다. 이는 독일군 쪽으로 돌출돼 있는 쿠르스크 시 주변 지역의 소련군을 궤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즉 독일군이 불시에 북쪽(오룔 주위)과 남쪽(하르코프 주위)으로부터 진격해 들어와 돌출부의 목 부분을 절단한 뒤, 전선 팽창부에 펼쳐져 있는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이후에는 남부 주요 지역을 재탈환하거나 북동쪽으로 진격해 모스크바의 후방을 치려는 계획도 세웠다. 만슈타인은 신속한 공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방어선을 강화하기 전에 공격해야 승산이 있다고 했다. 이번에도 히틀러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 우선 충분한 준비가 갖춰져야 하며, 6월이나 7월 초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소련군도 남부 지역에서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전개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만 이것이 어디로 전개될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만약 공격 지점을 잘못 예측한다면, 또다시 남부 전선이 위기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주코프 등은 머리를 맞대고 예상 공격지점을 짚어봤다. 그 결과 독일군이 쿠르스크 돌출부를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찰을 통해 독일군의 이동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예측한 셈이었다. 마음이 급한 스탈린은 독일군의 공세가 있기 전에 소련군이 선수를 치라고 명했다. 주코프가 막아섰다. 종심 방어를 탄탄히 해서 독일군의 공세를 무력화한 다음, 후방에 있는 예비 부대를 동원해 반격하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이전과 달리 스탈린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다. 주변 장군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대부분이 주코프의 주장에 동의했다. 설득된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방어 태세 강화를 지시했다. 돌출부의 북쪽과 남쪽에 소련군이 증강 배치됐고, 전선 팽창부 내에는 7개 군이 들어찼다. 후방에도 대규모 예비 부대가 조성됐다. 총병력은 약 134만 명에 달했다. 3444대의 탱크와 2900대의 항공기, 1만 9000문의 대포 등이 함께 했다. 진지선도 겹겹이 마련됐으며 십자형의 기다란 참호가 만들어졌다. 40만 개 이상의 지뢰와 말뚝으로 만든 탱크덫도 빼곡히 들어섰다. 초전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철저한 방어 태세가 갖춰지는 모습이었다. 이를 상대하는 독일군의 총병력은 약 90만 명이었고 2700대의 탱크, 2000대의 항공기, 1만 문의 대포 등이 있었다.
쿠르스크에서의 전투는 양 국가의 운명을 가를 '대회전'이 될 전망이었다. 독일과 소련 모두 군 전력의 상당 부분을 이 전투에 밀어 넣었다. 여기서 패배하면 훗날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터였다. 양 진영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격 지점은 예측했지만 공격 시점을 특정 짓지 못해 애를 먹었다. 당초에는 5월 경에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해 전 군에 상급 경계령을 하달했다. 5월에 아무 일이 없자 경계 태세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다가 6월에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첩보가 입수되면서 다시 경계령이 내려졌다. 6월에도 독일군의 공격은 이뤄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소련군 지휘부와 병사들에게서 신경질적인 반응들이 나타났다. 적군에게 놀아난다는 불만이 퍼져나갔고 사기도 저하됐다. 전선의 오묘한 정적은 공포감을 유발하기도 했다. 7월 4일이 됐을 때, 비로소 독일군의 공격 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포로로 잡힌 독일군 병사가 다음날 새벽에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직후에 스탈린과 주코프는 선제공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전투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조치였다. 7월 5일 새벽 2시 30분, 소련군의 맹렬한 포격과 공중 폭격이 전개됐다. 곧 있을 공격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독일군은 난데없는 적군의 공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즉시 성채 작전을 단행했다.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독일군 제9기갑군이 북쪽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갔다. 작전은 초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수많은 지뢰와 탱크덫, 그리고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소련군 병사들로 인해 유의미한 진격이 이뤄지지 못했다. 독일군은 탱크와 대포를 증강해 공격했지만, 소련군 역시 예비 부대를 신속히 투입해 저지했다. 독일군은 어떻게든 뚫어야겠다는 집념으로 포기하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꾸역꾸역 나아가긴 했지만, 머지않아 뚜렷한 한계에 직면했다. 포늬리와 올호바트카라는 도시에서 소련군의 방어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특히 올호바트카로 향하는 좁은 접근로에 독일군 탱크들이 밀집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소련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급강하 폭격기가 날아와 대량의 폭탄을 떨어뜨렸고, 대전차포와 중포 등이 잇따라 불을 뿜었다. 큰 타격을 받은 독일군은 기세가 확연히 꺾였다. 나아가 소련군이 7월 12일에 대대적인 반격에 나섬에 따라 독일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쿠르스크 북쪽에서의 성채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독일군은 남쪽에서 돌파구를 마련해야만 했다. 그나마 이쪽은 북쪽보다 훨씬 유리해 보였다. 소련군의 주력이 북쪽에 더 많이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호트가 지휘하는 독일군 제4기갑군이 공세를 전개했다. 최정예로 평가받는 3개의 나치 친위대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이 군대는 그 명성에 걸맞게 단기간에 32km 이상 전진했다. 북쪽 전황으로 침체돼 있던 독일군 지휘부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이때의 소련군은 한번 구멍이 뚫리면 너무도 쉽게 무너졌던 그 소련군이 아니었다. 제1탱크군을 비롯한 대량의 소련군이 적극적인 방어에 나서면서 독일군의 진격이 눈에 띄게 둔화됐다. 독일군은 프숄 강을 도강한 뒤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호트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프로호로프카 방면으로 돌려야 했다. 기세는 한풀 꺾였으나 포기하기엔 이른 상황이었다. 프로호로프카 쪽에 집결한 독일 기갑군은 결정적인 공세를 준비해 나갔다.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티거와 판터 등 600대 이상의 탱크로 방어하는 소련군을 철저히 파괴하기로 작정했다. 독소 전쟁 초반에 화려한 승리를 안겨줬던 기갑 기동전으로 다시금 승부를 보려 했다. 소련군은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챘다. 대응으로써 후방에 있던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탱크군을 동원하기로 했다. 이들은 명령을 받자마자 프로호로프카로 빠르게 이동했다. 3일 밤낮으로 370km가 넘는 거리를 달렸다. 밀집 대형으로 이동하다 보니 독일군 항공기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지만, 소련군 항공기가 적절한 엄호를 해줬다. 고난의 이동 과정을 거친 뒤 전선 근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놀랍게도 낙오된 탱크는 거의 없었다. 기실 소련군 지휘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려 했다. 대규모 독일군 탱크에 맞서 대규모 소련군 탱크로 맞불을 놓은 것이었다. 이때 소련군이 동원한 탱크는 약 850대였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전략을 세워 나갔다. 소련군의 T-34 탱크는 독일군 탱크에 비해 화력이 떨어졌지만, 우월한 기동성을 보유했다. 이러한 이점을 살려 적군의 탱크에 바짝 붙은 후 측면과 후방을 공략하기로 했다. 이른바 '기갑 백병전'을 치르려는 셈이었다. 7월 12일, 마침내 역사상 최대 규모의 탱크전 서막이 오를 참이었다. 양 진영의 탱크들은 탁 트인 평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긴장감 있는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독일군 폭격기들이 나타나 프로호로프카의 숲과 마을에 폭격을 가했다. 이에 소련군 전투기들이 날아올라 폭격기들을 공격했다. 하늘에서 격추당한 항공기들이 잇따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격전의 시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우선 소련군의 포격이 예고성 격으로 가해졌다. 이 직후인 오전 8시 30분, 드디어 로트미스트로프가 암호명 "스탈린"(강철)을 외쳤다. 공격 신호였다. 소련군의 T-34 탱크들이 삼림으로부터 대거 모습을 드러냈고, 개활지를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비슷한 시점에, 독일군 탱크들도 삼림 바깥으로 나와 적군이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한 공간에서 무려 1500대에 육박하는 탱크들이 엄청난 굉음과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나아갔다. 마치 원시 시대에 존재한 거대한 맹수 무리들이 서로를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드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하늘에서도 폭우와 번개가 쏟아지면서 사상 최대기갑전의 묵시록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소련군 탱크들은 초전부터 기동성을 살려 독일군 탱크들에 바짝 붙으려 했다. 독일군 탱크들은 포격을 가하면서 가급적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소련군 탱크들은 적잖은 피해를 입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독일군 탱크들에게 다가갔다. 독일군은 우수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적군을 떼어내지 못했다. 결국 양 진영의 탱크들이 뒤엉켜 버렸다.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갑 백병전이 펼쳐졌다. 탱크들은 서로를 들이받았고 짧은 거리였지만 포격까지 가했다. 상호 간 거리가 워낙 짧았기 때문에 포격의 피해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았다. 더 이상 포격을 할 수 없을 때에는, 탱크 안에 있던 병사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와 적군 탱크에게 화염병과 유탄을 던졌다. 병사들 간 치열한 교전도 벌어졌다. 이들은 크게 손상된 탱크를 엄폐물로 삼아 난타전을 벌였다. 극히 혼란스럽고 원시적인 전투가 무려 8시간이나 지속됐다. 750대에 달하는 탱크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됐고, 그 주변에는 병사들의 시체가 무더기로 쌓였다. 저녁에 이르자 전투가 중단됐다. 누가 승자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다만 탱크를 중심으로 지역 돌파에 사활을 걸었던 독일군이 앞으로 진격해 나갈 여력을 상실한 만큼, 사실상 소련군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었다. 기갑전 다음날, 독일군은 보병을 중심으로 한차례 더 공격했지만 소련군의 진지를 뚫어내지 못했다. 이 시기에 독일군의 병력과 탱크는 절반 이하로 확 쪼그라들었다. 7월 15일, 한계를 절감한 독일군은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쿠르스크 전투의 최종 승자는 소련군이었다. 대규모 기갑전이 벌어졌던 해당 지역은 한동안 수습되지 못한 채 거대한 사막으로 변했다. 훗날 이곳을 시찰하러 온 소련군 장군들은 기괴하게 남아있는 탱크 잔해와 시체들을 목격한 뒤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군의 대반격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소련군의 전력도 크게 축소됐다. 독일군 지휘부는 소련군이 즉시 공세로 전환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들처럼 취약해진 만큼 한동안 재정비에 매진할 것이라고 봤다. (이 시기에는 미군과 영국군이 이탈리아 침공을 감행해, 동부 전선에 있던 독일군 일부가 서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독일군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하는 반전이 뒤따랐다. 소련군이 곧바로 공세로 전환한 것이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공수 교대가 이뤄졌으며,소련군 전쟁수행 능력의 일취월장이 단적으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우선 쿠르스크 북쪽에 있는 오룔과 브랸스크의 독일군 진지가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진지에 작은 틈이 발생하자 소련군 탱크들이 비집고 들어가 방어선을 돌파했다. 탱크뿐만 아니라 보병과 항공기의 활약도 두드러지면서 독일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8월에 오룔과 브랸스크가 잇따라 탈환됐다. 비슷한 시점에 쿠르스크 남쪽에서도 소련군의 공세가 전개됐다. 북쪽과 달리 이곳의 독일군은 강하게 저항했다. 하르코프를 목표로 진격하는 소련군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소련군이 과거처럼 패퇴한 것은 아니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이들은 다시금 능란한 공세를 가해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8월 말에 소련군의 목표지였던 하르코프가 탈환됐다. 자신감을 얻은 스탈린은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단행하라고 명했다. 9월 말 비록 막대한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중부 전선에서 스몰렌스크 탈환이라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아울러 소련군은 남부 전선의 키예프 탈환을 목표로 드네프르 강으로 진격했다. 히틀러의 명에 따라 일찌감치 드네프르 강 방면으로 전략적 후퇴한 독일군은 강 주변에 1개 기갑집단군을 집결시켜 방어에 나섰다. 소련군 병사들은 강력한 결기를 갖고 드네프르 강을 도강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포격이 가해졌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타거나 심지어 헤엄쳐서 강을 건넜다. 강 인근에 수십 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소련군은 이제 키예프로의 진입을 시도할 참이었다. 만슈타인은 키예프 남쪽으로부터 소련군이 진격해 올 것이라 예상했다. 늪이 많은 북쪽과 달리 이쪽은 진입하기가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폭우가 지속돼 땅이 더욱 나빠진 만큼, 만슈타인은 소련군의 남쪽 진격을 확신했다.
명장답지 않은 치명적 오판이었다. 소련군은 북쪽으로부터 진격해 들어올 것이었다. 수많은 탱크와 병력이 늪지를 헤치면서 은밀히 나아갔다. 독일군의 정보망이 취약해져서 사전에 소련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11월 초, 마침내 소련군이 키예프의 북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화들짝 놀란 만슈타인과 독일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많은 병력이 남쪽 방어에 매달렸던 만큼, 북쪽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소련군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이틀 만에 키예프에 있는 독일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11월 6일,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가 탈환되자 소련 전역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주변 사람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피력했다. 1944년 초가 되면서 드네프르 선이 소련군의 표적이 됐다. 지휘관인 코네프는 정교한 기만책을 구사해 독일군의 오판을 유도했다. 남쪽에 제한적인 공격을 가해 시선을 돌린 뒤, 은밀히 북쪽으로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켰다. 키예프 전투와 비슷하게 독일군은 또다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소련군 탱크들이 북쪽으로부터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바람에 독일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다른 지역에 있던 탱크군단도 합세해 적군을 고립 지대로 몰아넣었다. 순식간에 독일군은 포위되고 말았다. 소련군이 맹폭을 가하면서 서서히 조여드는 가운데, 독일군 4개 기갑사단이 아군을 구원하러 왔다. 이들은 한때 외부 포위망을 뚫기도 했지만, 이내 소련군 예비부대의 투입으로 무력화됐다. 고립된 독일군은 각종 포탄을 얻어맞으며 전멸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했다. 눈 덮인 길을 필사적으로 헤치면서 이동을 거듭했다. 조금만 더 가면 지원군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 그 사이 소련군의 공격은 이상하리만큼 완화됐다. 어느 개활지에 다다랐을 때, 독일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적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이동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살육'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개활지로 유인한 것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소련군 탱크들이 전방위에서 밀려왔다. 이들은 독일군 병사들을 그대로 깔아뭉갰다. 육중한 탱크 바퀴에 짓이겨진 병사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됐다. 먼발치에서 소련군의 카작 기병부대가 쏜살같이 다가왔다. 이들은 날카롭고 기다란 기병도를 빼들었다. 그런 다음 독일군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베기 시작했다. 온몸이 난도질당한 병사들이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이미 저항 능력을 상실한 병사들에게도 확인사살과 같은 칼질이 수십 차례 행해졌다. 독일군에 대한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던 소련군은 이 기회에 피도 눈물도 없이 복수를 한 셈이었다. 스탈린은 이 같은 행위를 용인하고 권장했다.
소련군의 반격은 거침없이 지속돼 5월이 되면 크림반도 및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지역을 탈환했다. 이제 남부 전선에서는 동유럽을 향해 진격할 길이 열렸다. 비슷한 시기에 북부 전선에서는 레닌그라드가 오랜 포위에서 벗어났다. 지옥의 문턱을 경험했던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해방의 날이 찾아오자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독소전쟁 초반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소련군의 대반격이 성공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이때 소련군이 승기를 잡은 원인을 막대한 물량 탓으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소련군이 동원한 병력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연속적으로 수십만 명이 죽고 포로가 돼도, 곧바로 수많은 병력이 이를 대체했다. 다만 물량이 전부는 아니었다. 소련군은 매우 고통스러운 전쟁 과정을 거치면서 자체적인 각성을 통해 군의 현대화를 이뤘다. 특히 현대 기갑전에 눈을 뜨면서 탱크 군단과 기계화 군단을 대거 편성했다. 이들은 날이 갈수록 타격력과 기동성의 발전을 이뤘는데, 이는 적군에게서 어느 정도 학습한 결과물이었다. (소련군의 주력인 T-34 탱크는 신세대 이동식 포를 탑재해 독일군 탱크를 능가했다. 추후에는 거대한 포를 가진 IS-2 탱크까지 출현해 전장을 완벽히 장악했다.) 또한 통신 전력도 괄목할 만한 개선을 이루면서 부대 간에 능동적인 연합 작전이 가능하게 됐다. 통신 도청을 통해 독일군의 전략을 간파하고 기만책과 역정보를 흘려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현대전의 핵심인 항공 전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투기, 폭격기, 지상 공격용 항공기 등으로 체계화된 공군 부대가 만들어졌다. 이들의 작전 수행을 도와줄 레이더도 대거 설치됐다. 궁극적으로 소련군은 보병과 탱크, 항공기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면서 독일군을 큰 곤경에 빠뜨렸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수뇌부의 변화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당초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스탈린이 여기저기에 관여하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스탈린이 깨달음을 얻고 2선으로 물러나 장군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함에 따라 원활한 작전이 이뤄질 수 있었다. 군부에 대한 정치권의 영향력도 대폭 축소됐다. 기존에는 군부 내에서 정치 지도위원 등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나, 지휘관의 부관으로 낮아지면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게 됐다. 장군들이 무한 책임감을 갖고 주도적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독일군은 이것과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군부에 대한 히틀러의 간섭과 독선이 갈수록 심해졌고 독일군이 결정적 패착에 이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편, 스탈린은 이 시기에 미국의 루스벨트 및 영국의 처칠과도 긴밀히 소통했다. 이란의 테헤란에서 직접 만나 연합국의 전략과 전후 세계질서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념과 정치 체제 등이 근본적으로 달랐지만,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뭉쳐있는 상태였다. 소련군이 대단한 활약을 펼침에 따라 스탈린을 대하는 서구권 지도자들의 자세도 달라졌다. 스탈린이 말할 때마다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고 각종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려는 의지를 내비쳤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영국과 프랑스에게 노골적으로 하대를 당했던 그 소련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의 처칠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입지가 좁아짐을 느꼈다. 스탈린이 서구권과의 협상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제2전선' 문제였다. 소련군이 동부 전선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는 만큼, 미국과 영국이 독일군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분산시킬 수 있는 조치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독일군의 70% 이상이 동부 전선에 배치돼 있었다. 스탈린은 집요하게 나왔다. 여러 번에 걸쳐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북프랑스 침공 약속을 하라고 독촉했다. 당초 처칠은 이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대신 지중해 등 다른 지역에서 조치 방안을 강구해 보겠다고 답했다. 스탈린이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협상장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얼마 뒤 루스벨트가 스탈린의 요구대로 1944년 5월 중에 강력한 침공 작전(오버로드 작전)을 벌이겠다고 약속하면서 접점이 마련됐다. 스탈린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추후 (미국과 맞서고 있는) 일본에게 선전포고하겠다고 약속했다. 머지않아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에서 거의 동시에 대규모 군사작전이 전개될 터였다. 히틀러의 독일은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난관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