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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Dec 08. 2024

'독소 전쟁'-바르바로사 작전, 소련군의 붕괴

[2]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전격적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군의 대규모 판터 전차가 소련 영토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

■바르바로사 작전, 소련군의 붕괴

소련을 겨냥한 독일군의 공격은 초전부터 매우 신속하고 파괴적이었다. 독일군 항공기들이 빠르게 날아가 위장도 하지 않은 채 활주로에 줄지어 있는 소련군 항공기들을 대거 파괴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66개 기지에 있는 약 1200대의 항공기가 파괴됐다. 주요 표적지인 민스크, 키예프, 세바스토폴에도 무지막지한 폭격이 가해졌다. 경계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이 불가피했다. 이제 지상군이 들어갈 차례였다. 우선 특수 훈련을 받은 독일 낙하산 부대가 소련군 전선 배후로 침투해 통신 절단, 교량 장악 등을 행했다. 뒤이어 북부 집단군, 중부 집단군, 남부 집단군이 작전을 개시했다.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구 페트로그라드), 중부 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 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거쳐 '카프카스'로 각각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워낙 빠르고 화력 역시 막강해서, 국경선 등에 있던 소련군은 순식간에 격파됐다. 기실 이들은 무척 용감했지만 적절한 무기나 정보, 엄호 등이 없었기 때문에 '총알받이'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전선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공격을 받았고, 독일군의 침공 사실도 모른 채 죽어나가는 병사들도 다수였다. 전선 소식은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해졌다. 주코프가 스탈린이 머무르는 곳에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당직 장교에게 그를 빨리 깨우라고 지시했다. 전화상으로 거친 숨소리만 내쉬며 한동안 말이 없던 스탈린은 일단 정치국 구성원들을 소집하라고 명했다. 일찌감치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치국원들이 속속 회의 장소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서도 스탈린은 어이없는 고집을 드러냈다. 독일군의 공격이 히틀러가 알지 못한 채 벌어지는 제한적 도발일 수 있다고 말했다. 주변에 있던 한 측근이 "전해지는 공세 강도를 감안할 때 결코 제한적 도발일 수 없다"라고 반박했다. 스탈린은 창백하고 지친 얼굴로 누군가가 히틀러와 빨리 접촉해 보라고 독촉했다. 몰로토프가 독일 대사인 슐렌베르크를 급히 찾아갔다. 그가 어찌 된 일인지를 묻자, 우려했던 답이 나왔다. "현재 독일과 소련은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충격을 받은 몰로토프는 울먹이며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몰로토프가 돌아와서 전쟁 사실을 알리자, 스탈린은 꽤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얼마 뒤 스탈린은 전시 명령을 포고했고, 몰로토프와 함께 전쟁 개시를 알리는 연설문을 작성했다. 몰로토프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대의는 옳다. 적은 분쇄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 본부도 설치다.


스탈린은 얼마간 전황의 심각성을 알 수 없었다. 주변 참모들이 그를 두려워해 전황을 사실대로 알려주길 꺼렸다. 실상은 스탈린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중부 전선에서부터 이것이 두드러졌다. 독일의 '중부 집단군'은 맹렬한 폭격과 소총 여단으로 브레스트 요새를 점령한데 이어, 모스크바로 향하는 철도와 주요 통신망, 그리고 소련군 제10군이 있는 비알리스토크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호트가 이끄는 제3기갑집단군과 구데리안이 이끄는 제2기갑집단군이 위아래에서 집게발 형태로 포위하면서, 비알리스토크의 소련군은 큰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뒤이어 독일군 제47기갑군단이 빠른 속도로 민스크를 향해 진격했다. 침공 5일 만인 6월 27일, 독일군의 주요 표적지였던 민스크가 포위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함락됐다. 4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졸지에 포로가 됐다. 스탈린은 직접 국방 인민 위원회를 찾아가 이 같은 전황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상당한 듯했다. 별안간 극도로 침체된 모습을 보이며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레닌이 세운 국가를 우리가 다 망쳐버렸다"라는 한탄도 뒤따랐다. 이 직후 소련 정부가 갑자기 정지 상태에 빠졌다. 스탈린이 돌연 통치를 중단하고 자신의 별장으로 가서 잠적한 것이다. 심각한 현실을 인지한 스탈린이 일종의 신경 쇠약에 걸렸다는 설이 있다. 또한 자신의 통치력 및 부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고의로 그랬다는 설도 있다. 최고 통치자의 부재 속에 정부 인사들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독일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마당에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소련 정치국원들은 국가 방위 위원회를 창설하기로 했고, 스탈린만이 이 위원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합의했다. 그런 다음 단체로 스탈린의 별장으로 몰려가 다시 전면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침울한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스탈린은 정치국원들에게 자신이 정말 적합한지를 물었다. 이때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보로실로프가 "자네보다 더 적합한 사람도 없다"라고 답했다.


마음을 다잡은 스탈린은 크렘린으로 돌아와 대국민 연설을 했다. 물을 연거푸 마시며 긴장된 모습이 역력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용어들을 사용했다. 국민들을 '가족', '형제', '친구' 등으로 불렀고, 과거 외세의 침략에 대응했던 군사 영웅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그러면서 역사상 가장 강력하면서도 간교한 적에 맞서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설은 이념이나 혁명적 측면이 아닌 애국적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해,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 등에서 수십만 명이 의용병으로 참전했다. 연설에서는 스탈린 특유의 테러적 발언도 나왔다. 후방에 있는 내부 교란자, 무단이탈자, 불평분자 등을 가차 없이 처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베리야의 NKVD가 내부 교란 등의 혐의를 받는 사람들을 대거 체포한 뒤 잔혹하게 살해했다. 항복이나 포로가 된 자들을 국가 반역자로 간주하는 명령도 발효됐다. 이로써 군대 및 사회 전반에 엄혹한 규율이 자리 잡았다. 소련 내부의 혼란은 잦아들었지만 전황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민스크를 점령했던 독일 중부 집단군은 이제 모스크바 앞의 주요 도시인 스몰렌스크를 공격할 태세였다. 독일군은 하루 만에 드네프르 강 도강에 성공해 소련군의 방어선에 구멍을 냈다. 이후 독일군 제24기갑군단이 스몰렌스크 남쪽에 있는 체리코프로 진격, 스몰렌스크 방어를 위해 북진하는 소련군을 견제했다. 그 사이 제47기갑군단이 스몰렌스크로 곧장 진격해 7월 16일 그곳을 장악했다. 소련군은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으려 했다. 지휘관인 티모셴코는 스몰렌스크에 들어온 독일군이 많이 지쳐있을 것이라 판단해 예비 사단을 동원해 반격을 가했다. 여기를 내주면 수도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 열리기에 사력을 다해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소련군 병사들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대단한 용맹함을 뽐내며 선방했다. 일시적으로 스몰렌스크를 탈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한계가 드러났다. 소련군은 무기와 통신장비, 전차에 사용할 연료 등이 부족했고, 전술적 무능도 뒤따랐다. 특히 이들은 드넓게 펼쳐진 개활지에서 무모한 정면 공격을 자주 감행했다. 착검을 하고 용맹하게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지만, 기관총 세례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졌다. 성능이 좋은 T-34 전차는 연료를 주입받지 못해 정지하기 일쑤였고, 그 위로 독일군 항공기가 날아와 폭격을 가해 파괴시켰다. 결국 소련군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완전히 격파됐다. 이제 모스크바가 공중폭격 사정거리에 들어왔으며, 7월 21일부터 모스크바 폭격이 시작됐다. 다만 독일군의 모스크바 육상 진격은 2주 간 지연됐다. 이에 대해선 후술 하겠다.


본 레프가 지휘하는 독일 '북부 집단군'은 초전에 리투아니아를 거쳐 라트비아로 거침없이 진격했다. 기갑부대의 진격이 워낙 빠르다 보니 보병이 좀처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통상적으로 독일군은 전차를 깊숙이 밀고 들어가게 한 다음 보병을 진격시켜 적군을 소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대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북부의 소련군은 이렇다 할 저항 한번 해보지 못했다. 조만간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에서 멀지 않은 루가 강까지 도달했다. 독일군 입장에선 레닌그라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었다. 소련 건국의 아버지인 레닌의 이름이 걸려있었고, 발트해에 있는 소련 해군의 무력화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군 입장에서는 상징성이 강한 레닌그라드를 절대로 빼앗길 수 없었다. 레닌그라드의 군과 시민들은 만반의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엄청난 길이의 참호 및 도랑을 만들었고, 폭격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건물에 모래주머니를 둘렀다. 도시 곳곳에 대공포도 설치했다. 독일군은 철저히 요새화된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함락을 도모하기 위해 반 인륜적인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전방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소련의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을 앞세우고 소련군 진지로 접근했다. 소련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냉혈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감상주의에 빠지지 말고 동포들도 가차 없이 쏴 죽여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련군 병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이 명령을 이행했다. 9월 26일, 독일군은 시 외곽의 동북부에 있는 라도가 호숫가에 이르렀다. 본 레프는 레닌그라드를 즉각 섬멸하는 게 아닌 포위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무리하게 공격해 과도한 희생을 낳는 것보다 말려 죽이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와 외부를 연결하는 모든 철도를 끊어버렸다.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후방으로 가서 보급로를 차단했다. 동시에 레닌그라드에 대한 항공기 폭격과 포격이 끊임없이 행해졌다. 본 레프는 시 외곽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면서 레닌그라드 안쪽으로 진입할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히틀러가 북부 집단군의 일부 병력을 중부 전선으로 빼돌리면서 포위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향후 900일 간 지속될 것이었다.


룬트슈테트가 지휘하는 독일 '남부 집단군'은 프레미실 요새 등을 점령한 뒤, 거점인 지토미르를 거쳐 키예프로 진격하려 했다. 남부 집단군에는 독일군뿐만 아니라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도 있었다. 후자는 독일군 대비 전력이 취약했기에 후방을 담당했으며, 독일군을 뒤따라 가서 북해 쪽의 항구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독일군은 초전에 매우 순조로워 보였다. 제1기갑집단군은 작전 개시 8일 동안 약 200km를 진격했다. 프레미실 요새에 이어 리비우까지 빠르게 도달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제1기갑집단군의 후방을 보호하며 뒤따라가던 제5군과 6군이 만만치 않은 키르포노스의 소련군과 맞닥뜨렸다. 이 소련군은 T-34 전차를 다량으로 보유한 총 6개의 기갑군단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 제5군과 6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제1기갑집단군의 후방 차단까지 시도했다. 이 전술이 최종 성공한다면, 독일 남부 집단군을 쪼갬과 동시에 앞서 가던 제1기갑집단군을 고립시킬 수 있었다. 소련군은 11일 간 사력을 다해 진격 저지 및 후방 차단을 시도했다. 한때나마 소련군에게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했으나 독일군은 무너지지 않았다. 소련군이 독일군 제1기갑집단군의 후방 차단에 좀 더 주력하는 사이, 제5군과 6군이 제1기갑집단군에게 가까이 다가와 힘을 보탰다. 결국 소련군은 패퇴했고, 남부 지역의 독일군은 다시금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어느새 우크라이나의 대도시인 키예프 코앞까지 당도했다. 다급해진 키르포노스는 지원하러 오는 소련군 제64군단과 27군단을 활용해 독일군 제5군과 6군에 대한 역공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소련군은 전력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독일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소련군은 극히 암담한 상황에 처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히틀러의 의지에 따라 중부 전선에 있던 독일군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왔다. 히틀러는 모스크바보다 자원이 풍부한 남부 지역 공략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여기를 장악하면 소련군의 전쟁수행 능력이 급속히 저하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중부 집단군을 이끌고 있던 구데리안은 모스크바로 신속히 쳐들어가는 게 옳다고 주장했지만, 히틀러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패착이었다. 구데리안의 말대로 모스크바로 곧장 진격했다면 독소 전쟁의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독일군은 본격적으로 키예프 공략에 나설 태세였다. 북쪽과 남쪽에서 전개하면서 키예프를 서서히 조여들 계획이었다. 우선 구데리안의 독일군이 키예프 뒤에 있는 코노토프를 공격 점령해 소련군의 후방을 차단했다. 남쪽에 있던 클라이스트의 독일군은 체르카시와 크레멘추크를 점령했다. 진격 도중에 많은 비가 내려 애를 먹었지만, 구데리안이 보낸 지원군에 힘입어 롬니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두 개 방면에 있던 독일군이 로크호스비차에서 만남으로써, 키예프에 대한 대규모 포위망이 형성됐다. 스탈린의 명에 따라 키예프 사수에 나섰던 소련군은 철저히 고립됐다. 어처구니없게도 키예프에서 소련군을 이끌던 부됸니는 독일군에게 겁을 먹어 일찌감치 모스크바로 도망쳤다. 소련군은 나름대로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지만 전차에 가로막혀 좌절됐다. 또한 도시 곳곳에서 게릴라 전술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독일군은 무차별 폭격을 가하며 응수했다. 이 과정에서 지휘관인 키르포노스가 전사했고, 약 53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병사들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독일군도 1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치열한 격전 끝에 독일군이 키예프 점령에 성공하면서, 우크라이나 잔여 지역과 크림 반도를 노릴 수 있게 됐다.


9월에 접어들자, 모스크바를 겨냥한 독일 중부 집단군의 공세가 개시될 조짐을 보였다. 히틀러는 모스크바와 인접한 지역인 뱌즈마와 브랸스크에서 '태풍 작전'을 전개하라는 지령 35호를 발령했다. 북쪽과 남쪽에 있는 해당 지역들을 거쳐 모스크바로 진입하려는 것이었다. 총병력은 80만 명이었고 1000대가 넘는 전차가 있었다. 지역 방어를 하는 소련군은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은 패잔병들과 민병대로 구성됐다. 이들이 소지한 무기는 턱없이 부족했고 전차와 항공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독일군에 맞서 지역을 사수하겠다는 결기는 대단했다. 9월 30일,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군이 남쪽의 브랸스크 지역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들의 진격 속도는 매우 빨랐다. 번개 같은 강습으로 인해 1주일 만에 브랸스크가 함락됐고 수많은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다. 뒤이어 북쪽의 뱌즈마에 대한 공세도 전개됐다. 독일군은 강력한 포격과 공중폭격 등을 가하며, 소련군에 대한 거대한 포위망 형성을 시도했다. 소련군은 형편없는 전력에도 불구하고 맹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는 못했고 머지않아 궤멸됐다. 마침내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게 됐다. 지금까지의 전황을 감안하면, 모스크바도 곧 함락될 것이 뻔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이 즈음에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는 사실상 승리를 확정 지었다. 히틀러는 베를린의 스포츠 궁전에서 다음과 같은 승리 연설을 했다. "방금 사상 최대의 전쟁에서 왔다. 우리들의 작전 계획은 성공했으며 적국 소련은 패배했다. 200만 명이 넘는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고 전차 1만 8000대를 파괴했으며 항공기 1만 4500대를 격추했다. 소련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는 모스크바를 완전히 파괴해 거대한 인공호수로 만들겠다는 선언도 했다. 이를 들은 청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고, 독일의 모든 언론사들은 '동방 원정 대성공'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히틀러는 승리 선언문에 서명한 뒤, 전쟁의 방향성을 서구로 돌리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에 독일군은 미국과 영국을 겨냥한 군대 재무장 프로그램을 설계해 나갔다.


위기에 처한 모스크바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연일 독일군 항공기들의 폭격이 전개되는 가운데 정부와 시민들, 주요 서류, 장비, 예술품 등을 후방으로 옮기는 소개령이 떨어졌다. 수많은 것들을 이동시킬 대규모 화물 열차가 준비됐다. 기차역에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혼잡이 발생했다. 스탈린도 자신의 가족과 장서들을 보냈으며, 마지막에 방부 처리된 레닌의 유해를 보내기로 했다. 이미 17년 전에 사망한 혁명 지도자의 유해는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나야만 했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 스탈린과 소련군, 남은 모스크바 시민들은 수도를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열심히 진지를 만들며 전투를 준비했다. 라디오를 통해 나온 정부 성명서는 독일군의 파상 공세로 전황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했다. 그럼에도 모스크바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스탈린이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알렸다. 스탈린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어쨌든 최고 지도자가 함께 한다는 사실은 군과 시민들에게 큰 힘이 됐다. 모스크바 주위에 있는 모쟈이스크 방어선에도 6개 군이 투입되는 등 적극적인 방어 태세가 취해졌다. 조만간 이들은 막강한 독일군과 운명을 건 대규모 공방전을 치르게 될 것이었다.


독소 전쟁 초기의 전황을 돌아보면, 독일군의 파죽지세와 소련군의 붕괴로 요약될 수 있다. 독일군은 기동력이 우수한 전차를 앞세운 전격전으로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항공기의 맹렬한 공중 폭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뒤, 전차가 빠르게 돌진해 나갔고 보병이 뒤를 따라가면서 전선을 장악했다. 강력한 화력과 기동성은 승리의 주된 열쇠였다. 이 과정에서 평소 소비에트 체제에 불만이 많았던 비러시아계 사람들이 대거 독일군 측에 가담한 것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반면 소련군은 기본적인 대비 태세가 매우 취약했다. 상술했듯 스탈린의 어이없는 오판으로 할 수 있는 방어 조치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개된 독일군의 기습 공격에 소련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특히 소련군의 수많은 항공기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지상에서 파괴된 것은 치명적이었다. 소련군의 전술적 측면도 최악이었다. 집중 운용을 선보인 독일군과 달리 소련군은 수많은 전차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부대 간 통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우왕좌왕했으며, 항공 전술도 밀집 편대 비행이라는 초보적인 수준에 그쳤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거라곤 적진을 향해 용맹하게 돌진하는 것이었다. 인해 전술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규모 병력이 무작정 달려가다가 독일군의 기관총과 포격에 줄줄이 쓰러지기 일쑤였다. 이에 소련군 전사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폭증해 6개월 만에 무려 266만 3000명이 소멸했다. 전쟁 이전에 행해진 스탈린의 군부 숙청도 유능한 지휘관들의 부재를 낳아 소련군의 붕괴를 촉진했다. 한편,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독일군은 무수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였다. '인종 청소'를 강조한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소련 시민과 유대인, 전쟁 포로, 공산당원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정신병원에 있던 소련인들도 불태워 죽였으며, 포로로 잡힌 소련군 병사들을 수용소로 보내는 대신 굶겨 죽였다. 전쟁 기간 동안 약 7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포로들이 죽임을 당했다. 바비야르와 오데사 등 소련 내에 있던 유대인 약 115만 명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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