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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Nov 23. 2024

'한국 전쟁'-중공군 개입, 완전히 새로운 전쟁

[4] 냉전 시대 최악의 열전

1950년 10월, 압록강을 도강하고 있는 중공군의 모습.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중공군 개입

중국은 일찌감치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할 태세를 갖췄다. 다만 최종적인 파병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이 오고 갔다. 저우언라이와 린뱌오는 파병에 반대했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유엔군이 국경선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펑더화이와 주더는 파병에 찬성했다. 한반도의 무수한 산악 지형을 활용해 적절한 전술을 펼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좀처럼 결론이 도출되지 않자, 마오쩌둥이 독방에서 일주일 가량 고민한 끝에 직권으로 파병 결정을 내렸다. 무엇보다 미군에 의해 '둥베이'(만주) 지역을 침략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발동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선 한반도 이북에서 대처하는 게 보다 수월하다고 판단했다. 이때 나온 유명한 고사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이다. 입술은 한반도 이북, 이는 중국의 둥베이를 의미했다. 북한과의 의리도 생각했다. 국공 내전 당시, 북한은 중국 공산당 인사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등 다방면으로 지원을 했었다. 소련의 전투기 지원 약속도 마오쩌둥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앞서 마오쩌둥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전투기 지원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소극적으로나마 이를 수용했다. (실제로 1951년 4월 소련의 전투기가 한만 국경선에 출현해 미군 전투기와 교전을 벌였다. 소련은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전투기에 중국과 북한을 상징하는 마크를 달았다.) 한반도 파병 결정이 내려지자, 당초 계획했던 대만 공격은 보류됐으며 30만여 명 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이 편성됐다. 총사령관은 시베이군구 사령관인 펑더화이였다. 비록 무기나 장비는 열악했으나, 국공 내전을 통해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군대로 거듭나 있었다. 병력 규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중공군은 서서히 만주 지역으로 이동했다. 교활한 마오쩌둥은 초반부터 교묘한 계책을 구사했다. 파병되는 군대가 중국의 정규군이 아닌, 일부 중국인들이 자원한 '민간' 차원의 군대임을 강조했다. 전쟁의 명칭도 '항미원조전쟁'이라고 일컬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북진이 한창일 때,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약 18만 명의 중공군 선발대(제4야전군 예하 제13병단 12개 사단)가 10월 19일 야간에 지안에서 압록강을 도강했다. 26일에는 8만 명의 중공군이 안동-신의주 통로를 통해 도강했다. 추후에는 약 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이 임강-중강진 통로를 통해 압록강을 건널 예정이었다. 대대적인 병력 전개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중공군의 이동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중공군이 그만큼 신출귀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압록강을 도강한 뒤, 한낮에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산악 지형에 엄폐했다. 그러다가 해가 지면 모습을 드러냈고, 새벽 4시까지 목적지로 신속히 이동했다. 야간에 산지에서 행하는 기동으로 말미암아, 미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을 조기에 발견할 수 없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해 수통에 물을 담았지만, 이미 중공군이 한반도 내륙으로 진입한 뒤였다. 중공군은 당초 원산-평양 이북에 있는 산악 지형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덕천과 영원선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유엔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서, 곧장 방어가 아닌 공세를 펼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마오쩌둥은 기본적인 전투 지침을 하달했다. "중요 지역에 매복해 기습 공격을 가하라. 화력이 약한 한국군을 먼저 공격한 뒤, 미군의 측면과 후방으로 침투해 궤멸시켜라." 기실 국공내전 때 발휘된 전술을 한국전쟁에도 그대로 적용할 예정이었다. 10월 25일, 드디어 중공군의 첫 공세가 개시됐다. 운산에 있던 한국군(제1사단)이 특정 지역에 진입하려던 찰나, 별안간 중공군(제40군)의 기습 공격이 전개됐다. 한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까지 중공군의 개입 여부를 알지 못했던 한국군은 그저 북한군이 화력을 회복한 것으로만 판단했다. 포로로 잡은 중공군 병사를 심문한 뒤에야 비로소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급해진 한국군은 이 사실을 미군(제1기병사단)에게 알렸다. 하지만 미군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제8기병연대에게 신속한 진격과 공격을 명했다. 중공군은 이미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하게 올라오는 제8기병연대가 자신들이 매복한 지역에 들어서자, 재빠르게 포위망을 형성한 다음 격퇴했다. 온정리 등에 있던 한국군(제6사단, 제8사단)도 위기에 처했다. 중공군은 매복 작전을 통해 해당 한국군 사단 예하에 있는 4개 연대를 포위한  궤멸시켰다. 초산까지 진격했던 한국군은 퇴로가 차단됨으로써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서부 전선뿐만 아니라 동부 전선에 있는 황초령에서도 중공군(제42군)의 공세가 전개돼 한국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기습 공격으로, 미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처음으로 청천강으로의 후퇴를 결정했다. 민첩한 중공군은 적군이 온전하게 후퇴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이들은 후퇴하는 미군의 우측에 있는 한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이곳을 뚫어 미군의 퇴로를 차단한 다음 궤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중공군이 우측을 돌파해 개천을 점령하려 하면서 미군과 한국군에 최대 위기가 닥쳤다. 개천이 함락되면 중공군이 순천, 신안주로 진격해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때 한국군 제7사단이 긴급하게 중간에 있는 방어선 격인 비호산에 투입, 중공군 방어에 나섰다. 절대로 뚫리지 않겠다는 결기가 있었던 한국군은 가까스로 방어에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미군은 극적으로 청천강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조만간 중공군의 추가 공세가 전개될 것이라 믿었던 미군은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그런데 중공군이 11월 6일 돌연 적유령 산맥으로 사라졌다. 10여 일동안 휘몰아쳤던 기습적인 폭풍이 믿기지 않게 잦아들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이때 맥아더와 미군 지휘부는 중공군이 개입한 것은 맞지만, 이들의 전력이 워낙 취약해 공세가 지속가능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중공군의 규모가 약 6만 명에 불과하고, 세계적인 수력발전소인 수풍발전소를 확보하기 위한 의용군이라고 봤다. 이러한 판단에 근거해 맥아더는 다시금 대대적인 공세(크리스마스 공세)를 펼치라고 명했다. 불행히도 철저한 오판이었다. 중공군은 나름의 전술적 판단 하에 움직인 것이었다. 명장인 펑더화이는 시범적인 1차 공세를 통해, 미군이 화력은 강하나 중공군이 난해한 지형지물과 신속한 포위 공격 등을 가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조만간 오판을 한 미군과 한국군이 진격해 올 것이란 점도 예측했으며, 어느 정도 유인하다가 불시에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격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서부 전선의 미군(제8군)은 3개 군단으로 나눠 안주-신의주, 운산-초산, 희천-만포진 방면으로 각각 진격했다. 동시에 동부 전선의 미군(제10군단)이 서진해 중공군 포위를 도모하려 했다. 초반에는 순조로운 듯 보였다. 11월 24일, 미군과 한국군은 일부 지역을 탈환했고 압록강과 국경선 인근까지 나아갈 태세였다. 이때 중공군은 숨죽이며 적군이 더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13병단은 적유령산맥 남단, 제9병단은 장진호와 개마고원 인근에 있었다. 25일, 마침내 중공군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이전보다 더욱 빠른 기동을 선보였다. 미군 정면이 아닌, 측면에 있는 한국군(제2군단) 쪽으로 돌진해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당황한 한국군은 순식간에 붕괴됐다. 이후 중공군은 산악지형에서도 우월한 기동력을 선보이며, 덕천과 맹산 일대를 거쳐 군우리와 순천 방면으로 침투했다. 이는 미군 제8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또다시 미군에게 최악의 위기 상황이 도래했다. 미군은 긴급히 튀르키예군을 투입해 중공군을 저지하려 했다. 튀르키예군은 병력의 3분의 1이 소멸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중공군에 맞서 4일 동안 분투했다. 이런 가운데 미군은 재차 청천강 이남으로의 후퇴를 단행했다. 방심하고 있던 상태에서 찾아온 '날벼락 같은' 중공군의 공세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후퇴하는 과정마저도 험난했다. 미군 제8군의 후퇴를 엄호하던 미군 제2사단이 태형 계곡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문제는 중공군의 공세를 계속 막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군은 청천강에서 밀린 뒤 평양 북쪽의 순안-성천에 방어선을 마련했지만, 여기서도 격퇴를 당하면서 평양까지 내주고 말았다. 미군은 어쩔 수 없이 38도선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동부 전선의 상황도 매우 심각했다. 미군 제10군단 예하의 해병 제1사단은 낭림산맥 서쪽으로 진격해 미군 제8군과 연결한 뒤 압록강으로 진격하려 했다. 이에 인공호수인 장진호 일대에 도달했다. 바로 그때,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이 나타나 미군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미군은 그야말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대규모 중공군 병력에 더해 험준한 지형, 거센 한파가 미군을 크게 괴롭혔다. 오로지 철수만이 답이었다. 미군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하갈우리로 철수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흥남까지 철수해야 했다. 이 철수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를 수 있었다. 흥남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에 중공군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장비를 모두 버리고 항공기를 통해 철수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미 해병 제1사단은 적군의 공격을 무릅쓰고 육로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약 2주 동안 이어진 미군의 철수는 눈물겨울 정도였다. 중공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혹독한 추위를 기어이 버텨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했으나, 목적지인 흥남에 극적으로 도달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미 해병 제1사단에 모든 공격이 집중된 사이, 다른 미군 제10군단 예하 부대들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미군이 흥남에 집결하는 데 성공했지만, 고난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북한군 게릴라 부대에 의해 원산이 피탈되면서 육상 퇴로가 완전히 차단됐다. 해상 철수를 해야만 했다. 10만 명이 넘는 인원과 2만 대에 달하는 차량, 3만 5000톤의 각종 전투물자가 있었다. 남쪽으로 가려는 수많은 피난민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총 125척의 선박이 동원돼 이것들을 실어 날랐다. 선박만으로는 부족해 항공기까지 동원됐다. 중공군이 흥남 해두보를 겨냥한 공세 기미를 보이자, 미군 항공기와 전함들이 일제히 중공군을 공격하며 방어했다. 그 사이에 흥남 철수 작전은 계속 이뤄졌다. 12월 24일, 미군 제3사단 철수를 마지막으로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중공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흥남 부두와 미처 수송하지 못한 물자들은 폭파됐다. 동부 전선에서의 기적과 같은 철수는 유엔군에게 약간의 기쁨을 선사했지만, 중공군의 공세로 인한 전면 후퇴는 실로 뼈아픈 일이었다. 그동안 공세에 주력했던 유엔군은 완전히 수세에 몰렸다. 이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다. 태평양 전쟁과 서유럽 전선에서 승승장구했던 무적의 미군이 중공군에게 속절없이 밀린 이유를 말이다. 무엇보다 중공군의 기가 막힌 '전술'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 장착한 주요 무기는 박격포와 산포밖에 없었지만, 전술적 능력으로 약점을 충분히 보완했다. 한반도 특유의 산악지형을 면밀히 파악한 뒤, 하루에 30km에 달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선보이며 적군의 측면과 후방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미군의 강력한 화력은 험준한 산악지형과 중공군의 기동력 앞에서 무력화됐다. 더욱이 중공군은 야간 공세를 선호했으며,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어느 한 곳에 구멍을 내면, 표적 전체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때로는 적군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음산한 피리, 나팔, 꽹과리 소리를 냈다. 일종의 심리전, '함화 공작'이었다. 이를 들은 한국군과 미군은 싸우기도 전에 극도로 위축되곤 했다. 한 한국군 병사는 "중공군은 마치 굶주린 늑대처럼 우리의 약점을 찾았다. 약점이 발견되면 그곳으로 끊임없이 몰려왔다. 진격 나팔 소리가 울리면 우리는 포위된 것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기실 당시 중공군의 병력 규모는 유엔군보다 적었지만, 적군의 약한 고리에다가 병력을 집중 운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인해 전술'이라는 말도 나왔다. 한 미군 장교는 "달빛 아래 중공군이 밀려오는 모습은 마치 밤바다의 새하얀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중공군은 매복과 위장 능력도 뛰어나 미군 정찰에 의해 잘 발견되지 않았으며, 미군이나 한국군에 바짝 붙어서 공중 폭격을 회피하는 영악함도 선보였다. 이 같은 중공군의 전술 능력은 한국전쟁 직전에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미군은 중공군을 얕잡아보고 이들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하지 않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그저 강력한 화력만을 믿다가 큰코다친 셈이었다.


■1.4 후퇴

맥아더도 전황이 심각해졌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돌입했다"라고 말하면서, 중공군을 겨냥해 보다 강경한 대처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워싱턴과 합참에 '만주 폭격'을 건의했다. 전선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말고, 중국 영토로 확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국 해안선 봉쇄와 대만에 있는 국민당 군대의 투입 건의했다. 트루먼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사용 가능한 모든 무기'를 포함해 어떠한 조치도 취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경고했다. 여기서 언급한 모든 무기에는 '원자폭탄'도 들어가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은 소련의 공격을 우려해 미국의 확전 움직임에 명백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국제 정세가 혼돈의 늪에 빠져드는 가운데 38선 지역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곳까지 밀린 유엔군은 중공군이 곧바로 밀고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사기와 전력이 크게 저하된 만큼, 유엔군은 이를 회복할 시간을 반드시 갖고 싶어 했다. 실제로 중공군도 잠시 재정비할 시간을 가지려 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펑더화이에게 "호기를 놓치지 말고 계속해서 적군을 몰아붙여야 한다"라고 다그쳤다. 중공군은 12월 31일에 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총 9개 군단(중공군 6개 군단, 북한군 3개 군단)이 서울과 홍천-원주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임진강을 도강한 중공군은 우세한 병력을 기반으로 동두천과 문산 등에 있는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난타했다. 중동부 지역에 있는 한국군도 중공군의 맹공격을 받고 있었다. 급격한 후퇴로 부대 정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던 한국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의 뒤를 이어 미군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는, 이대로 가다간 앞선 전투처럼 궤멸적 상황이 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미군과 한국군에게 평택-안성 방면으로 철수하라고 명했다. 수도 서울이 다시 피탈되는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당분간 없을 것으로 예상됐던 중공군의 공세가 대규모로 전개돼 허를 찔렸으며, 한 겨울이라 한강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과거처럼 방어선도 형성할 수 없었다. 1951년 1월 4일, 미군과 한국군, 서울 시민들은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1.4 후퇴'였다. 중공군의 괴력에 힘입어 북한군은 3개월 만에 서울에 재입성했다.


홍천-원주 방면에서는 북한군이 거의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북한 게릴라 부대들까지 합세해 전후방에서 공세를 전개함에 따라, 한국군은 초전에 맥없이 무너졌다. 또다시 심각한 위기 상황이 도래했다. 이후 북한군이 원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한 뒤 충주-대전 등으로 진격한다면, 서부 지역에 있는 미군과 한국군의 후방이 위협을 받고 포위 섬멸될 가능성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원주 일대에서 북한군이 저지돼야만 했다.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이 배속된 미군 제2사단이 투입돼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에 더해 미 해병 제1사단도 투입돼 맹활약을 펼쳤다. 북한군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으면서, 양 진영 간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4일 동안 전개됐다. 극적인 승자는 미군이었다. 이들은 원주 남쪽에 있는 고지를 확보하면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원주 일대 전투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계속되는 후퇴로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미군과 한국군이 다시 기운을 차리는 계기가 됐다. 북한군은 중공군에게 더욱 의지하게 됐다. 이 시점에서, 중공군의 변화된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군 지휘부는 파죽지세로 서울까지 내려왔던 중공군이 조만간 추가 공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금강선까지 밀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에 중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고, 한국 정부의 '해외 망명'을 도모할지 여부였다. 이런 고민까지 할 정도였으니, 당시 전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서유럽 국가들도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과의 정전 회담을 모색했다. 그런데 중공군은 곧바로 추가 공세를 전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동안 예상을 뛰어넘는 막강한 전력을 선보였지만, 그만큼 출혈도 심각해 재정비가 절실했다. 병사들의 비전투 손실이 컸으며, 전선의 급격한 확대와 미군의 공중 폭격 등으로 보급 사정이 악화됐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수차례 보급 문제 해결을 건의했지만, 특별한 해법이 도출되지 못했다. 중공군의 진격 중지는 필연이었다. 리지웨이는 전황의 변화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고, 중공군의 현 상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를 먼저 파악하기로 했다. 1월 15일, 연대 규모의 미군이 '울프 하운드 작전'이라는 위력 수색을 단행해 적정 파악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중공군의 부대 배치와 열악한 현실을 알아냈다.


중공군의 공세가 당분간 없을 것이라 확신한 미군은 역으로 '반격'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선더볼트 작전'을 수립했는데, 이는 현 위치에서 한강 이남까지 설정한 5개 통제선을 차례차례 점령하며 북진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은 그동안 중공군에게 당한 경험들을 반면교사로 삼기도 했다. 무작정 진격하다가 중공군의 매복 포위 공격에 노출될 수 있는 만큼, 인접 부대와의 유기적 협조 및 진격 시 상부의 허가를 꼭 획득하도록 조치했다. 미군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처음에는 위력 수색을 하다가 안양-양평선에서 적극적 공세로 전환했다. 수리산과 관악산 등에서 중공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중공군은 보급 문제로 이전과 같은 전투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작전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어느새 미군 제3사단이 영등포-노량진으로 진격해 한강에 도달했다. 김포반도 쪽에서도 눈에 띄게 전진했다. 1.4 후퇴 이후 1개월 만에, 미군과 한국군은 다시 서울을 목전에 두었다. 이들은 곧바로 서울 탈환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남쪽으로 돌출돼 있는 중부 지역을 양평-홍천 일대로 북상시키고, 홍천에서 중공군 주력을 격파한 뒤 서울을 포위 탈환하기로 했다. 중공군 역시 홍천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미군 제10군단은 제2사단과 기갑부대를 중부 지역인 문막-지평리, 원주-횡성 방면으로 각각 진격시켰다. 비교적 순조롭게 나아가던 미군은 2월 5일 홍천에 이르러 중공군과 대치하게 됐다. 이때 미군은 필승 카드로 한국군을 동원한 홍천 포위 공격, 즉 '라운드 업 작전'을 구상했다. 정면의 미군에 더해 한국군 제8사단과 제5사단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작전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효과적 대응으로 한국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라운드 업 작전을 통한 홍천 탈환 계획은 무위에 그쳤다. 다만 동부 지역에서 한국군이 창동리-대관령-강릉 방면으로 나아감에 따라 공세적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유엔군의 반격

한동안 재정비를 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던 중공군은 슬슬 공세를 재개할 움직임을 보였다. 서부 지역은 한강을 활용해 방어하고, 중부 지역에 온 힘을 쏟아 적군을 격퇴한다는 계획이었다. 주요 표적은 미군이 있는 지평리와 한국군이 있는 횡성이었다. 이번에도 중공군은 만만한 한국군을 먼저 노렸다. 2월 11일, 중공군은 북한군과 연합해 엄청난 물량공세를 퍼부으며 한국군을 순식간에 격파했다. 중공군이 원주 방면으로 나아가자 미군은 급하게 방어선을 형성했다. 중공군은 특유의 기습적인 우회 기동을 선보이며 미군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원주를 우회한 다음 제천 방면으로 진격, 미군의 후방을 위협해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한국군이 긴급 투입돼 중공군의 변칙 공세를 막아내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중공군은 13일 지평리에 대한 공세도 전개했다. 당초 미군은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기도 전에 철수하려 했다. 중공군도 그럴 것으로 예상해 미리 퇴로 차단에 나섰다. 그런데 공세적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었던 리지웨이가 고수 방어를 천명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군은 견고한 진지를 만들며 중공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6개 연대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이 진지를 에워싸며 공격해 들어왔다. 인해 전술이 펼쳐지는 가운데 미군은 막강한 포병 화력을 내세워 맞섰다. 중공군은 이전과 달리 결사적으로, 그리고 강력히 응전하는 미군에게 당황했다. 시간이 갈수록 미군의 화력이 중공군의 물량 공세를 앞지르는 모양새가 나타났다. 더욱이 미군에 배속된 프랑스군이 탁월한 근접전을 선보이며 중공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중공군의 공세가 점차 시들해질 즈음, 미군 제5기병연대가 포위망 돌파까지 단행했다. 결정적으로 이것이 성공함에 따라 중공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미군은 최초로 방어전에서도 전과를 올리면서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다. 반면 등등 했던 중공군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였다.


미군은 여세를 몰아 즉시 반격하기로 했다. 주요 표적은 돌출돼 있는 지역의 중공군 주력이었다. '킬러 작전'이라고 명명된 반격은 미군 제9군단이 원주-횡성 방면, 미군 제10군단과 한국군 제3군단이 제천-평창 방면으로 각각 전개하는 것이었다. 다만 작전에는 여러 난관들이 뒤따랐다. 적군의 저항은 물론 폭설과 험준한 지형 등이 발목을 잡았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지형을 활용하며 버티기를 도모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미군과 한국군은 고군분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3월 4일, 미군 제9군단에 배속된 미 해병사단이 중공군을 극적으로 격파하며 횡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미군 제10군단과 한국군 제3군단도 적군을 격파한 뒤 강릉까지 진출했다. 남쪽으로 돌출돼 있던 전선이 북상하며 한강-횡성-강릉으로 균형 잡힌 전선이 형성됐다. 이제 미군과 한국군은 본격적으로 서울 탈환에 나섰다. 정면 공격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이전에 써먹었던 양익 포위 전술을 다시 구사하기로 했다. 즉 횡성에서 홍천-가평, 춘천 방면으로 진격해 적군을 둘로 가른 다음, 정면인 한강과 측면인 가평-춘천에서 적군을 포위 섬멸하며 서울을 탈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리퍼 작전'으로 일컬어졌다. 막강한 화력을 갖춘 미군 제9군단은 빠르게 진격해 3월 14일 홍천 외곽에 당도했다. 미군이 기대한 대로 허를 찔린 중공군과 북한군은 급격히 와해됐다. 위기감을 느낀 서울의 중공군은 싸우기도 전에 철수 움직임을 보였다. 이 틈을 타 한국군이 15일 한강을 신속 도하해 서울을 재탈환했다. 1.4 후퇴 후 70일 만에 거둔 쾌거였다. 서울 수복 이후에도 유리한 전황은 계속됐다. 19일 춘천을 탈환한데 이어 '요철 작전'을 통해 38도선에서 16km를 북상시키며 '캔사스 선'을 형성했다. 나아가 리지웨이는 중공군이 공세를 위해 집결하고 있는 '철의 삼각지대'(평강-철원-김화)도 확보하기 위해 '불굴 작전'을 전개했다. 이는 캔사스 선에서 최대 20km를 북상시키는 것이었다. 미군은 철원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내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리지웨이는 이쯤에서 만족하고, 조만간 있을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미국 내부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을 지속하거나 확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에 현재까지 형성된 전선을 돌파해 계속 북진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유는 북진할수록 중공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가장 강력한 적인 '소련'이 참전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해 정치적 협상을 선호했다. 하지만 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협상이 아닌 군사적 승리를 목표로 했던 그는 트루먼 행정부의 입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북진하길 원했다. 만주 폭격과 중국 해안선 봉쇄, 국민당 군대 투입 등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극과 극으로 대립하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이런 가운데 4월 11일,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과 미 극동군 사령관 직위에서 전격 해임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과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행위를 군 통수권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맥아더의 명성과 전과가 대단한 것은 알았지만, 항명과 확전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맥아더는 귀국한 후 가진 미 의회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새로운 유엔군 사령관이 됐다. 제8군 사령관으로는 밴 플리트가 부임했다. 맥아더와 달리 리지웨이는 트루먼의 의중을 잘 받드는 편이었다. 북진을 자제하고 현 전선을 지키는 쪽에 무게를 뒀다. 자연스럽게 정전과 휴전 분위기도 달아올랐다. 한편, 중공군은 다시금 대규모 공세를 개시할 참이었다. 목표는 서울 탈환이었다. 주력인 중공군 제19병단이 4월 말 개성-문산 방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곳에는 한국군 제1사단과 영국군 제29여단이 있었다. 중공군은 시종일관 취약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군 쪽으로 주력을 투입했다. 자주 돌파를 허용했던 한국군은 이번엔 달랐다. 영국군과 함께 상당히 선방하면서 지역 방어에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김화-포천 방면에 있던 미군(제24, 25사단)이 중공군 제9병단의 공세를 따돌리고 안전하게 철수, 훗날을 도모할 수 있었다. 조공이 이뤄졌던 인제에서도 미군과 한국군은 방어를 해냈다. 문제는 중부 전선이었다. 한국군(제6사단)이 사창리 전투에서 대패함에 따라 전선이 급격히 붕괴됐다. 중공군은 가평까지 점령했고, 미군과 한국군은 홍천강 이남으로 물러나야 했다. 서울 피탈 위기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중공군은 5월 1일 노동절에 서울에서 시가행진을 하겠다며 엄포를 놨다. 그러나 예전의 중공군이 아니었다. 여전한 보급 문제로 인해 '공세 종말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게다가 안전하게 철수했던 미군 제24, 25사단이 서울 북방의 마석우리-대포리에 견고한 방어선인 '노 네임선'을 형성했다. 중공군은 이곳에 공세를 펼쳤지만 좀처럼 돌파하지 못했다. 되레 미군의 강력한 화력에 말려들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은 포병의 무차별 포격에 더해 항공기의 근접 폭격까지 행했다. 심지어 이때 중공군은 한없이 얕잡아봤던 한국군에게도 역공을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펑더화이는 전사자(약 13만 명)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자 역부족을 느끼고 퇴각을 명했다. 이로써 중공군이 야심 차게 준비한 춘계 대공세는 약간의 남진 성과만 올린 채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기세가 크게 꺾여 더 이상 대대적인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군의 강력한 화력과 중공군의 보급 문제는 추가 공세를 전개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중공군은 곧바로 앞선 공세에 비견될 만한 추가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전 협상이 조만간 열릴 것이라는 전망은 중공군의 움직임에 추동력을 더했다. 조금이라도 양호한 전황을 만들어야,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펑더화이는 이번 공세 때 적군의 기세를 확실히 꺾어버리기 위해 '3중 양익 포위'라는 거대한 전술을 구상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중동부 지역(신남-현리 일대)의 한국군을 동쪽과 서쪽에서 3중으로 포위해 격멸한 다음 미군의 측면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5월 16일 서쪽에서 한국군 제7사단을 공격하면서 작전의 포문을 열었다. 중공군 제20군과 27군 예하의 6개 사단이 맹공을 퍼부었다. 한국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속절없이 무너졌으며 오마치 고개를 내주고 말았다. 뒤이어 중공군 제27군이 신남 일대에 있는 한국군의 중앙부를 돌파해 오마치 고개 후방에 있는 침교를 확보했다. 서쪽에서 2중 포위망이 형성됨에 따라 한국군(제3군단)은 갇히고 말았다. 머지않아 제3군단에게 비극이 닥쳤다. 이들은 무작정 현리로 간 뒤 오마치 고개 돌파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포위망을 뚫지 못하자 엄청난 혼란이 발생했다. 3군단 병사들과 지휘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지휘통제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중공군의 거센 공격까지 받아 군단 병력의 약 70%가 소멸했다. 추후 제3군단은 미군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는 불운까지 겪었다. 중공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쪽에서의 3중 포위를 시도하려 했다. 중공군 제12군이 자은리 일대의 한국군을 돌파한 후 포위망 형성이 가능한 지역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중공군이 자은리 일대에서 한국군이 아닌 미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미군을 한국군으로 오인한 결과였다. 결국 미군이 벙커힐 전투에서 무제한 포격으로 반격하면서 중공군의 3중 포위망은 형성되지 못했다. 서쪽뿐만 아니라 동쪽에서도 포위망 시도가 전개됐다. 북한군 제5군단이 가리봉 일대의 한국군 제3사단을 돌파해 오마치 방면으로 진격, 중공군 제20군과 연결되려 했다. 한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오마치가 중공군에게 점령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 포위를 우려해 스스로 철수하고 말았다. 북한군은 운 좋게 가리봉을 거쳐 운리산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험준한 지형이 북한군의 발목을 잡았다. 이에 중공군과 온전히 연결되지 못했고 방대산 후방 통로를 차단하지도 못했다. 설악산 일대에 있는 한국군의 전투지경선 우측을 돌파해 계방산-장평 일대를 점령한 뒤 중공군과 2중 포위망을 형성하려 했던 북한군 제2군단도, 설악산 및 한계령의 험준함과 적설로 인해 실패했다. 비록 펑더화이가 계획했던 포위 전술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중공군은 현리에서 속사리까지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중공군은 홍천 일대 공격에 나섰다. 미군(제2사단)은 적군의 돌파구가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했다. 벙커고지 일대에 탄탄한 진지를 구축한 뒤, 진격해 오는 중공군에게 맹렬한 반격을 가했다. 다행히 홍천 방어전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아울러 현리 돌파구의 동쪽에 있는 대관령과 강릉에서도 중공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 최정예 부대인 수도사단이 해당 전과의 중심에 있었다. 한편, 이 즈음에 서울 인근에 있던 미군(제3사단)이 재빠르게 중동부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공군의 공세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대담한 목표를 가졌다. 중점을 둔 곳은 운두령이었다. 이곳은 중공군의 주력이 집결돼 있기도 했거니와 현리와 속사리를 연결하기도 했다. 점령한다면 중공군의 보급로를 절단해 효과적으로 무너지게 만들 수 있었다. 미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한 끝에, 5월 22일 운두령을 점령했다. 과연 주력이 궤멸되고 보급로가 절단된 중공군은 여지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중공군은 서부 지역에 있는 용문산에서 한국군 제6사단에게 대패했다. 이로 인해 한국군은 제3군단의 참패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또다시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한데 이어 반격에도 착수했다. 서부 지역의 미군 제1군단은 문산-포천선을 탈환한 뒤 5월 27일 캔사스 선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도망가기 바빴다. 미군 제9군단도 가평-춘천선을 탈환했고 화천까지 공격했다. 이때 한국군이 화천댐 전투에서 중공군을 보기 좋게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동부 지역의 한국군(제1군단)도 중공군을 잇따라 격파한 뒤 약 40km를 북진했다. 다만 미군이 중공군을 격멸하기 위해 양구-인제 방면 등에 포위망을 구축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게 오점으로 남았다. 미군과 한국군은 캔사스 선에 이어  작전통제선'와이오밍 선'까지 진출했다. 기세를 감안하면 더 많이 북진할 만도 했다. 하지만 미군의 마음은 다른 데에 있었다. 적당한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고 명예롭게 물러나고 싶어 했다. 이에 따라 정전 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터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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