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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Oct 02. 2024

'태평양 전쟁'-진주만 공습, 승승장구하는 일본군

[2]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당시, 기습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미군 전함.

■진주만 공습

기실 진주만 공습 이전, 일본군은 성공적인 작전 수행을 위한 대비를 어느 정도 해놨다. 스파이들을 통해 미 해군 방어시설과 비행기, 함정의 종류 및 동향 등을 파악했다. 진주만과 오아후 섬의 지형지물도 숙지했으며, 실제 축척대로 만든 모형 군함을 활용해 공습 시 진입 방법 등을 이미지 트레이닝했다. 진주만의 지형과 흡사한 일본 규슈의 사쿠라섬 가고시마만에서 실전 훈련을 하기도 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 함대는 이제 미 해군의 심장부를 치기 위해 12일에 걸쳐 6500km에 달하는 거리를 항행했다. 항행하는 동안 보안에 철저히 신경 썼다. 민간상선이 다니지 않는 곳과 미군 정찰기가 비행하지 않는 곳만을 선정해 나아갔다. 전파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무선 침묵' 상태를 유지했고 바다에 쓰레기조차 버리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군의 공격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다. (미군 일부가 일본군 잠수함을 목격했고 방공용 레이더에 일본 해군기들이 탐지되기도 했지만, 미군은 이것을 대대적인 공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넘겨 버렸다.) 일본군은 9일 만에 공격이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진주만에 정박해 있는 미 태평양 함대와 비행장에 있는 항공기 등은 일본군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처지에 놓였다. 운명의 8일 새벽,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각 항모에 있는 항공기 183기를 출격시켰다. 후치다 비행총대장의 돌격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별안간 진주만 내에 있는 미군 전함과 육상기지 등을 집중 폭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뇌격기에서 발사된 어뢰들도 전함들을 맹폭했다. 이 어뢰들은 진주만의 얕은 수심에서도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만들어진 최신형 무기였다. USS 웨스트버지니아, USS 네바다, USS 애리조나, USS 오클라호마 등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졸지에 대규모 기습공격에 노출된 미군들은 어안이 벙벙할 겨를도 없이 일본군의 폭격 세례에 무너졌다. 비행장에 있던 미군 항공기들도 미처 이륙하지 못하고 대부분 지상에서 파괴됐다. 이 와중에 일부 미군 항공기들이 어렵게 날아올라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소수의 일본군 항공기들을 격추하면서 선방했지만 머지않아 제압됐다.


일본군의 공격은 계속됐다. 1차 공격으로부터 1시간 뒤, 일본군 2차 공격편대 171기가 출격했다. 이미 진주만은 1차 공격으로 인해 사방이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인 상태였다. 일본군 폭격기들은 대공포를 쏘는 미 함들과 미군 격납고 등을 맹폭했다. 이 시기에 미군이 반격 역량을 완전히 상실함에 따라 일본군 항공기들은 한 대도 격추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기습은 매우 성공적으로 보였다. 미군의 전함 6척, 중순양함 1척, 유조함 2척이 격침됐다. 아울러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3척, 보조함 3척이 크게 파손됐다. 미군 항공기는 약 300대가 파괴됐으며, 지상에 있던 여러 시설물들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인명 손실은 3000명 넘게 발생했다. 반면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2차 공격 이후 일본군 내부에선 3차 공격 필요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나구모' 제독은 미군에게 충분히 타격을 가했다고 판단했고, 혹시 모를 반격 가능성 등을 감안해 공격을 중단하기로 했다. 나구모는 '기대 이상의 성과'에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이는 좋은 결정이 아니었다. 미군의 오일탱크와 병참기지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아 미 태평양 함대가 회생할 수 있는 불씨를 남겼다. 이밖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진주만 공습에서 미군 전력의 핵심인 '항공모함'을 단 한 척도 파괴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미 항공모함인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등은 공습 당일 진주만에 있지 않고 대서양이나 미드웨이에 있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직전에야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진주만 공습은 한편으론 일본의 훌륭한 성과로 여겨졌지만, 다른 한편으론 미국의 거센 반격을 예고하는 단초이기도 했다.


일본군 수뇌부는 몇 가지 찝찝한 면에도 불구하고 미군에 상당한 타격을 줬다는 것에 만족했다. 일본 국민들도 대체로 환호했다. 그런데 진주만 공습은 일본보다 미국에 훨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정치인들과 군부, 국민들은 신속히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참전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던 고립주의자들도 이제는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들에 맞서 '정의로운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 참전 여론이 급속도로 들끓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진주만 공습 직후 의회에 나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어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미국 시간),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항공대에 의해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육해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방어를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군에 지시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에 가해진 격렬한 공격의 성격을 우리는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이번 계획적 침공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미국 국민들은 정의로운 힘을 모아 완전한 승리(absolute victory)를 거둘 것입니다.... 우리 군에 대한 확신과 우리 국민들의 무한한 의지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주님 도와주소서." 이로써 영국과 중국 등이 그토록 바라던 미국의 참전이 이뤄졌다. 미국 청년들은 90%에 가까운 입대율을 보이며 자발적으로 전쟁에 나섰다. 군수공장들도 대거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이 거대한 국가는 전시 체제로 들어갔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말처럼 '잠자는 사자'가 깨어나고 있었다. 다만, 불의의 습격을 당한 미국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전까지는 '일본의 시간'이었다.


승승장구하는 일본군

일본군은 개전 이후에 사력을 다해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해 나갔다.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최서단에 있는 미국령 도서인 '괌'을 공격했다. 당시 괌에는 소수의 미 해병대 병력과 소형함정들 만이 존재했다. 일본군은 이곳을 단숨에 함락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길버트 제도의 마킨 섬, 타라와 섬도 손쉽게 점령했다. '웨이크 섬'을 겨냥한 공격도 감행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수월하지 않았다. 10일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습을 가한 뒤, 육군을 섬에 상륙시키기 위해 함정들을 해안가로 이동시켰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미 해병대는 즉각 반격하지 않고, 적군 함정들이 해안포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길 기다렸다. 함정들이 진입하자 미군은 집중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의 구축함과 경순양함 등이 격침되거나 대파됐다. 그 안에 탑승해 있던 300명 넘는 승조원들은 전사했다. 1차 전투에서 충격적 패배를 당한 일본군은 일단 물러났다. 이후 전력을 증강한 다음 재차 웨이크 섬 공략에 나섰다. 일본군의 각오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야말로 '독기'를 품었다. 섬에 상륙한 일본 육군은 미군의 기관총 세례에 큰 피해를 입었으나 집요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함정들도 해안포의 위협에 노출됐지만, 굴하지 않고 깊숙이 들어가 미군 방어선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견고해 보였던 미군의 주요 거점들이 차례로 함락되기 시작했다. 결국 태평양 전쟁 초기, 가장 격렬했던 웨이크 섬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군은 '말레이'와 '필리핀' 방면에서도 공세를 감행했다. 우선 말레이 방면에서 항공격감작전과 상륙작전이 동시에 이뤄졌다. 일본 육군은 말레이 반도 동쪽 해안의 싱골라와 코타발루에 상륙, 그곳에 있던 영국 항공기들을 파괴해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 해군이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해 싱가포르에서 동양함대를 출동시켰다. 톰 필립스 제독은 상황을 안이하게 판단하며 작전을 전개했다. 영국 공군의 지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호위함이 매우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일본군은 영국 함대의 전개 소식을 접한 뒤, '공군'을 동원해 이를 궤멸시키기로 했다. 8대의 폭격기와 25대의 뇌격기가 출격했다. 당초 일본 항공기들은 영국 함대를 찾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일본군 정찰기 1대가 쿠안탄에서 함대를 발견했다. 즉각적으로 일본군 뇌격기 편대 등이 영국 함대를 겨냥해 맹폭을 퍼부었다. 함대의 주력인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가 엔진실과 지지대 등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일순간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이 함선들은 서서히 침몰했다. 일본군의 항공 작전은 영국 해군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동양함대를 끝내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소식은 영국은 물론 연합군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추후 회고록에 "말레이 해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큰 충격을 안긴 사건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반면 일본의 사기는 크게 올랐으며 해당 전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해전은 진주만 공습과 더불어 해전의 주도권이 함선에서 항공기로 넘어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한편 말레이 반도에 상륙했던 일본군은 이제 이곳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움직였다. 말레이 반도에는 영국군이 상당히 많았고, 진지 및 정글도 있어서 일본군의 공략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재빠른 기동력과 비교적 가벼운 무게를 가진 150대의 전차들이 일본군의 승리를 견인했다. 진격로에 있는 대부분의 교량은 무거운 이동물체들이 지나갈 수 없었는데, 일본군 전차는 여기를 무난하고 신속하게 통과했다. 영국군은 환경적 요인으로 전차가 필요 없다고 판단해 보병 위주로 구성됐다. 더욱이 병력 규모는 컸지만 숙련병들은 대개 유럽 전선으로 가 있는 상태였다. (인도 등 식민지에서 온 병사들이 많았다.) 일본군은 이점을 적극 활용하며 속도전을 단행했다. 영국군은 빠르게 돌진해 오는 일본군 전차들을 상대하는 게 역부족이었다. 병사들 개개인의 대응 능력 자체도 떨어졌고, 맞대응할 만한 전차도 보유하지 못해 속절없이 무너졌다. 영국군은 수많은 군수물자와 병력을 잃고 싱가포르로 후퇴했다. 말레이 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곧장 '싱가포르'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이곳 주변을 방어하던 영국군은 치명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방어물이 해상용이었기 때문에, 육상에서 밀고 들어오는 일본군을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영국군은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시키는 실수도 저질렀다. 일본군의 탁월한 기만 전술도 빛을 발했다. 이들은 섬 동쪽으로 적군의 시선을 유인한 다음 조호르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이후 싱가포르 섬 상륙에도 성공한 뒤 부킷티마 고지를 점령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한 영국군 사령관 퍼시벌은 고심 끝에 일본군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영국은 '참담한 패배'를 당해 수많은 식민지를 상실한 반면 일본은 막대한 물자를 노획해 전력의 개선을 이룰 수 있었다.


필리핀 방면에서도 일본군은 항공격멸전과 더불어 상륙을 시도했다. 7일 간 육군항공부대가 항공격멸전을 전개했다. 일본군 항공 전력의 핵심인 '제로센'은 압도적 기량을 선보이며 미군 항공기들을 궤멸시켰다. 그 사이에 일본 육군은 루손 섬의 북쪽과 남쪽에 상륙해 미군을 협공할 태세였다. 이에 미 극동지역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를 포기하고, 모든 병력을 바탄 반도로 후퇴시켜 지구전에 돌입하기로 했다. 1942년 1월 2일,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마닐라를 점령했다. 바탄 반도의 미군은 한동안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하며 버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고 질병까지 창궐해 방어전을 지속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전력을 더욱 증강시킨 일본군은 바탄 반도를 정말 포위한 뒤 코레히도르 섬 요새까지 함락시켰다. 중과부적을 절감한 맥아더는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I shall return)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호주 방면으로 탈출했다. 이제 일본군은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자원의 보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눈독을 들였다. 연이은 승전에 힘입어 이들은 '자바 작전'을 한 달가량 앞당겨 실시하기로 했다. 일본군은 우선 보르네오 섬을 공격해 손쉽게 점령했다. 뒤이어 일본군 공수부대가 셀레베스 섬의 북단 메나도에 공중강습을 전개했다. 네덜란드군은 메나도 비행장에서 거세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연이은 공격으로 패퇴했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일본군은 2월에 티모르 섬과 발리 섬에 대한 공격도 전개해 성과를 올렸다. 이후 수마트라 섬 최대의 유전지대인 팔렘방에 대한 공세가 펼쳐졌다. 여기에 투입된 일본군 공수부대는 절반이 현지인으로 구성된 빈약한 적군을 손쉽게 공략했다. 겨우 이틀 만에 일본군은 동남아 최대의 유전 및 정유시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자바 섬뿐이었다. 일본군의 자바 섬 상륙을 막기 위해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ABDA) 연합함대가 출격했다. 하지만 일본 해군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일본군 함대는 제1차 자바 해전에서 네덜란드군 경순양함과 구축함, 영국군 구축함 등을 격침시켰고 연합함대 사령관인 카렐 도르만을 죽였다. 뒤이어 펼쳐진 순다 해협 해전에서도 미군의 중순양함, 호주군 경순양함, 네덜란드군 구축함 등을 격침시켰다. 끝으로 제2차 자바 해전에서 잔존 함정들에 대한 공격까지 성공적으로 이뤄짐으로써, 일본군은 해상에서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했다. 2월 말, 일본군은 자바 섬의 동쪽과 서쪽에 상륙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특히 동쪽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뒤 매우 신속하게 진격했다. 말레이 반도에서의 속도전에 비견될 만했다. 일본군을 상대하는 네덜란드군은 형편없었다. 절반 이상이 현지인들로 구성된 민병대 수준에 불과했다. 일본군은 3월 5일 바타비아에 이어 7일 수라바야를 점령했다. 전의를 상실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8일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령 버마'의 수도 랑군도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처럼 1942년 5월 이전까지 일본군은 승승장구하며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동시다발적, 기습적으로 남방 전역을 제패하며 전략자원을 수급했고 잠시나마 대동아 공영권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일본군 수뇌부는 승전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가졌으며, 더욱 가열하게 '공세적'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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