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전쟁의 최대 분수령이 된 쓰시마 해전. 이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연합 함대는 러시아의 자랑인 발트 함대를 격파했다.
■쓰시마 해전
봉천 대회전 이후 양국의 군대는 방어에 집중했다. 일본군은 더 이상 공격에 나서지 않았고 주둔지 강화에 힘썼다. 러시아군도 대체로 방어에 중점을 뒀다. 일각에서 공격 전환에 대한 의견이 제시됐지만, 이는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한 뒤에 추진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추후에 러시아군은수차례 토론을 통해 일본군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우익을 동원해 선제공격에 나선다는 보다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강화 조약 체결로 무산됐다.) 양국 군대의 병력은 지속적으로 충원됐다. 이 시기에 러시아군은 44만 6500명, 일본군은 33만 7500명이었다. 어쩌다가 러시아 기병대가 파쿠먼을 습격하기도 했지만, 육상에선 전황에 특별한 영향을 끼치는 전투 없이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이제 러일 전쟁의 운명은 육상이 아닌 해상에서 판가름 날 것이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러시아에게는 강력한 발트 함대가 있었다. 이 함대에 근무하는 병사들은 1만 명이 넘었으며, 총 47척 중 전투함이 38척에 달했다. 그야말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대함대였다. 발트 함대는 1904년 10월 15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리바바 항에서 출항했다. 최종 목적지는 극동아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다만 발트 함대의 앞길에는 필연적으로 험난함이 예정돼 있었다. 대부분의 함선들이 남쪽으로 향해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항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 더 빨리 갈 수 있었지만, 극히 일부 함선들만이 그렇게 했다. 이유는 대부분 함선들의 실제 흘수선(선체가 잠기는 한계선)이 당시 수에즈 운하의 통항 제한 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이다. 발트 함대는 부득이 '세계 일주'를 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었다. 항로상에 마땅한 해군 기지도 없어 한 번에 긴 거리를 이동해야만 했다.
초기에는 사고도 발생했다. 22일 발트 함대가 도거뱅크 해역을 지날 때 영국 어선에 오인 포격을 가했다. 해당 어선을 일본군의 수뢰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 러시아 첩보기관은 일본군 수뢰정이 이동해 와서 주요 항로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 공격할 수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이에 발트 함대가 더욱 예민하게 반응한 측면이 있었다. 러시아는 즉각 잘못을 인정하고 영국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트 함대는 포르투갈, 모로코, 가봉, 남아프리카 희망봉, 실론 섬,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을 거쳐갔다. 항해 도중에 함선을 추동하는 주원료인 석탄을 어렵게 공급받았다. 지구를 무려 반바퀴(2만 8800km) 돌아올 때까지 탈락한 함선은 단 한 척도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발트 함대는 그 명성에 걸맞은 찬사를 받았다. 한편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발트 함대가 오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들은 발트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기 전에 결딴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거리 항해로 지친 발트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정비한 뒤 전투에 나선다면 일본군은 상당히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동안 장악했던 제해권이 순식간에 러시아군에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결정적 사안이 존재했다. 발트 함대가 어느 항로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할 것인지였다. 총 3개의 항로가 있었다. 대한 해협과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는 직선 항로, 일본 열도를 돌아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는 항로,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야 해협을 통과하는 항로였다. 일본군은 이 모든 항로를 틀어막는 게 불가능했던 만큼, 어느 한 개의 항로를 정해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예상치 못한 항로로 발트 함대가 지나간다면 일본군은 비상 상황에 처할 터였다.
당초 일본군 지휘부에선 발트 함대가 소야 해협에 진입할 것이라는 예측이 다수였다. 하지만 도고 헤이하치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적군이 최단 거리인 대한 해협과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대한 해협의 남쪽 연안에 있는 마산포와 쓰시마 등에 함대를 배치했다. 함대의 주력은 3개의 분함대로 나눠졌으며 각 분함대는 2~3개의 편대로 구성됐다. 개별 함선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고, 대한제국의 취도를 과녁으로 삼아 함포사격 훈련을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취도는 일본군의 훈련으로 말미암아 현재 전체의 2%만이 남게 됐다고 한다.) 과연 도고의 예측이 적중했다. 발트 함대 사령관은 먼 길을 돌아온 함대의 처지를 고려해 가장 빠르게 블라디보스토크로 입항할 수 있는 직선 항로를 선택했다. 1905년 5월 25일, 발트 함대는 중간에 수송선을 배치한 2열 종대(세로)로 나아갔다. 함선들은 대부분 조명을 켜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뒤에 있던 병원선이 불을 밝혔다. 27일 이 불빛을 목격한 일본군 순양함 1척이 은밀히 추격하다가 함대를 발견했다. 발트 함대는 이 순양함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 뒤, 짙은 바다 안갯속에서 일본군 순양함 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들짝 놀란 발트 함대는 잠시 포격을 하다가, 일본군 순양함이 사라지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나아갔다. 정찰용인 순양함으로부터 적군 함대의 출현 소식을 접한 도고 헤이하치로는 즉시 마산포에 있는 주력 함대를 출동시켰다. 장갑함 4척, 장갑순양함 8척, 구축함 16척 등으로 구성된 주력 2개 편대가 발트 함대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히며 나아갔다. 속도는 15노트였다. 발트 함대도 일본군 주력 함대의 진격을 눈치채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양국 함대의 정면충돌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바로 여기서, 일본군 해전 역사상 가장 탁월한 전술로 평가받는 것이 나왔다. 처음에 일본군 함대는 종대를 기반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일본군 함선들이 발트 함대 항로의 좌측 전방에서차례대로 반대 방향으로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종대였던 일본군 함대가 별안간 횡대(가로)를 형성했다. 이러한 전술은 선회하는 도중에 적군에게 측면을 노출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일본군은 사전에 철저한 훈련으로 말미암아 완벽에 가까운 선회 기동을 선보였다. 이제 일본군은 대부분의 함선들이 적군에게 집중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진용을 갖췄다. 반면 종대였던 발트 함대는 선두에 있는 함선들만이 포격을 가할 수 있었고, 나머지 함선들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기함인 수보로프호와 오슬랴뱌호를 겨냥해 맹포격을 퍼부었다. 지휘관이 탑승해 있던 이 함선들은 순식간에 파괴되기 시작했다. 치명적 타격을 입은 오슬랴뱌호가 침몰했고, 수보로프호도 곳곳이 파손돼 화염에 휩싸였다. 지휘관인 로제스트벤스키는 큰 부상을 입었다. 나머지 함선들이 적군의 공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일본군은 민첩한 기동으로 이들의 항로를 차단하며 한쪽으로 몰아세웠다. 이 와중에 바다 안개가 짙어져 잠시 전투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를 틈타 수보로프호를 비롯한 발트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고, 재차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때 일본군은 가와무라가 이끄는 해군도 합류해 전력이 증강됐다.) 일본군 수뢰정의 어뢰 공격으로 수보로프호가 침몰했고, 알렉산드르 3세호와 보로디노호 등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격침된 러시아군 함선은 총 19척에 달했다. 나머지 순양함 및 장갑함은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하거나 필리핀,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등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5000명 이상의 러시아군 병사들이 전사했으며 로제스트벤스키를 포함해 수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한 함선은 3척에 불과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러시아의 자랑, 발트 함대는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궤멸됐다. 일본군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발트 함대를 상대로 한 '쓰시마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들은 고작 수뢰정 3척을 잃었고 117명이 전사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지휘관인 도고 헤이하치로는 자국에서 '군신'으로 추앙받았다. 상술했듯 전술적 측면에서부터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요인들이 일본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일본군 함포의 발사 속도는 러시아군의 2~3배에 달했고, 포탄에 들어가는 화약의 세기도 일본군이 훨씬 우월했다. 러시아군 함선의 겉면에 칠해진 색깔은 일본군 병사들의 눈에 너무 잘 띄었으며, 프랑스식 텀블홈 선체를 사용한 러시아군 함선들은 피탄 시 침몰이 빠르게 진행됐다. 쓰시마 해전의 여파로 일본은 승전 분위기에 도취된 반면 러시아는 총체적 난국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혁명 운동이 날이 갈수록 격화돼, 심지어 군부대 내에서도 소요와 폭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차르 정부는 내심 전쟁을 지속하고 싶었지만, 악화하는 국내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이에 전쟁 종결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본 역시 극심한 소모전에서 벗어나 강화 조약을 체결하길 간절히 원했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
일본은 뒤에 있던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중재를 청한 것이다. 1905년 8월, 러시아와 일본의 대표단이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양국 대표단은 강화 협상을 벌였지만, 조항에 대한 의견 차이로 신경전을 이어갔다. 특히 일본 외상인 고무라 주타로가 전쟁 배상금과 사할린 섬 할양을 요구하자 러시아 대사인 세르게이 비테는 "승자도 패자도 없으니 한 치의 땅도, 1 루블의 배상금도 물어줄 수 없다"라고 맞섰다. 나아가 전쟁을 재개한다면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는 경고도 했다. 만약 러시아 대표단의 말대로 전쟁이 재개됐다면, 러일 전쟁의 최종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종합적인 국력상, 일본은 한계치에 도달한 반면 러시아는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양국은 약 1개월 간의 진통 끝에, 9월 5일 협상을 타결했다. 그 결과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도 보호 감리조치를 승인받았고,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남쪽을 할양받았다. 러시아에게 전쟁 배상금을 받지는 못했다. 사실상 포츠머스 강화 조약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극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했다. 대한제국을 손아귀에 완전히 움켜쥐었으며, 만주 침략의 교두보도 마련했다. (러일 전쟁 직후 체결된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대한제국 지배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의기양양해진 일본은 앞으로 군국주의를 내세우며 대규모 침략 전쟁을 벌일 것을 예고했다.이와 달리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실추됐다. 오랜 기간 이어져온 영국과의 'The Great Game'은 종지부를 찍었고, 격렬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