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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Sep 26. 2024

'태평양 전쟁'-일본의 침략 야욕, 막아서는 미국

[1]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

중국과 남방 지역에 대한 일본의 침략 야욕을 미국이 막아서면서 양국 간 전쟁 기운이 고조됐다. '태평양 전쟁' 영상 캡처.

일본의 침략 야욕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가 이전보다 훨씬 활발해졌고 자연히 중공업도 크게 성장했다. 러일 전쟁 당시, 자체 생산 능력이 떨어지던 일본은 함선과 주요 무기들을 대부분 해외에서 수입했다. 그러다 보니 전쟁 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일본은 군수산업에 과도할 정도로 투자하며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특히 전함 8척과 순양전함 8척 등을 만들어 주력함대를 증강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른바 '88함대 계획'이다. 이상적인 함대를 구축해 태평양 등에서 주변 국가들에게 당당히 맞서고, 새로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보장받으려 했다. 당시 우수한 함대를 보유한다는 것은 곧 국력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 물자 판매로 경제적 호황을 누린 일본은 이를 기반으로 해군력 증강 계획을 더욱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하지만 제동이 걸렸다. 1921년 11월 미국은 전쟁 재발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태평양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9개 국가들을 수도인 워싱턴 D.C.로 불러 모았다. 여기에는 태평양 제도인 마리아나, 마셜, 캐롤라인을 위임 통치하는 일본도 포함됐다. 약 3개월 간 진행된 '워싱턴 회의'에서 의미심장한 협정이 체결됐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은 태평양 지역에 대한 영토 불가침 협정과 '해군 군축 협정'을 체결했다. 중국 시장에 대한 이해 조정 협정도 이뤄졌다. 이 가운데 해군 군축 협정은 일본이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88함대 계획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이었다. 미국, 영국, 일본이 보유할 수 있는 전함의 비율을 '5:5:3'으로, 국가당 해군 총배수량은 미국과 영국 52만 5000톤 일본은 31만 5000톤으로 제한했다. 일본은 해당 조약을 수용하기 싫었지만, 이를 거부할 경우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일본 군부에서는 워싱턴 회의를 '굴욕 외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추후 미국은 런던에서 열린 해군 군축 회의에서도 일본의 군사력을 축소하는 협정을 이끌어냈다.


일본 군부와 극우 세력은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다. 이제야 힘차게 팽창 정책을 추진하려는 찰나에, 미국이란 국가에게 계속 발목이 잡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경제대공황의 여파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 마련이 시급했다. 일본 군부는 이를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 했다. 결국 일본의 '침략' 야욕이 터져 나왔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단숨에 만주를 점령했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꼭두각시 황제로 삼아 '만주국'을 세웠다. (당시 정부 일각에서 만주 침략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군부에서 강경하게 밀어붙여 만주 사변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만주 사변은 불법적인 침략 행위라며 강하게 규탄했다. 나아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맹'에서 만주 사변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조사단은 일본군이 만주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보고서를 작성, 제출했다. 당시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한 44개국 중 42개국이 보고서 채택에 찬성했고, 일본과 태국만이 각각 반대와 기권을 선택했다. 이로써 거의 만장일치로 일본의 잘못된 군사 행위가 국제적으로 공인됐다. 일본 대사인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은 이 결과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 직후에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를 통보했다.


이 즈음에 일본의 극우화, 강경화 된 모습은 비단 외부적으로만 표출된 게 아니었다. 내부적으로도 만연해갔다. 군부 주도로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확충해 나갔으며, 추후 전쟁에 대비해 내부통제와 식민지 수탈을 강화했다. 일본 내부에서 엄청난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굴욕 외교를 행한 '배신자들'에 대한 테러 행위가 발생했다. 특히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이며 해군 군축조약 체결을 주도한 일본의 제27대 총리인 하마구치 오사치가 도쿄역에서 암살당했다. 극우파 청년이 자행한 이 사건은 일본은 물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몇 년 뒤에는 29대 총리인 이누카이 쓰요시가 도쿄 총리관저에서 군부 내 강경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누카이 쓰요시도 일본의 군사력 축소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여담으로 이때 암살범들은 일본을 방문 중이던 할리우드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도 암살해 미국에 충격파를 던지려 했다. 그러나 예정된 일정이 지연됨으로써 채플린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1936년에는 일본 육군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2.26 쿠데타'였다. 비록 쿠데타는 4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를 계기로 군부가 일본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비로소 일본은 '대본영'이라는 조직을 구성해 침략 전쟁을 노골화하는 국가로 나아갔다. 국민들의 정신과 삶 등도 전방위적으로 개조하며 일종의 '전시통제국가'를 만들었다. 이는 1937년 중국 본토를 전면적으로 침공하는 '중일 전쟁' 발발로 이어졌다. 강력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은 전쟁 초반에 잇따라 승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막아서는 미국

일련의 일본 행태는 미국의 심기를 크게 자극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미 국무부는 일본에게 구두 경고를 가했다. 다만 물리적인 제지에 나서지는 않았다. 일본도 중일 전쟁 직후에 미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미국이 생각보다 강경하게 나오지 않자,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중일 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중국과 영국 등은 이 기회에 미국이 일본에 대한 즉각적인 압박 또는 무력을 행사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 수뇌부의 생각은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중국 점령을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을 즉각 제압하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이념적으로 상극인 소련을 막는 방파제로써 일본을 이용할 수도 있었고, 중일 전쟁으로 지쳐가는 틈을 활용해 극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용이하게 확대할 수도 있었다. 일본보다 유럽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나치 독일을 우선적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에 따라 아직은 군사적으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대일수출 등 경제적 교류도 원활하게 이뤄졌다. (1940년 1월 26일에 미일통상항해조약이 폐기됐지만, 실질적으로 양국 간 통상이 완전 중단되지는 않았다.) 즉 이 시기에 미국은 겉으로만 강경한 체했고 실상은 온건했다. 중일 전쟁 장기화에 직면한 일본군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남방(동남아시아)으로 눈을 돌렸을 때에도, 한동안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마침 이 즈음에는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일본군이 남방 지역을 공략하기가 한층 수월해졌다. 남방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유럽에 전력을 쏟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태평양에서 현상을 유지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고, '대동아 신질서'를 표방하며 남방 공략을 본격화했다. 대동아 신질서는 일본, 중국, 만주, 동남아시아의 일부를 아우르는 '대동아'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이 승승장구하자 독일과 밀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요나이 내각이 물러나고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들어선 뒤, 일본은 '기본국책요강' 등에 기반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최후통첩을 가했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는 민간교섭원 및 특파사절을 보냈다. 이에 앞서 중국에 전쟁 물자를 조달할 수 있는 영국의 미얀마 루트를 폐쇄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급기야 일본은 1940년 9월 23일 북부 베트남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때 미국이 행한 것은 날짜 변경선 동쪽에 있는 영국, 프랑스 영유지에 관여를 하겠다는 것과 3 항목의 수출을 허가제로 바꾸는 게 고작이었다. 기실 전자는 물리적 조치가 뒤따르지 않는 선언적인 것에 불과했고, 후자는 단순 허가제였을 뿐 수출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3 항목 안에는 일본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석유와 고철 등이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후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정부에 보르네오, 셀레베스, 알로르 군도 등에 대한 세력권 인정을 요구했을 때에도 미국은 강경하게 나오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미국은 가급적 무력 충돌을 피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 볼 심산이었다. 다만 미국의 '전략적 인내'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 역시 미국과의 군사적 대결을 바라지 않았고 대화에 무게중심을 뒀다.


두 국가의 공통된 수요로 인해 1941년 초부터 '일미 교섭'이 진행됐다.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대장이 주미대사로 임명돼 미국의 '헐' 국무장관과 교섭을 했다. 노무라는 처음부터 미국의 양보를 촉구했다. 아울러 교섭에 앞서 양국 관계자들(드라우트, 이카와, 이와쿠로 3인)이 만든 '일미 양해안' 초안을 꺼내 들었다. 이 안에는 '미국이 일본에 민주주의 강요 불가', '만주국 승인 보장', '새로운 통상조약 체결 가능성 암시', '석유 등 주요 군수물자 획득 보장' 등이 담겼다. 사실상 미국이 많이 양보한 셈이었다. 하지만 헐은 이것에 불만을 표했고, 이른바 '4원칙'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모든 국가의 영토와 주권 존중', '타국 내정에 대한 불간섭', '평등 원칙 준수', '무력을 통한 태평양에서의 현상 변경 폐지' 등이 담겼다. 다만 여러 정세를 감안해 4원칙 이전에 먼저 양해안을 기반으로 교섭을 해보기로 했다. 고노에를 비롯한 대부분의 일본 내각 인사들은 양해안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미세한 접점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독일과의 관계가 문제로 떠올랐다. 독일은 영국을 겨냥해 일본의 싱가포르 공격을 요구했고, 이미 (영국을 지원하는) 미국을 주적으로 삼은 만큼 일본의 참전도 종용했다. 일본 입장에선 매우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동맹국인 독일의 요구를 무시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미국과의 교섭을 취소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독일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한 일본 외무대신 '마쓰오카'는 미국에 수정안을 제시했다. 이는 독일과의 군사적 원조 의무를 재확인하고 중일 전쟁에서 일본이 화의 조건을 지시할 권리를 보유하며 남서 태평양에서 타국의 도발이 있을 경우 무력을 사용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남서 태평양에서의 무력 사용은 여차하면 남부 베트남, 싱가포르 등을 무력 점령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와 함께 마쓰오카는 미국에 중립조약도 제안했다. 헐은 중립조약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으며, 수정안에 대해서도 "타국의 권리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은 독일과의 전쟁 분위기 고조로 일본과 대화할 필요성이 있었지만, 부당한 요구까지 수용할 순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수정안에 대한 대안과 마쓰오카를 강하게 비난하는 구두성명을 일본에 전달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가운데, 7월 2일 일본 어전회의에서 '정세의 추이에 따른 제국국책요강'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우선 '독소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일본은 일단 여기에 개입하지 말고 전황을 지켜본 적절한 시기에 대소 전에 나서기로 했다. 핵심은 남방 지역과 관련된 것이었다. 베트남과 태국 등지에서 군사적 행동을 전개하고, 만약 미국과 영국 등이 방해할 경우 '전쟁도 불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과의 전쟁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첫 사례였다. 이 같은 결정은 마쓰오카 및 군부 강경파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해당 내용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전쟁의 위험성을 크게 느꼈지만, 여전히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태평양 지역의 평화유지를 위한 회담 등을 일본에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나타난 모습은 미국의 바람과는 상반됐다. 12일 연락회의에서 일본 육해군은 "필요한 경우 태평양에서 일본의 무력 행사를 인정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라는 공동의견을 냈다. 전쟁의 먹구름이 점차 밀려오고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평화적 해결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은 존재했다. 호전적인 일본 군부와 달리 총리인 고노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제3차 고노에 내각이 들어섰을 때, 그는 "일미 교섭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고노에의 최측근인 외무대신 토요다 테이지로도 대표적인 대미 온건론자였다. 이들은 미국과의 전쟁이 곧 일본의 '파멸'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내다봤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군부의 압력을 물리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군부는 고노에 내각에 '베트남에서의 군사 행동을 예정대로 전개하고, 남방 및 북방에서 전비를 촉진시킬 것' 등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는 결국 미국의 오랜 인내심을 거두게 는 '파국적' 조치로 이어졌다. 29일 일본군이 남부 베트남에 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미국은 유화적인 태도를 버렸다. 즉각 베트남을 중립 지대로 만들라고 요구하는 한편 미국 내 일본자산을 동결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전쟁에 들어가는 석유 대부분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던 일본에게 해당 금수조치는 치명타였다. 당황한 일본은 대미협상안을 통해 "베트남 이외의 남서 태평양 지역에 진출하지 않을 것이니 금수조치를 풀어달라"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일본군이 불법적인 침략 행위를 멈추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라고 답했다. 심각성을 인지한 고노에는 루스벨트와의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루스벨트는 처음에는 정상회담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무관심한 태도로 변했다. 노무라가 문제 해결을 위해 헐을 만나러 왔을 때, 헐은 앞서 제시했던 4원칙을 다시 전면에 내세웠다. 당초 미국은 강경한 입장이라 할 수 있는 4원칙을 잠시 누그러뜨리고 최대한 일본과 타협해보려 했지만, 일본이 기대와 다르게 나오자 이것으로 선회한 셈이었다. 미국의 완고한 태도를 확인한 군부의 주도로 일본에선 교섭 무용론과 전쟁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9월 6일 어전회의에서 '제국국책수행요강'이 결정됐다. 일미 교섭 기한이 설정됐고, 사실상 10월 을 목표로 전쟁 준비를 완료한다는 계획이 도출됐다. 일본 육군과 해군은 작전계획 하달, 부대 이동, 도상 훈련, 선박 징발 등을 시행하며 전시체제로 들어갔다. 이 와중에도 고노에와 토요다 등은 어떻게든 미국과의 전면전을 막아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특히 고노에는 중국에서 기회균등을 승인할 수 있고, 3국 동맹에 대해서도 재검토할 의사가 있다고 미국에 밝혔다. 군대 주둔 문제도 군부를 뛰어넘어 일왕과 직접 협의해 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것들은 사전에 군부와 전혀 협의되지 않은 고노에의 개인적 입장이었기에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대신에 미국도 전향적인 자세로 나와달라고 촉구했다.


미국의 입장이 곧 전해졌다. 4원칙을 재차 강조하면서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했다. 나아가 말로만이 아닌 확실한 '협정'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가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첨언도 잊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욱 강경해진 미국의 입장은, 일본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만주사변 이전으로 환원시키라는 것이었다. 고노에는 설득을 시도했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이때부터 일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본 군부도 "개전을 피할 수 없다"라고 장담했다. 육군 대신인 '도조 히데키'는 고노에를 찾아가 교섭 타결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은 물론 육해군의 뜻도 모아졌다면서 총리의 결단을 촉구했다. 10월 12일, 고노에는 5 대신 회의를 열고 현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서 매우 격렬한 논쟁이 오고 간 것으로 전해진다. 고노에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감행한다면 일본이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에 교섭을 통해 원만히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조 히데키는 교섭 노력은 중단돼야 하며, 점령지에서의 전면 철수라는 미국의 요구를 육군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동석하고 있던 해군 대신은 모든 결정을 총리에게 위임하겠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대세'는 육군을 대표하는 도조가 쥐고 있었다. 그는 급기야 고노에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사실상 육군이 내각 불신임 및 타도 의견을 표명한 만큼 고노에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16일 지쳐버린 고노에는 3차 내각이 출범한 지 3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다음 타자가 신속히 들어섰다. 18일 초강경파인 '도조 히데키 내각'이 출범했다. 이를 지켜본 헐 국무장관은 "일본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다"라고 말했다. 11월 1일 일본 연락회의에서 전쟁 결의 및 12월 초 무력 행사 결정이 내려졌다. 단, '형식적인' 마지막 교섭 단계도 있었다. 일본은 5일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제국국책수행요강'을 기반으로 미국에 '마지막 정성을 다해 작성한' 안을 제시했다. 크게 '갑'안과 '을'안으로 나눠 제시됐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자에선 북중국과 내몽골 몽강 지역 등에서 일본군이 일정기간 주둔하고, 나머지 지역에선 일본과 중국 간에 별도로 정한 바에 따라 철수를 개시하기로 했다. 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이 중일 전쟁이 해결되거나 공정한 극동평화가 확립된 후에 철수하기로 했다. 후자에선 일미 양국이 인도차이나 이외의 남태평양 지역 등에서 무력 진출을 꾀하지 않으며, 양국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 필요 물자를 획득하도록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양국의 상호 통상관계를 자산동결 이전으로 되돌리고, 미국 정부가 양국 간 평화 노력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도 했다. 이 모든 내용들은 미국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들이었다. 루스벨트와 헐은 일본이 그저 전쟁 준비 시간을 벌기 위해 도저히 수용되지 않을 안들을 제시했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여러 첩보망을 통해 일본의 개전 의향을 간파했고, 이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에서 자국 함대를 하와이에 증강 배치했다. (이 당시 미국 군부 내에선 선전포고 없이 즉각 일본을 공격하자는 주장과 독일전을 의식해 일본과의 전쟁을 다소 연기해 보자는 주장이 혼재했다.)


시시각각으로 '파국'이 다가왔다. 일본은 갑 안에 이어 을 안도 거부될 경우 개전하기로 했다. 조만간 을 안에 대한 미국의 답이 왔다. 이른바 '헐 노트'로 불리는 2통의 각서는 일본을 겨냥한 미국의 '최후통첩'이었다.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일본 군대 및 경찰병력의 완전 철수, 3국 동맹의 실질적 파기 내지는 사문화, 중국에 있는 일본 괴뢰정부(만주국, 난징 정권) 불인정, 다자간 불가침 협정 체결 등이었다. 이를 받아본 일본 정부는 즉각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뒤이어 12월 1일에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개전을 확정했다. 개전일은 8일이었으며, 공격 목표는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기지였다. 일본군은 이미 10월에 이곳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러일 전쟁 때처럼 사전 선전포고 없이 전력을 다한 '기습'이 행해질 터였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감안할 때, 전쟁이 장기화되면 불리해진다고 판단했다. 이에 전쟁 초반에 기습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혀 기선을 제압한 뒤, 유리한 위치에서 미국과의 협상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봤다. 해군 작전과 더불어 일본 육군도 말레이 반도 등에 기습적으로 상륙해 남방 지역을 공략해 나갈 계획이었다. 어느덧, 6척의 항공모함 등을 거느린 일본의 대함대가 '은밀하고 신속하게' 하와이 진주만으로 향할 채비를 갖췄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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