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집짓기1 08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한무 Oct 27. 2022

땅이라도 사놓고

마흔살을 맞이하고 싶었다.

어디든 가겠다며 욕심을 내려 놓은 후 달라진 게 있었다. 기대에 차서 땅을 보러 갔다가 우리 조건과 맞지 않았을 때, 실망하다 못해 절망하는 일이 줄어든 것이다. 영 엉뚱한 땅을 보게 될지라도 ‘이런 땅도 보게 되는구나, 이런 길로도 지나가게 되는구나’라고 조금 느긋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어떤 땅이 우릴 기다릴까, 지금까지 지나왔던 길들이 합쳐져 어떤 땅에 이르게 될까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이 곳 저 곳 땅을 보러 다니며 '이 땅도 아닌가 벼~'하며 삽질을 많이 하다 보니, 진짜 삽을 가지고 다니며 땅 보러 갈 때마다 삽질을 해볼까 남편과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여유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유도 잠시, 땅 구입을 못한 채 해가 넘어가려 하니 조급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해는 내 나이 39세로 30대의 마지막 해였고 무언가 하나라도 성취한 채로 40대를 맞이하고 싶었다. 오랜시간 도전했던 꿈을 포기한 상태로 나를 이끄는 목표도 없이 아이를 키우며,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렇게 사는 삶은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나를 나타내는 그럴싸한 직업이 없다면 집이라도 있어야하지 않겠나? 집을 지으려면 땅이라도 사놔야 하지 않겠나?' 땅이라도 사놓고 마흔 살을 맞이하고 싶었다.


30대 마지막 달이 끝날때까지 삽질은 계속되었고 결국 땅을 구입하지 못한 채 해를 넘겨 마흔살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디든 가리라 했지만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 땅도 없고 집도 없고, 손에 잡히는 실체가 아무것도 없이 마흔살이 되었다. 기대와 달리 제자리라니, 좌절과 무기력, 분노가 3종 세트로 찾아왔다. 땅 찾는 일을 잠시 중단했다. 집 짓기 준비를 하면서 쓰던 기록도 중단했다. 몇 달 동안은 쉬면서 책만 읽었다.


나중에 한 정신과 의사가 쓴 ‘상처받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기’라는 책에서 본 ‘부정화 사고’에 대해 읽고 당시의 내 심리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부정화 사고’란 모든 것을 제로베이스로 만들어버리는 사고 방식으로 자신이 잘 했던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백지화 시켜버리는 ‘모 아니면 도’의 심리라고 한다. 우울 심리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남이 정해놓은 원칙에 압도되면 부정화 사고에 휩쓸리기 쉽다고 한다.


당시 나는 40대에는 무언가 성취해놓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내 집 마련을 해서 정착해야 한다는 기준 같은 것에 휩쓸렸다. 40세가 되기 전에, 아이가 초등학교 학년이 더 올라가기 전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이제껏 땅을 알아보러 다닌 건 다 헛수고였다 생각했고 집 짓기도 없던 걸로 해버리고 싶었다. 부정화 사고를 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실패했을 때나 힘들 때는 일단 버티라고 한다. 버티는 것도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그러면 분명 좋은 날이 온다고.


당시 몇 달 동안 쉬면서 책만 읽은 것이 버틴 셈이 되었고, 정말로 좋은 날은 왔다. 별 의미도 없는 마흔 살이라는 내 욕심으로 정한 때가 아닌, 정말로 우리 가족에게 맞는 때를 기다리고 싶어졌다. 조급함에 내 손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은 것이 지금에 와서 감사하다.



21.10

이전 07화 어디든 가리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