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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쌤 Feb 02. 2023

엄마를 모시는 것이 나의 큰 꿈이었다.

8-7 : 힐링을 위한 문학은 글쓰기 <1기>



미션: 어릴 적 나의 가장 큰 꿈은?


아버지가 그렇게 바라던 아들, 나의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그 남동생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내가 엄마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섯 살까지 엄마 젖을 만지고 꼬집고 비틀고 유희하며 놀았다. 그래서 손재주가 있나 보다. 엄마는 아프다고 했지만 나는 엄마와  많은 교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배는 점점 불러왔고, 나는 서서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응애’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우리 가족의 관심은 동생에게 솔렸다.



시골에서 생활은 단순 반복 고된 노동일이다. 아무리 힘들게 일하고 와도 동생 덕분에 집안이 훈훈했다. 동생은 천재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동생이 5살 나는 8살 때 온 가족이 모여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트로트 가요가 흘러나왔다. 동생은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더니 가족들 앞에서 모창을 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가 깜짝 놀라셨다. 천재가 태어났다. 우리 집 경사 났다. 요즘 같으면 영재로 발탁되어 tv에 나왔을 법 한데 말이다.



이렇게 집안에서 경사 날수록 나는 더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8-5 힐링을 위한 문학으로 글쓰기”에서 12년(초중고) 동안 받은 개근상장을 다 찢어 버렸던 사건을 말한 적이 있다. 그 사건과 맞물리는 역동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개근상장을 찢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몰입되었던 것이다. 남편의 50장이 넘는 상장과 표창장들이 동생의 천재성과 동일시를 느끼면서 확 찢어 버린 것이 틀림없다. 한쪽에서 기쁨이 충만할 때, 한쪽은 슬픔이 찾아왔다는 것이 나를 주눅 들게 한 것이다. ‘내 자리를 뺏어간 남동생, 저 애만 없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남동생이 미웠다. 원망감도 생겼다. 알고 보니 비교에서 오는 엄청난 열등감과 나의 콤플렉스였다.


열등감과 콤플렉스의 심리학자 '알프레스 아들러'도 이와 비슷한 열등감으로 살았다. 아들러의 형은 모든 것을 잘하여 부모님께 인정받았고, 그 형을 보고 자란 아들러는 형을 시기질투하며 힘들게 살았다. 더군다나 아들러의 몸은 선천적으로 병약했기 때문에 더 나약해 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한 아들러를 위해 온전히 신경을 쓰며 보살펴주었다. 아들러가 엄마를 독차지하다가 동생이 태어나면서 아들러는 어머니의 사랑을 뺏기고 말았다. 그런데 동생도 몸이 약해서 3살 때 죽고 말았다. 동생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을 때 의사가 하는 말을 엿들었다. “아들러도 폐럼에 걸려 살 가망성이 거의 없습니다.” 이 말을 듣자 아들러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했다고 했다. ‘내가 살려면 병을 이겨 내야 해. 의사가 되어 아버지께 꼭 인정받을 거야.’라고 다짐을 했다. 굳게 다짐을 했지만  결국 학교에서도 거의 낙제자였고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그래도 아들러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러는 자신의 열등감을 보완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자신의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난 학자이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보다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알프레스 아들러-




나의 열등감과 콤플렉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부모님이 들로 산으로 일하러 가시고 남동생과 나만 남았다.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어린 내가 무슨 계획을 세우겠는가. 다 무의식에서 한 행동들이다. 무의식은 엄청난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년이 넘도록 상담일을 하다 보니 짜인 각본처럼 맞물려 가는 것이 보인다.


동생과 함께 집 청소를 해 놓고 딱지놀이도 하고, 구슬치기 했지만 그래도 심심해서 사탕 사러 가자고 동생에게 말했다.

“종식아 우리 사탕 사 먹으러 갈래?”

“응 누나 가자.”

“그래 빈병 하나씩 들고 가면 사탕 두 개씩 준다. 가자.”

동생이 너무 좋아하면서 나와 함께 길을 나섰다.

이렇게 둘이서 빈병을 들고 느티나무를 지나 큰 도로를 건너 가게로 갔다. 눈깔사탕 한 개씩 물고 기분 좋게 걸어오는데 느닷없이 자전거를 타던 아저씨가 확 지나가면서 동생을 치였다. 그 자리에서 동생은 넘어졌고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차라리 피라도 났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 당시 “괜찮겠지.”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동생이 머리가 아팠다. 엄마도 겉으로 표시가 안 나니 “괜찮아지겠지.”하고 태연자약했다. 새벽이 되어 동생이 자꾸 아프다고 하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보건소로 달려갔다. 의사가 하는 말이 한발 늦었다고 했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살릴 수 있었는데요...'라고 말을 하니 억장이 무너졌다.


엄마는 남동생의 죽음으로 실신하셨다. 1년 동안 방구석구석 살피면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을 때, 나는 엄마 옆에서 울면 엄마가 더 슬플까 봐 옆방에 가서 몰래몰래 울었다. 엄마가 울면 나는 죄책감에 더 시달렸다. ‘내가 동생을 죽였어. 내 탓이야. 내가 엄마를 슬프게 했어. 난 죄를 지었어.’ 한참 티 맑게 웃고 까불고 떠들고 놀아야 할 시점에 난 엄마에 대한 애환이 생겼다. "엄마는 내가 모셔야 돼. 내가 평생 책임질 거야. 결혼하더라도 엄마는 내가 모실 거야."라고 다짐하면서 악착같이 열심히 살았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몸이 약해 의사가 되었지만, 나는 마음이 아파 심리상담사가 되었다. '최대한 말썽 부리지 않고 착한 딸이 되어 시집가면 엄마를 꼭 내가 모실 거야.'라고 다짐하며 살았다.


무대 위에 역할들을 기획해서 각본에 따라 주인공 역할을 했던 것처럼 그렇게 맞아떨어진다. 우연히 심리상담사가 된 게 아니다. 나의 직업은 천직이다. 동생의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내가 잘 돼서 엄마를 모시는 것이  내 평생 꿈이었다. 살아생전에 모시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마음으로 평생 모셨다. 엄마도 늘 나에게 말을 했다. "우리 딸이 최고다. 아들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이렇게 나의 어릴 적 꿈은 엄마를 모시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8-6: 힐링을 위한 문학으로 글쓰기 1기


8-5: 힐링을 위한 문학으로 글쓰기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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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힐링을 위한 문학으로 글쓰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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