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rnweh May 24. 2021

때 아닌 불면

단상 (8)


 잠을 잘 잔다. 구태여 '잘 자는 편'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는 데 이렇다 할 문제를 겪은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잘 잔다. 물론 그렇다고 서른 해 이상을 살도록 단 한 번도 잠이 안 와서 곤란한 적이 없었다고는 못하겠으나, 그런 불면을 겪은 적은 손에 꼽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밤을 새워야 하거나 두세 시간 자서 피곤을 느끼는 경우가 아닌, 잠을 못 잘 이유가 하등 없는데도 불면증이 불쑥 날 찾아온 경우만을 따지자면 말이다.


 승무원으로 일할 때도 딱히 '수면장애'랄 것을 겪어보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이 뒤바뀌며 무너져버린 수면 밸런스를 자력으로는 되찾지 못하는 동료들은 수면유도제(멜라토닌)를 복용했다. 그런 이들이 꽤 흔했다는 건 그만큼 직무가 불면의 최전선에 있다는 말이기도 할 텐데,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바로 어젯밤 때 아닌 불면이 정말 몇 년 만에 내 침대 머리맡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도대체 왜 잠이 안 오는지 이유조차 가늠할 수 없는 불청객이었다. 여느 때처럼 12시 반 즈음에 잠을 청했다. 저녁 7시경에 커피를 마시긴 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마신 커피는 불면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게 피인지 커피인지 모를 만큼 주야장천 커피를 마셔대는 편이고 7시보다도 더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경우도 허다하므로, 그리고 카페인의 작용이 발현됐다면 잠이 안 와 누워있을 때 심장이 벌렁벌렁 댐을 느꼈어야 할 테니까. 심장이 벌렁거리긴커녕 오히려 평소의 박동수보다도 더 느린 걸 어제는 또렷하게 느꼈다.


 잠을 청하려 노력한 어젯밤의 내 방은 정적 그 자체였다. 공간과 시간 모두를 에워싼 완벽한 정적. 차라리 바깥 어딘가에서 누가 술을 마시고 빽빽대며 지르는 소리나 '빠앙!!!' 하는 갑작스러운 클락션 소리가 정적의 시공간을 파고들어 정적도 내 잠도 깼다면 불면의 원인이라도 알았으니 덜 억울했을까. 일말의 소음조차 없어 잠자기에 최적화된 평온한 침대에 누워 온몸으로 불면이 1초 단위로 지나감을 느껴야만 했다. 차라리 잠이 안 오니 공상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상 거리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보다 느린 심장박동이 불면이 내려앉은 몸 위에서 '두그은... 두그은... 두그은...'하고 울리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은 것까지 확인하고 설핏 잠이 들었다. 커튼을 활짝 열어둔 채 자기 때문에 날이 밝아옴과 동시에 다시 깨버렸다. 길게 잡아도 두 시간 잤나... 불면에 시달린 티를, 토막잠을 자고 나온 티를 온몸으로 내며 하루를 버티다 보니 어느새 오후 7시가 됐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운동을 갈 참이었는데 버스에 오르고 나니 잠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이 상태로 터덜터덜 헬스장에 갔다간 졸면서 러닝머신을 타다 나자빠지거나 졸면서 덤벨을 들다 발등 위로 떨어뜨릴 것만 같아 잠시 카페에 들려 커피를 시켰다. 




"커피 맛이 왜 이래..."(지금 찍은 건 아니고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입니다.)


 두둥.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카페인의 각성 효과를 다시금 깨닫는 거라면 차라리 좋으련만, 잠이 확 달아난 이유는 커피가... 너무 맛이 없어서이다(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커피 맛에 까다로운 편도 아니며 사실 커피 맛을 구분해낼 미각의 소유자도 아니다) 스무 살 때 처음으로 아메리카노를 입에 대보고는 이걸 왜 먹냐며 시럽을 탈탈 털어 넣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십수 년 만에 커피에 시럽을 탈탈 털어 넣어 '설탕물'을 마시며 적는 오늘의 단상... (한숨) 그나저나 불면증 이야기를 하다 맛없는 커피로 글이 흐른 걸 보면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게 맞구나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안이냐 노안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