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8)
잠을 잘 잔다. 구태여 '잘 자는 편'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는 데 이렇다 할 문제를 겪은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잘 잔다. 물론 그렇다고 서른 해 이상을 살도록 단 한 번도 잠이 안 와서 곤란한 적이 없었다고는 못하겠으나, 그런 불면을 겪은 적은 손에 꼽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밤을 새워야 하거나 두세 시간 자서 피곤을 느끼는 경우가 아닌, 잠을 못 잘 이유가 하등 없는데도 불면증이 불쑥 날 찾아온 경우만을 따지자면 말이다.
승무원으로 일할 때도 딱히 '수면장애'랄 것을 겪어보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이 뒤바뀌며 무너져버린 수면 밸런스를 자력으로는 되찾지 못하는 동료들은 수면유도제(멜라토닌)를 복용했다. 그런 이들이 꽤 흔했다는 건 그만큼 직무가 불면의 최전선에 있다는 말이기도 할 텐데,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바로 어젯밤 때 아닌 불면이 정말 몇 년 만에 내 침대 머리맡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도대체 왜 잠이 안 오는지 이유조차 가늠할 수 없는 불청객이었다. 여느 때처럼 12시 반 즈음에 잠을 청했다. 저녁 7시경에 커피를 마시긴 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마신 커피는 불면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게 피인지 커피인지 모를 만큼 주야장천 커피를 마셔대는 편이고 7시보다도 더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경우도 허다하므로, 그리고 카페인의 작용이 발현됐다면 잠이 안 와 누워있을 때 심장이 벌렁벌렁 댐을 느꼈어야 할 테니까. 심장이 벌렁거리긴커녕 오히려 평소의 박동수보다도 더 느린 걸 어제는 또렷하게 느꼈다.
잠을 청하려 노력한 어젯밤의 내 방은 정적 그 자체였다. 공간과 시간 모두를 에워싼 완벽한 정적. 차라리 바깥 어딘가에서 누가 술을 마시고 빽빽대며 지르는 소리나 '빠앙!!!' 하는 갑작스러운 클락션 소리가 정적의 시공간을 파고들어 정적도 내 잠도 깼다면 불면의 원인이라도 알았으니 덜 억울했을까. 일말의 소음조차 없어 잠자기에 최적화된 평온한 침대에 누워 온몸으로 불면이 1초 단위로 지나감을 느껴야만 했다. 차라리 잠이 안 오니 공상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상 거리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보다 느린 심장박동이 불면이 내려앉은 몸 위에서 '두그은... 두그은... 두그은...'하고 울리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은 것까지 확인하고 설핏 잠이 들었다. 커튼을 활짝 열어둔 채 자기 때문에 날이 밝아옴과 동시에 다시 깨버렸다. 길게 잡아도 두 시간 잤나... 불면에 시달린 티를, 토막잠을 자고 나온 티를 온몸으로 내며 하루를 버티다 보니 어느새 오후 7시가 됐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운동을 갈 참이었는데 버스에 오르고 나니 잠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이 상태로 터덜터덜 헬스장에 갔다간 졸면서 러닝머신을 타다 나자빠지거나 졸면서 덤벨을 들다 발등 위로 떨어뜨릴 것만 같아 잠시 카페에 들려 커피를 시켰다.
두둥.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카페인의 각성 효과를 다시금 깨닫는 거라면 차라리 좋으련만, 잠이 확 달아난 이유는 커피가... 너무 맛이 없어서이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커피 맛에 까다로운 편도 아니며 사실 커피 맛을 구분해낼 미각의 소유자도 아니다) 스무 살 때 처음으로 아메리카노를 입에 대보고는 이걸 왜 먹냐며 시럽을 탈탈 털어 넣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십수 년 만에 커피에 시럽을 탈탈 털어 넣어 '설탕물'을 마시며 적는 오늘의 단상... (한숨) 그나저나 불면증 이야기를 하다 맛없는 커피로 글이 흐른 걸 보면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게 맞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