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VV ㅅㅅ 12화

V.V, ㅅ.ㅅ

(11) VENEZIA

by Fernweh

VENEZIA


우리말 자음으론 비읍 하나지만, 로마자에선 B, V, W 세 글자나 비읍으로 발음될 수 있다. 앞서 부크레슈티(B)와 바르샤바(W) 여행기만 다루고 V자로 시작하는 도시의 여행기를 쓰지 않으려니 좀 개운치 못하다. 책 제목에 쌍으로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V자가 날 노려보는 것만 같으니까. 부랴부랴 어떤 도시가 있는지 떠올려 본다. 오호라, 딱 한 군데밖에 없으니 어느 도시 이야기가 더 재미날지 고를 필요도 없다. 베네치아, 너로 정했다.


‘도시의 여행자’ 콘셉트로 글을 쓰기도 안성맞춤이다. 다른 도시와는 다른 자기만의 특색이 확고한 도시니까. ‘수상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도시의 속살을 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운하가 구불구불 파고든다. 육지의 위아래에서 도심 곳곳을 잇는 평범한 대중교통은 다닐 수 없는 구조다 보니 배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배가 대중교통으로 운행된다는 게 어딘가 어색했는지 불리긴 또 수상 ‘버스’(Vaporetto, 바포레토)로 불린다. 이탈리아어의 쫄깃한 억양을 담아 ‘바, 포-레~토!’라고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베네치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요동쳤다. 물살을 짜릿하게 헤치며 도시를 구석구석 구경할 상상도 덩달아 요동쳤다. (아, 그때 난기류를 만났던가…)


윌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데 내 상상은 왜 현실이 되지 못한 채 무참히 내팽개쳐졌을까. 일상의 많은 부분이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이미지가 선입견처럼 작용했다. 바포레토도 지상 버스처럼 빠르게 도심 곳곳을 이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름이고(에어컨을 트니까) 겨울이고(추우니까) 창문을 꽉 닫아서 차내의 답답한 공기만 머금어야 하는 지상 버스와 달리 수상 버스에 타면 시원한 강바람으로 이동하며 콧바람을 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수상 버스는 물 위를 기어 다녔다.


짜릿하게 도심 속 강을 가로지르긴커녕 속도가 너무 느려 물에서 솟구치는 비릿한 물 냄새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주요 정류장에만 정박하는 급행이 있었지만, 속력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40분이 걸려 겨우 도착한 산 마르코 광장에서 본격적인 구경 전에 커피 한잔으로 멀미 기운을 잠재우려고 했는데, 에스프레소가 7유로에 달하는 사악한 관광지 물가에 애꿎은 침만 꿀꺽 삼키며 속을 달래야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느긋하게 베네치아 풍경이나 구경하자, 는 개뿔. 주요 관광지를 잇는 노선이 1번 딱 하나라 정류장에 설 때마다 관광객의 썰물과 밀물이 반복돼서 구경할 정신이 없었다. 힘차게 밀라는 물은 안 밀고 관광객만 물밀듯이 오가는 판국이었다. 내가 이곳을 여행한 건 여름철 성수기였고 ‘오버 투어리즘’의 폐해를 겪은 도시에 베네치아가 왜 포함됐는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물만 빠져나오면 성한 두 다리로 도심을 쏘다니리라는 결심도 황망하게 무너졌다. 물길에 도시의 절반을 내어 줬다는 건 그만큼 육지의 길이 좁아졌다는 뜻. 물가야 사악했다손 치더라도 산 마르코 광장은 광장이란 말마따나 탁 트인 공간이어서 배를 가득 채운 인파가 몰려도 끄떡없었다. 문제는 그곳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좁아 터진 골목길. 고속도로에서나 보던 병목 현상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달라진 거라면 현상을 일으키는 게 차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 순간 여기가 놀이공원인 줄 착각했다. 세 걸음 가다가 멈춰 서고 또 두 걸음 가다가 멈춰 서고. 놀이기구 대기 줄에서 띄엄띄엄 움직이는 그런 템포로 움직였다. 물 위에서만 느리게 흘러갈 줄 알았던 여행은 이런 식으로 땅위에서도 내 발목을 끈질기게 붙잡았다.*

*여행 당시 블로그에 작성한 여행기의 타이틀은 <사람 ‘치워!’, 베네 ‘치아’> 였다. 내 말장난 기질은 태생부터 있었나 보다.


그래도 여행은 늘 그 끝에 묘하게 짜릿한 여운을 선사한다. 오래 기다린 뒤에 탄 롤러코스터의 질주가 더 짜릿하듯이. 종탑 위에서 바라본 물과 도시 풍경이 자아내는 조화가, 느리게 움직이는 바포레토를 견뎌내며 매일 찾아가 먹던 젤라토의 고소한 뒷맛이, 자기 가게는 드라이한 것보다 스위트한 스프리츠*가 일품이라더니 같이 시킨 티라미수가 달다면서 드라이한 스프리츠를 내주던 아저씨의 넉살이 그리워지는 걸 보면 베네치아 여행의 여운이 남아 있는 건 분명하다.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 프로세코(prosecco)를 베이스로 한 칵테일의 한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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