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rnweh Jun 16. 2022

단 한 권만

단상 (51)

지난주 일요일, 금천구에서 열린 <책, 다시> 북마켓에 참가했다. 주말 이틀간 열리는 행사였지만, 토요일엔 다른 일정이 있어 일요일 하루만 참가할 수 있었다. 규모가 큰 마켓이 아니었고, 아파트 단지가 바로 접해있는 위치였지만 집 앞을 나오는 것도 귀찮아질 수 있는 '일요일'이었기에 책이 많이 팔릴 거란 기대는 하지 않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달랑 두 권. 오랫동안 출판 작업을 해왔기에 대여섯 권의 종수로 책상을 꽉꽉 채운 주변의 여러 작가님에 둘러싸여 있자니 부끄러울 따름이었던 조촐한 차림이었다.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배는 또 잘도 고파서 주최 측에서 제공한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스낵으로 일단 배부터 채우고 시작했다. 


달랑 두 권. 조촐한 차림이다.


아는 작가님, 책방 사장님들과 수다 떨 때 '일요일엔 2시는 돼야 일어날 테니 오전에는 사람이 안 올 거예요'라고 농담을 했는데, 의외로 이른 시간에 찾아주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분들이 계셨다. 그리고 그중 한 분이 개시까지 해주었다. (!) 그것도 책방에 입고한 지 일 년이 넘게 팔리지 못해 악성 재고가 되었다가 결국 반품 딱지를 달고 내 곁으로 돌아온 비운의 졸저 <말을 모으는 여행기>를 데려간 것이었다. 오늘 운이 잘 따라주려나 보다, 했던 생각은 생각으로만 머물지 않고 무려 '완판'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잠깐. 맨 첫 문단을 다시 읽어보시길... 많이 팔릴 걸 기대하지 않았기에 책을 바리바리 엄청 많이 챙겨가진 않았다. 그래도 뭐, 완판은 완판이니까...)


이 날의 행운이 <말을 모으는 여행기>에만 따라붙었던 건 좀 신기했다. 해외여행의 빗장이 서서히 풀리는 타이밍이라 그런지 프랑스어 욕을 소재 삼아 만든 <욕고불만- 욕마저 고상하다는 불어를 만나다>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다들 여행기에 관심을 보였다. 마켓은 8시까지였는데 4시쯤에 <말을 모으는 여행기>가 동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한 권만 빨리 팔린 적은 또 처음이라 좋으면서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뒤에 '뭉크' 인형이 느닷없는 완판을 맞이하는 심정을 잘 대변해 준다. 


아직 네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어서 안 그래도 조촐한데 더 조촐해진 부스를 그대로 둘 수가 없어 책방 사장님을 급하게 찾았다. 이번 마켓은 네 군데의 책방이 합심해서 주최한 마켓인데, 그중 한 책방이 행사장 바로 한 층 위에 있는 '올 오어 낫싱'이었다. 그곳엔 아직 <말을 모으는 여행기> 재고가 네 권이나 남아 있어서 사장님께 부탁해서 잠시 책방 재고를 끌어왔다. 카드 돌려 막기는 해 봤어도 책 돌려막기는 또 처음... 아무튼, 부스를 그나마 좀 덜 조촐하게, 처음처럼 채워두었다. <말을 모으는 여행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깃들었던 행운이 그새 다른 책으로 옮겨진 건지 이후로는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이번엔 <욕고불만>만 팔렸다. 지금 생각해도 참 희한하다. 더군다나 한두 권 깔짝 팔리는 데 그치지 않고 가져간 재고가 다 팔릴 때까지 주야장천 두 번째 책만 팔렸으니 희한하다고 여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첫 번째 책 재고를 가져다 달라고 사장님께 부랴부랴 요청한 건지, 그 부탁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번엔 이 녀석만 재고가 소진될 때까지 팔렸다.


고작 두 권뿐이지만 오셔서 쿨하게 '두 권 다 주세요'라며 두 권을 다 데려가실 큰 손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으려나. 이런 귀인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행'에세이와 '프랑스어 욕' 에세이, 두 책의 카테고리가 너무 다르니까. 마켓 종료 직전 <말을 모으는 여행기>가 한 권 팔려서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다는 후문...

매거진의 이전글 막창에 관한 아주 짧은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